1. 무적 해병대의 상승불패 정신으로 단결, 인내, 애민애족, 임전무퇴의 실천. |
2. 無에서 有를 창조하는 정신. |
3. 정의와 자유를 수호하는 정신. |
★ 창설 및 조직
한국의 해병대는 병력 25,000명에 2개사단과 1개여단 및 여러 분견대로 나뉘어져 있으며 포항에 1사단, 강화지역에 2사단, 백령도에 6여단이 배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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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장 및 장비 K-1 전차 60 대, AAV-7 60 대, 1개 대대의 M109 자주포, 50여대의 상륙돌격 장갑차를 보유하는등 이외 많은 장비들을 갖고 있다. |
AAV-7 과 동일한 미국의 AAVR-7A1 |
★ 임무
유사시 한국의 해병대의 주임무는 휴전선 이북의 원산인근 해안가에 상륙하여 기습공격을 가하여 적의 후방을 교란 차단하는 것이다.
또한 김포의 해병대는 임진강과 한강을 노리고 남하하는 적을 막아낸 후 강을 건너 개성 인근까지 역공하는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으나 문제는 고립된 백령도의 독립여단으로서 적의 집중적인 공격으로 많은 피해와 사상자가 예상되기도 한다.
한국군 최강 해병대와 특전사(적의 심장부 노리는 절정의 고수들)
【‘한번 해병은 영원 해병’의 해병대】
‘한번 해병은 영원 해병’은 영국 속담인 ‘Once a Marine, Always a Marine’에서 나왔다. 어느 나라에서든 뱃사람들은 근성이 있기 마련인데, 근성이 강한 영국 선원들은 ‘한번 뱃놈은 영원 뱃놈’이라는 뜻으로 이 속담을 사용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는 뜻으로 회자됐던 것인데, 미 해병대가 해병을 뜻하는 단어로 Marine을 선택하면서 ‘한번 해병은 영원 해병’이라는 ‘멋진’ 뜻으로 바뀐 것이다.
반면 이 속담의 진원지인 영국에서는 해병대를 뜻하는 단어로 Comma-ndo를 선택했다. Commando는 ‘특공대’로 번역되는 경우가 많아, 바다 냄새가 나지 않는다. 해병은 역시 해병(Marine)으로 불러야 제 맛이다. 미국에서는 해군 병사를 Sea Man이라고 하고 한국에서는 ‘수병’이라고 불러, 해병과 구분한다. 해병(Marine)은 해병대원을 총칭하는 단어이면서 해병대 병사를 가리키는 단어가 된 것이다.
‘한번 해병은 영원 해병’은 결코 빈말이 아니다. 해병대에 들어온 사람은 군복을 입은 때는 물론이고 벗은 후에도 해병으로 남는다. 이등병에서 사령관까지, 예비역에서 그 가족까지 모두 해병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해병대에는 “아버지가 해병 출신이라서 해병대에 자원했다”는 병사가 유독 많다. 특전사 장교들은 보병사단과 특전사를 오가는 경우가 많지만, 해병대원들은 전역하는 그 날까지 해병대에 머문다. 이러한 동질감이 단결과 용감성을 낳았을 것이다.
경북 포항시는 한국 해병대의 주력이 있는 곳이다. 한국 해병부대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베트남전에서 ‘신화를 남긴 해병’이라는 별명을 얻은 ‘청룡(靑龍)사단’일 것이다. 청룡사단은 해병대 2사단으로 불리는데 이 사단은 육군 ○○군단의 통제를 받으며 한강 하구의 김포반도에서 강화도까지 이어지는 휴전선 방어를 맡고 있다. 그러나 해병대를 아는 사람은 포항에 있는 해병대 1사단을 진짜 해병대라고 부른다.
해병대 1사단은 ‘해룡(海龍)’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그러나 ‘해롱해롱’ 하는 해롱으로 들릴 수 있다고 하여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즐겨 사용하는 별칭이 ‘상륙사단’. 1사단은 국내 유일의 상륙군 부대로서 부대 마크에 ‘상륙’이라는 두 글자를 새겨놓고 있다. 1965년 이 상륙사단은 예하의 2연대를 차출해 월남 파병부대로 선정했는데, 이 2연대가 2여단이란 이름으로 베트남에 갔다가 돌아와 2사단(청룡사단)으로 발전했다.
유일한 국가 기동군
한미연합군이 낙동강 방어선으로 몰려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고 있던 1950년 8월17일 한 개 대대에 불과했던 한국 해병대는 경남 통영으로 단독 상륙작전을 감행해 인민군이 장악한 통영지역을 탈환했다. 이때 ‘뉴욕 타임스’의 마거릿 히킨즈 기자가 종군했는데, 그는 기사에 ‘그들은 귀신을 잡을 수 있을 정도로 용감했다(They might capture even the Devil)’는 문장을 남겼다. 여기서 나온 별명이 ‘귀신 잡는 해병’인데, 이 전통을 이어온 것이 바로 1사단이다.
2사단은 전선을 맡고 있어 대대별로 부대가 흩어져 있다. 그러나 1사단은 상륙만을 목적으로 하기에 포항시 도구동·일월동·청림동·오천읍 일대에 밀집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일본 육군은 이곳에 일본열도로 진격해오는 연합군을 공격하기 위해 가미카제(神風) 특공대를 띄울 비행장을 건설하다가 완성하지 못한 채 항복했다. 광복 이후에는 미 육군 부대가 진주하며 군정(軍政)을 펼쳤고, 6·25전쟁 때는 미 해병대 제1항공비행단이 주둔했다.
그리고 미 해병대 1항공비행단이 철수한 1959년 경기도 금촌에 있던 해병대 제1상륙사단이 이곳으로 옮겨왔다. 상륙작전을 펼치려면 전선을 맡고 있지 않아야 하는데 1상륙사단은 포항으로 옮겨옴으로써 명실상부한 상륙작전용 부대로 재편될 수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 국가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을 때, 국가 전쟁지도부는 적의 옆구리를 치고 들어가는 작전을 세워 전세 역전을 꾀한다. 적의 중허리를 자르고 들어가 제2전선을 만드는 강력한 ‘국가 기동군’이 바로 해병대 1사단이다. 해병대 1사단은 하루나 늦어도 이틀 만에 전 사단을 기동시킬 수 있는 국내 유일의 신속대응군이다.
신속대응군은 보병은 물론이고 포병·기갑·공병 등 여러 병과의 부대가 한데 모여 있어야 한다. 1사단은 3개 보병연대와 1개 포병연대, 그리고 수색대대·해안개척대대·상륙장갑차대대·전차대대·공병대대 등을 사령부 주변에 빽빽이 포진시켰다.
전통적으로 해병대를 상징하는 빛깔은 진홍색이다. 해병대는 이름표도 붉고, 티셔츠와 트레이닝복도 붉으며, 깃발도 붉은 색 일색이다. 원색인 적색을 많이 쓰면 ‘촌스럽게’ 느껴지기 마련이지만, 붉은색 일색의 거대 군중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일조점호와 일석점호 때 각 해병 중대에서는 붉은 티셔츠를 입은 구릿빛 사내들이 몰려나와 깃발을 들고 줄지어 뛰기 시작한다.
1만여명이 넘는 1사단 요원들이 뛰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수백 마리 붉은 용이 뒤엉켜 돌아가는 것만 같다. 가까이 다가가면 그들이 내뱉는 함성과 땀내가 후각과 청각을 자극한다. 시커멓고 붉은 ‘적룡(赤龍)’의 기운. ‘무섭다’ ‘이것이 진짜 군대구나’. 사람에 따라 표현은 다르겠지만 그들이 만드는 기세에서 형언하기 어려운 웅혼(雄渾)함이 밀려나온다.
해병대 수색대대의 침투훈련 모습.
수색대대는 해병대에서도 가장 강력한 부대다 |
웅혼한 赤龍의 기운
상륙사단은 ‘뒤에는 물, 앞에는 적을 둔’ 배수진(背水陣)을 치고 싸우는 부대다. 이렇게 위험한 작전을 펼치는 데도 용감함에 매료된 젊은이들은 앞 다투어 자원(自願)한다. 해병대 교육훈련단은 15일 단위로 신병을 입소시키는데 이때 입대 경쟁률이 최하 3대 1이다. 각급 학교의 학년이 바뀌는 겨울이 되면 경쟁률은 10대 1 이상으로 올라간다. ‘한 집안 한 아들’이 보편화된 시대에 이렇게 많은 ‘아들’들이 훈련이 고된 해병대에 자원하는 것은 특이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병(兵) 964기로 교육훈련단에 입소한 김민호(20)군은 여섯 번 떨어지고 일곱 번째에 ‘간신히’ 합격했다. 해병대가 싸움 잘하는 사람을 뽑던 것은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체력 좋은 청년은 넘쳐나기 때문에 실력이 좋거나 행실이 방정하다는 기록이 있어야 해병대에 합격할 수 있다. 김군이 6전(顚)7기(起) 한 것은 바로 출석 상황 때문이었다.
그는 공고 출신인데 취업을 나가느라 고3 때의 출석부가 엉망이었다. 그렇게 해병대 입소시험에 떨어지며 반년을 허비하다 보니 육군으로 입대하라는 영장이 날아올 시기가 닥쳐왔다. ‘죽어도 해병을’ 고집한 그는 해병대사령부의 모병 담당 장교를 찾아갔다. 그는 “고3 때 취업 때문에 출결이 나빴지, 품행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죽어도 해병대에 가고 싶다”고 읍소했다. 김군은 그 후에야 비로소 붉은 명찰을 달 수 있었다고 한다.
이민 간 사람은 군에 입대하지 않아도 된다. 필리핀 이민자의 아들인 이충돈(20)군은 입대를 만류하는 어머니와 한판 전쟁을 치르고 김군과 동기가 되었다. 그는 왜 해병대에 왔느냐는 질문에 ‘누구나 해병이 될 수 있다면 나는 해병대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는 문구로 대답을 대신했다. 배수진을 마다하지 않고 상륙을 감행해 적진 깊숙이 들어가는 해병대의 용감성은 대원들의 이러한 저돌성에서 나왔을 것이다.
해병대는 정규 사단이기 때문에 ‘용사’만으로 구성할 수는 없다. 이발도 해주고 밥도 해주고 기계도 고쳐주는 다양한 특기병을 필요로 하는데, ‘용사’ 후보생들만 주로 지원하다 보니 만성적으로 기술병 부족을 겪는다. 해병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해군으로 입대해 종합기술학교에서 특기 교육을 받은 수병 중에서 임의로 기술병을 차출하기도 한다.
수백 명의 수료생 중에서 해병대로 뽑혀가는 기술병은 대략 20∼30명. 각 부대로 ‘팔려가기’ 전 대기병 생활을 하는데, 이때 해병대로 갈 기술병에게는 빨간색 트레이닝복이, 해군으로 갈 수병에게는 청색 트레이닝복이 제공된다. 대기 기간 중 이들은 가끔 트레이닝 색깔 별로 나눠 전투 축구를 벌이곤 한다. 이때 해병대 쪽 책임자는 빨간 트레이닝복을 모아놓고 “우리는 해병이다. 싸우면 이기고, 지면 죽는 해병이다”는 구호를 선창하며 ‘반(半)협박’조로 정신교육을 시킨다.
이것이 엄청난 전과를 가져온다. 군대 축구가 으레 그렇듯 시합은 인원 제한 없이 펼쳐지니 10대 1로 병력이 열세인 빨간 트레이닝복은 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시합도중 엎어져 나뒹굴다 들것에 실려 나가는 것은 청색 트레이닝복 일색이다. 자원이든 차출이든 빨간 트레이닝복을 입으면 그때부터 미친 듯이 뛰어다니는 것이 해병이다. 이러한 집단 최면에서 ‘악으로 깡으로’의 해병대 근성이 발현된다.
신병들이 자대로 흩어질 때도 해병대의 특성이 여실히 드러난다. 6주간의 교육을 끝내고 더플 백을 앞에 놓은 이들은 눈물을 쏟으며 동기와의 이별을 아쉬워하는 것이다. 단지 훈련을 같이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뜨거운 동지애에 눈물을 뿌리는 것은 해병대에서만 발견되는 ‘특이한’ 현상이다.
외아들로 집안에서 귀하게 여기는 김성겸(병 965기)군은 수색대에 지원했다가 떨어지자 눈물을 쏟았다. 상당수의 육군 병사들은 수색대에 차출되면 ‘죽었다’라고 복창한다는데, 수색대에 못가서 안달하는 사람이 있는 곳이 해병대인 것이다.
해병대 1사단은 정규 사단 중에서 천리행군을 하는 유일한 부대이다. 행군 도중 날이 저물면 산속에서 숙영을 하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그 지역의 해병 전우회가 찾아온다. 6·25전쟁 전에 입대한 팔순의 2기생 할아버지가 며느리·손자까지 동원해 먹을 것을 들고 산속으로 찾아올 때는 해병대원들도 아연 실색한다고 한다.
이러한 동질감은 한미 연합훈련에 참가한 미 해병대에 대해서도 그대로 발휘된다. ‘한번 해병은 국적을 막론하고 같은 해병’인 것이다. 한국군의 이라크 추가 파병이 거론되었을 때 미국에서는 가장 먼저 한국 해병대의 파병을 희망했다고 하는데, 이는 한미 해병대간의 우애와 동질감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해병대는 강하다. 그러나 사람이 이끄는 조직이라 허점이 있다. 해병대는 부사관이 아니라 사병을 주축으로 한 부대인데 노무현 정부가 사병의 복무기간을 일률적으로 2년으로 줄이는 바람에 해병대는 숙달된 고참 부족 현상을 겪고 있다. 때문에 해병대만은 몇 개월이라도 복무기간을 연장했면 하는 것이 해병대 요원들의 바람이다.
사기·군기·단결·숙달
한국 해병대는 과연 강한가. 강한 근성은 춥고 배고프던 시절에 표출되지 국민소득 1만달러의 배 부른 시절에는 기대하기 어려운 것 아닌가. 이러한 의문에 대해 해병대 1사단의 기습특공대대장은 이렇게 대답했다.
“미 육군의 통솔교범은 ‘지휘는 사기와 군기와 단결과 숙달을 올리는 것이 다’라고 밝혀 놓았다. 사기는 목소리가 큰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국가를 위해 희생할 수 있다는 자기 인식에서 나온다. 군기는 명령과 규정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것이고, 단결은 사기가 집단적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숙달은 임무와 직무를 잘 수행할 수 있는 숙련도를 말한다. 해병대는 자원자로 구성됐기 때문에 사기와 단결에 강한 것이 장점이다.
가난하던 시절에는 오도된 사기와 단결과 군기를 과시하기도 했다. 명령과 규정에 자발적으로 복종하기보다는 반항하는 기분으로 사기와 단결을 과시한 것이다. 그래서 술 먹고 싸우고 윗도리를 벗어던지고 다니는 오도된 용맹을 과시한 대원도 일부 있었다.
자발적으로 복종하면 약한 것이라고 생각하던 때였으니 군기 또한 엄정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자원자의 전반적인 수준이 올라가면서 오도되었던 사기와 단결과 군기가 정상화되었다.
이제 한국 해병대는 조국이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사기와 군기와 단결과 숙달을 발휘할 준비를 충분히 갖추었다고 믿는다. 이제 해병대는 머나먼 이국에서도 사기와 단결과 군기를 유지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도전하고 있다. 내 조국이 아닌 남의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을까. 이 길은 진짜 강군이 아니면 나아갈 수 없는 어려운 길이 아닐 수 없다. 한국 해병대는 그 험한 길을 향한 도전에 나섰다.”
-신동아 534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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