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감청자 1
<상감청자원형합> 1959년 경상북도 칠곡 송림사 오층 전탑에서 발견되었다. 사리와 장엄구는 2층 답신(塔身)에 안치된 거북 모양의 석함(石函)에서 출토되었다. 신라시대의 작품인 이 일련의 유물과는 별도로 5층 옥개(屋蓋) 위의 복발(覆鉢)에서 고려시대 때 만들어진 장엄구가 발견되었다. 따라서 이 탑의 복발부 이상이 고려시대에 수리되었고 이때 작품이 공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합은 청자로 만들어진 둥그런 모양이다. 뚜겅 표면에 국화 무늬를 새겼다. 그 주변에는 모란당초(牡丹唐草)를 흑백 상감(黑白象嵌)하였다. 이 무늬들은 깔끔하면서도 생기있게 시문되었다. 뚜껑 외연(外緣)과 합신(盒身) 측면에는 연꽃잎을 쭉 둘러서 백상감하였다. 청자 상감이 고려시대에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을 감안할 때, 함께 발견된 유물과 제작 시기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함께 발견된 유물로는 《은제도금수형장식구》, 《사리장치》 등이 있다. 이것들은 통일신라시대의 사리 장엄구이어서 시대 차이를 보인다. 실제로 이 청자 상감 원형합은 발견 위치도 달라서 주목된다.
<청자상감모란문합> 대접에 뚜껑이 딸려서 합(盒) 모양을 이룬 그릇이다. 대접의 모양은 청자 수주(水注)를 받치는 승반(承盤)과 같이 반구형이고, 조금 넓고 높으며 밖으로 벌어진 굽이 달렸다. 또 대접 입 부분에는 좁은 전이 있고 몸체에는 희미하게 골이 있어서 화형(花形) 대접의 여운을 보인다. 대접과 뚜껑의 바깥 면에는 모란당초문을 반양각하여 바탕에 깔고 거기에 주문양으로 모란꽃 가지를 흑백상감하였다. 대접 안쪽 바닥에는 가운데 칠보문(七寶文)과 그 둘레에 쌍봉문(雙鳳文)이 음각되었으며 뚜껑 안쪽 면에도 칠보문을 가운데 두고 쌍봉문이 상감되었다. 이러한 뚜껑 있는 대접 양식은 신라시대 청동기에도 볼 수 있는데 특히 뚜껑의 형태는 신라시대의 소형 청동 접시에 그 예가 많다. 한 가지 문제가 되는 것은 이 대접의 뚜껑이 대접 받침일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이와 비슷한 청자가 일본의 아타카(安宅) 컬렉션에도 있는데 모두 뚜껑의 바깥 면 위쪽과 대접 바닥에 규사눈을 받쳐 구운 자국이 있고, 특히 뚜껑의 안쪽 면에 아름다운 쌍봉문 상감이 있는 것에 유의할 때 이것은 설득력 있는 추정이다. 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 청자 가마터에서 같은 종류의 파편들이 출토되었다.
<청자상감쌍봉문합>
뚜껑 주위의 경사면(傾斜面)은 반양각(半陽刻)으로, 합신의 측면에는 음각종선(陰刻縱線)을 넣어 화판형을 만든 합으로 유사한 형태의 금속제 합도 많이 남아있다. 뚜껑의 윗면에는 넓고 얕게 백토로 면상감을 한 후, 그 위에 윤곽선·깃털·부리등을 가는 흑상감선으로 표현한 봉황(鳳凰)이 시문되어 있다. 봉황은 좌우대칭으로 서로 목을 감고 있는데, 고려청자(高麗靑磁)에 음각으로 앵무(鸚鵡)가 시문된 예는 많으나 이 합과 같이 봉황이 상감된 예는 드물다. 수하(垂下)된 구연에는 뇌문대가 단정하게 음각되어 있다. 뚜껑의 구연과 합신 드림새는 유약을 닦아 냈으며 둘 다 여섯 곳에 모래섞인 내화토(耐火土)받침 자국이 있어 합신의 뚜껑을 포개어 함께 구웠음을 알 수 있다. 유약은 전면에 고르게 입혀졌으나 유색은 약간 어두운 녹색조(綠色調)이며 빙렬(氷裂)이 있다. 굽은 외저(外底) 중앙을 얕게 파낸 형태로 안다리굽으로 볼 수 있으며 접지면(接地面) 주연(周緣) 세 곳에 규석(硅石)을 받쳐서 번조(燔造)하였다.
<청자상감국문합>
뚜껑을 가진 합(盒)으로 동체(胴體)와 뚜껑이 거의 흡사한 형태이다. 몸체는 편평한 바닥에 완만한 기벽(器壁)을 이루다가 중앙부위에서 돌대선으로 구분하고, 그 중앙에 뇌문(雷文)을 상감(象嵌)하였다. 뚜껑은 구연부(口緣部)쪽에 몸체와 같은 뢰문대(雷文帶)를 돌리고, 완만하게 줄어드는 면에는 연판문(蓮瓣文)을, 가운데 평평한 윗면은 4개의 타원형으로 분할하여 각 타원형의 안에는 국화꽃을 상감(象嵌)하고 중앙은 구슬모양으로 장식하였다. 유약은 부분적으로 부식되었지만 유색은 맑은 하늘색으로, 빙열이 가있으며 뚜껑을 덮어놓은 그릇의 상태는 매우 단정하고 아름답다. 12세기의 작품이다.
<청자상감국문합> 뚜껑은 상면이 편평하고 넓으며, 주연부(周緣部)는 비교적 좁은 편이다. 동(胴)분의 측면(側面)과 저부(底部)의 경계는 턱을 이루고 있다. 뚜껑의 상면(上面)에는 중앙(中央)으로부터 역상감화문(逆象嵌花文), 백상감이중선대(白象嵌二重線帶), 흑백상감국화문대(黑白象嵌菊花文帶), 백상감이중선대(白象嵌二重線帶)가 둘러 있고, 주연부(周緣部)에는 역흑백상감연판문대(逆黑白象嵌蓮瓣文帶)가 배치되어 있다. 뚜껑과 동(胴)분의 측면(側面)에는 백상감뇌문대(白象嵌雷文帶)를 돌렸다. 합신(盒身) 굽바닥의 3곳에는 규석을, 합개(盒蓋) 입술의 6곳에는 내화토를 작고 정교하게 받쳐 번조하였다. 이렇듯 상감문양이 짜임새있고, 정교하게 제작되는 것은 13세기 전반의 경향이다.
<청자상감동화연주문합>
동화(銅畵)는 구리를 주성분으로 한 안료를 바른 후, 유약을 입혀 환원번조(還元燔造)해서 안료가 아름다운 동홍색(銅紅色)이 나도록 하는 기법으로 예전에는 진사(辰砂)라고 불렀다. 동화(銅畵)에는 그릇 표면에 직접 바르는 것, 백상감(白象嵌)한 후 그 위에 바르는 것, 전체적으로 입혀주는 것의 3종류가 있는데 주로 백상감에 바른 예가 많으며 전라북도 부안군 유천리에서 많이 제작되었다. 동화기법은 상감기법과 함께 다른나라보다 이른시기에 고려 장인(匠人)들이 고안한 시문기법이다. 이 소합은 작은 원통형으로 구경에 비해 높이가 높아 사리기(舍利器)로 사용되었을 수 있다. 뚜껑의 읫면 주연(周緣)과 합신의 최하부(最下部)는 모를 죽여 매끄럽게 처리하였다. 뚜껑에는 화심(花芯)에 동채점(銅彩點)을 찍은 국화문(菊花文)이 인화되었으며, 그 주위와 측면 합신에는 중앙에 동채점(銅彩點)을 찍어 장식한 여러 줄의 연주문대(連珠文帶)가 백상감되어 있다. 회청색(灰靑色) 유약(釉藥)은 빙렬(氷裂)이 있으며 발색(發色)은 약간 어두워 흐리게 보인다. 바닥은 평저(平底)이다.
<청자상감운학문합> 이러한 형태의 합은 화장합(化粧盒) 또는 향합(香盒)으로 쓰였던 것이다. 화장합의 경우에는 안에 조그만 그릇들이 연줄기에 달린 연잎 모양으로 들어 있는 경우도 있다. 《청자상감연당초동자문합》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합들은 금속기에서 유래된 기형(器形)이다. 뚜껑에는 가운데에 국화판문(菊花瓣文)이 두 겹의 연주문(連珠文) 띠에 싸여 있고 가장자리에는 바깥으로부터 연판문(連瓣文)과 연주문 띠가 둘리었으며 주문양으로는 12세기 중엽의 전형적인 운학문이 쓰였다. 뚜껑의 측면과 밑짝의 측면에는 완자문과 연주문이 각각 백상감되었다. 뚜껑 가운데 있는 국화판 안과 그 둘레, 뚜껑 가의 연판문 안에 흑상감 연주문을 넣은 것이 이채롭다. 굽은 바닥을 파들어간 안굽이며 규사눈을 받쳐 구웠고, 유약은 비교적 밝은 비색(翡色)으로서 상감 부위 위에 미세한 빙렬이 있다.
<청자상감모란봉황문대접>
《청자상감운봉문화형대접》과 더불어 고려청자 상감 기법의 절정기를 넘어서서 퇴보하기 시작한 13세기에 만들어진 대접이다. 이 대접은 이러한 변조가 나타나기 시작한 시기에 만들어진 청자 상감의 예이다. 안쪽에는 구연(口緣)에 당초문 띠를 돌렸고 바닥 한가운데에 쌍봉문을 놓고 둘레에 여의두문(如意頭文) 띠를 둘렀다. 안쪽 벽 사방에는 날아오르는 봉황을 한 마리씩 나타내고 나머지 공간은 구름 무늬로 가득 채웠다. 바깥 면에도 구연에는 당초문 띠를 돌리고 그 아래에 퇴화된 형식적인 운학 무늬를 두었다. 아래쪽에 국당초 무늬로 보이는 서화(瑞花) 무늬 띠를 둘렀고 굽 둘레에, 연판문이 있다. 봉황의 머리나 학의 머리와 다리, 바깥 하단의 연판문 등 일부분에만 흑상감을 썼을 뿐 나머지 전체가 백상감으로 이루어졌다. 기형(器形)의 곡선도 매우 원만하고 상감 무늬에도 고려적인 특색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 정갈한 회청색이 감도는 유약을 전면에 엷게 입혔고 그물눈 같은 빙렬이 빈틈없이 깔려 있다.
<청자상감모란봉황문대접>
1963년 경상남도 밀양군 활성동의 형원사지(瑩源寺址)로 전해지는 곳에는 부도가 있었는데, 부도는 결실되고 기단(基壇)만 남아 있었다. 이 기단 아래에서 사리 장치들이 발견되었다. 이 청자 대접도 여기에서 발굴된 것이다. 입이 넓고 몸체가 반원형(半圓形)인 대접이다. 밑에는 낮은 굽이 달렸다. 그릇 안에는 모란(牧丹)과 봉황문(鳳凰文)을 시문하였다. 모란은 2-3개가 도안화되어 새겨졌고, 봉황문은 어린아이가 그린 것 같은 서툰 솜씨로 투박하게 장식되어 있다. 그릇 안쪽의 밑바닥과 윗부분에 몇 줄의 선을 둘렀다. 빈공간을 작은 무늬로 채우고 있다. 그릇 표면에도 문양을 시문하였는데, 몇 줄의 선과 간단한 문양으로 소략한 편이다. 제작 연대는 고려 14세기로 추정된다. 함께 발견된 유물로는 《청동사리함》, 《청자상감영모초화문매병》, 《청자상감운봉문대접》, 《청자상감국화문팔각접시》, 《청자상감국화문접시》 등이 있다.
<청자상감운봉문대접> 1963년 경상남도 밀양군 활성동의 형원사지(瑩源寺址)의 부도 기단부(基壇部)에서 발견되었다. 부도는 결실되고 기단만 남아 있었는데, 기단 아래에 설치되었던 석실(石室)에서 사리 장치 일괄이 발견되었다. 함께 발견된 유물로는 《청동사리함》, 《청자상감영모초화문매병》, 《청자상감모란봉황문대접》, 《청자상감국화문팔각접시》, 《청자상감국화문접시》 등이 있다. 이 대접은 《청자상감모란봉황문대접》과 아주 유사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즉 똑같이 입이 넓고, 몸체가 반원형이며 낮은 굽을 달고 있다. 문양도 아주 비슷한 형식과 배열을 하고 있다. 그릇 안쪽 밑바닥과 윗부분에 선을 둘러 장식한 점과 그릇 표면에 선을 두르고 간략한 문양을 시문한 점, 서툴게 그려진 봉황문(鳳凰文) 등이 동일한 솜씨를 입증하고 있다. 다만 모란문(牧丹文) 대신 운문(雲文)이 중심 문양을 이루고 있다는 것 정도이다. 청자의 문양이 형식화되고 거친 점을 보아 고려시대 14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청자상감동자문대접>
기측선(器側線)이 전체적으로 약간 내만되었으며 내저 중앙에는 원각이 있다. 이런 대접들이 처음 만들어질 때에는 굽이 높고 굽다리 측면이 중앙을 향해서 경사를 이루지만, 점차 굽안바닥을 얕게 깎고 접지면(接地面)을 둥글게 다듬어 매끈하게 처리하는 세련된 기형으로 변화된다. 내면은 화문(花文)과 포도동자문(葡萄童子文)으로 꽉차게 압출양각(押出陽刻)한 후, 구연하에는 당초문대를, 내외(內外)의 측면(側面)에는 안에 동자(童子)가 있는 일조 원문(一條 圓文)을 세 곳에 상감하였다. 동자들은 모두 백상감(白象嵌)이며, 윤곽선과 옷주름 등은 흑상감선(黑象嵌線)으로 표현하였는데, 동자들은 연봉을 잡거나 조롱(鳥籠)을 들거나 새를 잡고 있는 등 각각 다르게 표현하였다. 당초문의 형태나 상감된 면적이 적은 점으로 보아 상감기법이 사용되기 시작하는 때에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비색유약으로 빙렬(氷裂)이 있으며, 굽안바닥 주연(周緣) 세 곳에 규석(硅石)을 받쳐서 구웠다.
<청자상감여지문대접> 고려청자 대접이 지닌 곡선미의 특색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부드럽고 따뜻한 곡선으로 이루어진 그릇의 측면은 그 크기와 더불어 중국 송대(宋代)의 정요(定窯)나 경덕진요(景德鎭窯) 대접과는 완전히 다른 세련됨을 느끼게 한다. 문양을 표현한 상감 기법도 매우 섬세하여 상감청자 최성기의 수준을 보여준다. 안쪽 면 입시울 가까이에 가는 당초문 띠를 백상감하여 둘렀고 그 아래 넓은 면의 사방에는 여지(여지(枝))로 보이는 열매를 백상감하였으며, 좁게 패인 바닥 가운데에도 같은 여지문을 넣었다. 바깥 면에는 입시울 아래에 백상감 당초문 띠를 둘렀고 그 아래에 흑백 상감으로 운학문 띠를 넣었으며 넓은 주문양대에는 보상당초문(寶相唐草文)을 역상감(逆象嵌)하였다. 굽 측면에는 중판 연화문대를 음각하였다. 유약과 태토는 매우 정선되었고 기벽(器壁)은 적당히 얇으며 흠이 없다. 그윽한 광택을 지닌 맑은 회청색 유약은 보기 드물게 청정해서 대접 안쪽을 들여다보면 깊은 물속을 내려다보는 듯한 고요함과 맑음이 느껴진다. 전체적으로 그물 모양의 빙렬(氷裂)이 나 있고 바닥에 규사눈을 받쳐 구운 자국이 세 군데 남아 있다. 이러한 뛰어난 유품들은 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 청자 가마터에서 출토되었다.
<청자상감당초문대접> 고려 의종(毅宗) 13년(1159)에 죽은 문공유(文公裕)의 묘지(墓誌)와 함께 경기도 개풍군에서 출토된 이 대접은 연대를 확실하게 짐작할 수 있는 상감청자 가운데 가장 오래된 유물로서 12세기 중엽 고려청자 상감의 발달상을 전해주는 소중한 편년 자료이다. 대접의 안쪽 바닥 가운데에 큰 단판국륜(簞瓣菊輪)을 백상감하고 그 둘레를 백상감 보상당초문(寶相唐草文)으로 채웠으며 입 둘레에도 백상감 당초문 띠를 돌렸다. 이처럼 대접의 안쪽이 백상감만으로 장식된 데 비해, 바깥쪽은 입 둘레에 백상감 당초절지문(唐草折枝文)과 당초문 띠가 있고 그 아래 다섯 군데에 국화 한 가지씩을 흑백상감한 후 바닥 둘레에 연판문(蓮瓣文) 띠를 음각하였다. 맑은 비색유(翡色釉)가 매우 고르게 씌워져 있어 상감 효과가 한층 돋보이며 유택(釉澤)은 은은하다. 굽다리 바닥에는 규사(硅砂)눈 자국이 세 개 남아 있다. 유약과 태토가 극도로 정선되었던 12세기 전반 순청자 전성기의 수작(秀作)들에 비하면 빙렬(氷裂)도 있고 유약도 두꺼워졌지만, 상감 효과를 돋구기 위해 더욱 투명한 유약을 추구해 가는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청자상감쌍어문대접>
내저원각이 없으며, 구연이 완만하게 외반(外反)되어 있어 대접보다도 접시에 가까운 기형이다. 금속기에 그 조형(祖形)이 있으며, 중국 당대(唐代)의 삼채자기나 송대(宋代) 도자기에도 많이 만들어졌던 기형이다. 쌍어(雙魚)의 문양소재는 꽤 일찍부터 사용되었으며 처음에는 음각선(陰刻線)이나 선상감(線象嵌)으로 윤곽만을 나타내다가 이 대접과 같이 면상감으로 변한다. 내면 구연하에는 당초문대를 넣었으며, 내저 중앙과 측면 중앙 세 곳에는 안에 쌍어문이 있는 원문(圓文)을 배치하였고 여백은 음각(陰刻) 파도문(波濤文)으로 메꾸었다. 외면에는 구연하에 백상감으로 이조대선(二條帶線)을 넣고 측면 중앙 세 곳에는 고식(古式)의 모란절지문(牡丹折枝文)을 배치하였다. 비색 유약이 전면에 고르게 입혀졌으나 곳곳에 갈색을 띠는 곳도 있다. 굽안바닥을 아주 얕게 깎았으며 접지면(接地面)이 유난히 좁고 예리하다. 굽안바닥 세 곳에 규석(硅石)을 받쳐서 구웠다.
<청자상감운봉문화형대접>
여섯 장의 꽃잎으로 이루어진 꽃 모양으로 형상된 대접으로, 13세기 전반기 무렵의 작품으로 보인다. 청자 상감 전성 시대의 후기라고 할 12세기 말부터 13세기 전반에는 황금기였던 12세기 후반기의 여세를 몰아 청자 상감이 계속 활발하게 제작되었지만 상감 의장이나 기형에 나타난 곡선의 성격에는 조금씩 시대적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 대접은 이러한 변조가 나타나기 시작한 시기에 만들어진 청자 상감의 예이다. 안쪽에는 구연에 당초문 띠를 돌렸고 바닥 한가운데에 쌍봉문을 놓고 둘레에 여의두문 띠를 둘렀다. 안쪽 벽 사방에는 날아오르는 봉황을 한 마리씩 나타내고 나머지 공간은 구름 무늬로 가득 채웠다. 바깥 면에도 구연에는 당초문 띠를 돌리고 그 아래에 퇴화된 형식적인 운학 무늬를 두었다. 아래쪽에 국당초 무늬로 보이는 서화 무늬 띠를 둘렀고 굽 둘레에, 연판문이 있다. 봉황의 머리나 학의 머리와 다리, 바깥 하단의 연판문 등 일부분에만 흑상감을 썼을 뿐 나머지 전체가 백상감으로 이루어졌다. 기형의 곡선도 매우 원만하고 상감 무늬에도 고려적인 특색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 정갈한 회청색이 감도는 유약을 전면에 엷게 입혔고 그물눈 같은 빙렬이 깔려 있다.
<청자상감운학문대접< 신안 해저 인양 도자기들은 대략 1331년에서 1350년 사이에 중국에서 일본으로 가다가 우리나라 신안 앞바다에서 침몰해 버린 무역선의 상품들로 대부분이 중국 원대 도자기이다. 그러나 그중에는 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 가마와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 유천리 가마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고려청자도 7점이 포함되어 있다. 12세기 중엽의 양식을 보이는 이 대접은 그 가운데 한 점이다. 안쪽 면에는 입 부분 아래에 당초문대(唐草文帶)가 백상감으로 둘리었고 그 아래에 운학문(雲鶴文)이 펼쳐졌으며 바닥에는 소국문(小菊文)이 있다. 바깥 면에는 운학문대와 연당초문대가 아래위로 넓게 자리잡고 있는데 연당초문은 역상감(逆象嵌)되어 있다. 굽은 낮고 굽 안 바닥 둘레에 규사눈 받침 자국이 있다. 강진 사당리 가마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밖에 신안 해저에서 인양된 고려청자는 12세기 전반의《청자양각연당초문매병》12세기 후반의 청자상감국화문탁잔, 12세기 말에서 13세기 초 무렵의 청자상감모란국화문 탁잔, 12세기 후반 무렵의 청자상감운학국당초문베개, 13세기 무렵의 청자사자연적, 14세기 초 무렵의 청자상감국화문뚜껑이 있다.
<청자상감국당초문대접> 굽이 작고 구연이 넓은 청자 대접이다. 기벽은 얇고 시유상태가 고르며 회청녹색을 띠고 있다. 그릇 내부에는 작은 안바닥이 표시되어 있고 국화문이 시문되어 있다. 내부 기벽에는 구연부분에 당초문이 돌려져 있고 중앙에 여지문이 네군데 시문되어 있다. 그릇 외벽은 약간 갈색을 띠고 기벽의 중앙에 원안에 든 국화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빽빽한 소용돌이 문양을 상감하였다. 그릇의 일부에 빙열이 보이기도 하는데 깔끔하고 품위있어 보이는 그릇이다. 13세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청자상감국문대접>
만든 기법과 자질(磁質)과 기형(器形)이 모두 《청자상감국화당초문대접》과 유사하지만 입 부분이 바깥으로 조금 벌어진 점과 상감 무늬 전체가 백상감으로만 이루어진 점이 다르다. 안쪽 바닥에 무늬를 제외한 배경 부분을 상감하는 역상감(逆象嵌) 기법으로 상당히 큰 국화륜(菊花輪)을 새겼고 입 부분 가까이에 당초문 띠를 두른 다음 그 사이의 공간에 국화문을 다섯 개 배치했다. 바깥 면에는 입 부분 가까이에 서운문(瑞雲文)을 다섯 군데 배치하고 그 아래에 당초문 띠를 돌렸으며 또 그 아래에는 유려한 당초문을 넓게 두르고 두 줄의 선으로 문양대를 마감하였다. 굽 둘레에 음각 연판문이 돌려져 있다. 유조(釉調)는 매우 투명한 맑은 회청색이며 성긴 빙렬(氷裂)이 전면에 나타나 있다. 굽 바닥은 얕게 파들어갔으며 굽 밑에 규사눈 자국이 세 군데 남아 있다.
<청자상감화접문대접>
청자 상감은 12세기 후반에 절정에 이르지만 13세기로 넘어오면서 태토와 유조(釉調), 문양과 구도, 기형(器形)에 이르기까지 조금씩 이완의 징조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도자기뿐만 아니라 그 무렵의 금속 공예나 조각에서도 같은 경향을 감지할 수 있다. 이 대접은 기형과 문양 등이 모두 그 중간 과정을 보여주는 예이다. 안쪽 면에는 입 부분에 형식화된 좁은 당초 무늬 띠를 두르고 바닥에는 국판문(菊瓣文)을 넣고 둘레에 연판문(蓮瓣文) 띠를 돌렸다. 나머지 넓은 안벽 네 군데에 초화절지(草花折枝)를 넣었는데 꽃이 활짝 핀 가지와 아물린 가지가 번갈아 있으며 활짝 핀 가지에는 새가 한 마리씩 앉아 있다. 꽃가지 사이의 공간에는 벌 같기도 하고 나비 같기도 한 곤충이 두 마리씩 있다. 바깥 면에는 입 부분에 형식화된 좁은 당초 무늬 띠가 있고 바닥쪽에 연판문 띠를 돌렸으며 사이의 넓은 면에는 두 겹 선으로 이루어진 원 안에 국화 무늬를 넣고 나머지 공간에 국당초문(菊唐草文)을 가득 채웠다. 유약은 빙렬(氷裂)이 없고 옅은 녹색이 감도는 비색유(翡色釉)이며, 기벽(器壁)은 조금 두껍고 굽도 크고 두툼하며 아래에 큰 규사눈 세 개를 받쳐 구운 자국이 있다.
<청자상감국문팔각접시> 청자팔각접시로 태토도 거칠고 구연도 예리하게 마무리 되지 않았다. 그릇 안바닥은 팔각형이지만 굽은 둥근 형태이다. 유약은 회록색으로 두껍게 시유되어 있으며, 내벽 전면에 빙열이 있다. 안바닥 중앙에는 펼쳐진 꽃잎모양이 양각되어 있고 내벽은 면과 면의 연결부위에 두껍게 굵은 선을 그어 면을 나누었다. 외벽은 각면의 연결부위가 둥글게 처리되고 각면은 사각형의 구획안에 국화문을 상감하였다. 낮은 굽에는 4개의 받침자국이 붙어있다. 14세기의 작품이다
<청자상감국문팔각접시>
1963년 경상남도 밀양군 활성동의 형원사지(瑩源寺址)의 부도 기단부(基壇部)에서 발굴되었다. 기단 아래에는 석실(石室)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여기에서 사리 장엄구들이 출토되었다. 석실은 대형 석판(大形石板)을 4벽에 세워 방형(方形)의 공간을 이루었는데 바닥은 점토로 다졌다. 같은 모양의 접시 세 개가 함께 발견되었다. 이 접시는 둘레의 높이가 길고 팔각(八角)으로 모를 내, 보통의 납작한 접시와는 형태가 아주 다르다. 그릇 표면은 팔면(八面)으로 분할되었는데 여기에 문양을 장식하였다. 한 면의 상하에 선(線)을 두르고, 그 안에 선으로 사각형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사각형 문양 안에는 소략한 국화문(菊花文)을 시문하였다. 각면은 동일한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함께 발견된 유물로는 《청동사리함》, 《청자상감영모초화문매병》, 《청자상감모란봉황문대접》, 《청자상감운봉문대접》, 《청자상감국화문접시》 등이 있다.
<청자상감국문접시> 1963년 경상남도 밀양군 활성동의 형원사지(瑩源寺址)의 부도 기단(基壇) 아래에서 발견되었다. 발견될 당시 북쪽벽 앞에 같은 모양의 접시 두 개가 포개진 채 널려 있었다. 이 접시는 보통의 납작한 접시와는 형태가 조금 다르다. 함께 발견된 《청자상감국화문팔각접시》처럼 접시 둘레의 높이가 길다. 다만 모를 내지 않은 원형의 기형(器形)이다. 또 그릇 안쪽에 아무 문양도 시문하지 않았던 팔각 접시와는 달리 안쪽에 두 줄의 동심원(同心圓)을 장식하였다. 그 후 동심원 주위에 소략한 무늬를 가하였다. 그릇 표면에는 선(線)을 둘러 공간을 구획한 후 도안화된 국화문(菊花文)을 새겼다. 청자의 문양이나 형태를 보아 고려시대 14세기쯤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함께 발견된 유물로는 《청동사리함》, 《청자상감영모초화문매병》, 《청자상감모란봉황문대접》, 《청자상감운봉문대접》, 등이 있다.
<청자상감국문유병> 유병은 향유(香油)나 머릿기름 등의 기름을 담는 병으로, 통일신라시대의 토기에서부터 나타나며 고려청자를 거쳐 조선시대의 백자·청화백자에 이르기까지 많이 만들어졌다. 가장 작고 앙징맞은 향유 병에서부터 연지 반죽용 기름을 담는 작은 병, 비교적 큰 머릿기름용 병 등, 안에 담긴 기름의 종류에 따라 다양한 형태와 크기가 있었지만 대체로 목이 짧고 배가 볼록하다. 고려시대에는 《청자상감국화문동채유병》《청자철채백퇴점유병》등을 비롯하여 순청자, 상감청자, 철회청자 등 다양한 기법의 유병이 만들어져 상당량 전해진다. 그중에는 병 속에 기름을 넣고 뚜껑을 막은 상태로 발견된 것도 있다. 신라 토기 유병과 비교할 때 고려청자 유병들은 주둥이가 더 작고 몸체가 옆으로 벌어져 동글납작해지는 변화를 보인다. 이 유병은 좀더 앞선 시기의 것에 비해서 몸체가 납작해졌지만 입 부분의 각이 살아 있고 몸체의 선도 탄력 있다. 윗면에 일종의 기하학적 구성인 칠보문 속에 국화문을 넣어 상감하였고 아랫 면에는 연판문 띠를 돌렸는데 연판문 사이를 백상감으로 메웠다. 빙렬(氷裂)이 몇 가닥 나 있는 담담한 비색유(翡色釉)가 약간 두껍게 입혀졌고 바닥에는 규사눈 자국 세 개가 남아 있다.
<청자상감국문마상배> 내만된 구연과 풍만한 동부(胴部)를 가진 원추형의 마상배(馬上杯)이다. 내면(內面)은 무문이고, 외면(外面)의 구연 바로 아래에는 백상감뇌문대(白象嵌雷文帶)와 빗금무늬를 돌렸다. 동부(胴部)에는 2조(條)의 백상감원(白象嵌圓) 안에 흑백상감국화문(黑白象嵌菊花文)을 돌아가며 3곳에 배치하였으며, 첨저(尖底)의 저부(底部)에는 역상감(逆象嵌)의 연판문대(蓮瓣文帶)를 둘렀다. 담회청색(淡灰靑色)의 유색을 띠며 태토는 비교적 정치(精緻)하다.
<청자상감국문퇴주기>
고려 19대 명종(明宗)의 지릉(智陵)에서 출토된 청자소문타구(靑磁素文唾具)와 같은 기형(器形)이다. 위쪽에 시원하게 펼쳐진 물받이 전이 있고, 그 아래에 조그마한 항아리 모양의 몸체가 전을 받치고 있다. 넓은 물받이의 안쪽 면 입 두레에는 띠선을 두 줄 돌린 다음 그 안에 인화 상감 기법으로 국당초문(菊唐草文)을 둘렀고 넓은 공간에는 국화절지(菊花折枝)를 여덟 군데에 장식했다. 바깥 면의 물받이 변두리에는 국화절지를 세 군데에 상감했고, 그 아래 몸체에는 물받이 바깥 면의 문양과 겹치지 않고 엇갈리게 세 군데에 국화절지를 상감했다. 유약은 두껍고 광택이 은은하며 빙렬(氷裂)이 없는 질좋은 비색유이다. 굽다리는 청자 전성기의 기명(器皿)에서 볼 수 있듯이 그 단면이 역삼각형에서 끝을 약간 둥글린 모습이며 굽 밑에는 유약을 닦아내고 내화토(耐火土) 빚음눈을 받쳐 구운 자리가 네 군데 있다.
<청자상감국문병>
청자상감병으로 담녹색을 띠며 유빙렬이 있다. 아가리 일부가 결실되었고, 몸통과 굽바닥에 균열이 있다. 아가리는 나팔처럼 넓게 벌어졌고, 목은 가늘고 길며, 몸통은 목아래에서 점점 퍼지며 내려가 몸통 아래 부분에서 최대로 불룩했다가 다시 좁아져 굽에 이른 형태이다. 굽은 얕고, 바닥의 유를 훑어냈으며, 모래섞인 내화토 받침을 두고 구운 흔적이 있다. 아가리 아래에는 두 줄의 음각선을 두르고 그 아래로 몸통 전면을 음각과 양각 세로선을 교대로 이용하여 8면의 참외 모양으로 만들었다. 어깨 4곳의 음각선부분에서 국화문이 뻗어나가 8개의 각면에 국화문이 상감 시문되어 있다.
상감청자는 만든 그릇이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표면에 문양을 새기고 그 안에 백토나 자토[ 토(土)]로 메워 초벌구이를 한 후 유약을 입혀 굽는 것이다. 이 청자는 청자상감국화무늬병으로 담녹색을 띠며 유약의 빙렬이 있다. 굽은 얕고, 바닥의 유를 훑어 냈으며 모래 섞인 내화토 받침을 두고 구운 흔적이 있다. 아가리 아래에는 두 줄의 음각선을 두르고 그 아래로 몸통 전면을 음각과 양각 세로 선을 교대로 이용하여 참외 8면의 모양으로 만들었다. 어깨 4곳의 음각선 부분에서 국화무늬가 있음
<청자상감국모란문장경각병> 고려청자의 목이 긴 병 양식에 있어서 몸체와 병 목의 형태가 조금씩 변화를 보여 왔다. 이 병은 몸체보다 목이 훨씬 더 길고 어깨의 선이 힘차게 부풀었으며 굽이 분명하게 도드라져 있어서 안정감이 있다. 몸체와 병목의 면을 세로로 깎아낸 것도 고려 도공의 창의(創意) 가운데 하나이다. 입 언저리에는 좁은 뇌문(雷文) 띠를 상감했고 긴 목의 모깎기한 면마다 당초 모양의 구름 무늬를 어긋나게 상감해 넣었다. 어깨에는 여의두문(如意頭文) 띠를 넣었고 몸체에는 모란과 국화꽃 가지를 각 면마다 어긋나게 배치했으며 굽도리에는 뇌문 띠를 둘렀다. 유약은 회청색 계통의 연한 청자 색을 띠었으며 그물눈 같은 빙렬(氷裂)이 있다. 바닥에는 내화토(耐火土)와 모래 빚음눈 자국이 다섯 군데 남아 있다. 이러한 기형(器形)은 11세기에 이미 나타났고 12세기에는 세련되었으며 13세기에도 계속 만들어졌다. 목을 모깍기한 병의 몸체는 마름꽃 모양(菱花形)이거나 둥근 모양일 때도 있다. 목이 긴 병의 경우, 대개 목이나 몸체가 원형이고 굽이 퍼져 있지 않으며 구울 때 어깨가 내려앉아 목이 비뚤어지는 예가 흔하다. 그러나 이 병은 조형과 구워낸 기술이 모두 높은 수준을 보인다.
<청자상감국모란문과형병> 나팔꽃처럼 벌어진 입, 참외 모양의 몸체, 치마 주름 모양의 높은 굽다리를 지닌 화병이다. 입은 아홉 장의 꽃잎을 가진 부정형의 꽃 모양이고 몸체는 8릉(八稜)을 이루었다. 병목에 두 줄의 선을 백상감했고 어깨에는 백상감으로 여의두(如意頭) 무늬 띠를 돌렸다. 팔등분된 몸체의 각 면에는 국화와 모란꽃 한 가지씩을 번갈아 흑백상감하여 주문양을 삼았고 굽다리 위의 몸체 아랫도리에는 역상감(逆象嵌)으로 두 겹 연판(蓮瓣) 무늬 띠를 흑백상감으로 돌렸다. 맑고 옅은 녹색을 띤 유약이 약간 두텁게 입혀졌고 부분적으로 거친 빙렬(氷裂)이 나타나 있으며 광택은 대체로 은은한 편이다. 굽 바닥에 규사눈 자국이 다섯 군데 남아 있다. 굽다리 주변이 다소 불균형하게 벌어진 느낌이 있으나 이는 오히려 부정형한 병입의 모양과 어울려 부드러운 인상을 준다. 고려의 도읍이었던 개성 부근에서 출토되었는데 이러한 청자 상감은 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 청자 가마에서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청자상감국문과형주자> 크고 작은 골을 각각 여섯개씩 종으로 파내어 있다. 큰 골 사이의 각 면에 연계국화문(聯繫菊花文)을 상감하고 하위(下位)에는 연판문대가 상감되어 문양이 몸통을 가득 메우고 있다. 주구와 손잡이에 문양이 없고 서로 대칭되게 부착(附着)되어 있다. 전반적으로 빙렬이 있다.
<청자상감국문탁잔>
고려시대에는 이 탁잔과 거의 유사한 형태와 문양을 갖춘 금속제 탁잔이 많이 만들어졌다. 특히 잔 외구연(外口緣)의 도드라짐과 탁 전 가장자리의 도드라짐은 금속제 탁잔을 범(范)을 사용해 만드는 과정에서 생겨났던 흔적이 청자에 남은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대개의 경우 이러한 탁잔들은 잔이건 탁이건 굽을 따로 만들어 붙이는 방법으로 제작되었으며, 금속기(金屬器)든 도자기(陶磁器)든 범을 사용해서 대량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비슷한 청자잔탁들이 많이 남아 있다. 잔(盞)은 구화형(九花形)이며 구연하에는 음각 당초문대가, 각 면에는 국화문이 시문되었다. 탁(托)은 십화형(十花形)으로 잔좌 중앙에 음각 국화문(菊花文) 그 주위에 양각 복판문(伏瓣文), 골에는 음각(陰刻) 파어문(波魚文), 전에는 국화문이 각각 시문되어 있다. 비색(翡色) 유약이며 잔은 모래섞인 내화토(耐火土)를, 탁은 굽다리 안쪽 세 곳에 규석(硅石)을 받쳐서 구웠다.
<청자상감국문탁잔> 고려시대 탁잔의 양식은 원래 당송(唐宋) 기명(器皿)의 형태에서 유래하였지만 12세기 전반기에 이르면 기형(器形)과 유태(釉胎)에 고려적인 특색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 후 12세기 후반 청자 상감 시대가 되면 잔의 비례가 고준(高峻)해지고 전체의 균형과 조화에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이 탁잔은 전체적인 비례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초기의 작품으로서 12세기 후반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짐작되며, 잔의 꽃잎 끝 부분이 산(山)처럼 뾰족해졌고, 잔대의 전이 사면(斜面)을 이루었고 굽이 훨씬 높아지는 등, 전 시기에 비해 많은 변화를 보이고 있다. 잔의 바깥 면과 잔대의 전에 국화 무늬가 흑백상감되었다. 유약은 옅은 녹색을 띤 맑은 비색유(翡色釉)이며 그물꼴의 빙렬(氷裂)이 있다. 굽다리 밑에 규사눈 세 개를 받쳐 구운 자리가 있다
<청자상감국문탁잔>
고려 자기탁잔의 유형은 대체로 3-4가지로 구분된다. 《청자탁잔》, 《청자탁잔》, 《청자음각초화문화형탁잔》, 《청자상감국화문탁잔》과 같은 것이 가장 일반적인 양식이며 《청자동채탁잔》과 같이 잔받이가 잔처럼 생기고 아래위가 뚫린 것이 있고 이 탁잔과 비슷하지만 위에 잔이 없고 잔받이가 바로 잔이 되는 양식 등이 있다. 이 탁잔의 양식에는 11세기 이래의 고식(古式)이 많이 남아 있는데, 이처럼 뚜껑을 갖춘 잔은 매우 희귀한 예이나 전문가에 의해 수습된 것은 아니다. 잔과 뚜껑, 잔받침의 가장자리에 모두 똑같은 양식의 완자문 띠를 둘렀으며 상감 양식으로서는 비교적 고식에 속하는 국화절지문(菊花折枝文)을 역시 잔과 뚜껑, 잔받침에 모두 넣었다. 유약은 녹색이 짙은 편이어서 12세기 전반의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그물 모양의 빙렬(氷裂)이 퍼져 있다.
<청자상감국문잔대>
꽃이 엎어진 모양의 높은 굽에 화형전을 두르고 그 위에 반개한 꽃 모양의 잔이 올라앉은 모습이다. 내부는 바닥까지 뚫려 있고 전의 끝 부분이 일부 파손되었다. 반개한 꽃 모양의 잔은 꽃잎 하나 하나를 음각선으로 표시하였고 전은 8개의 꽃잎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각 국화꽃이 상감되었다. 유색은 담청색으로 맑고 시유상태도 고른 편이다. 굽바닥 가까이에 3개의 규석받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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