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52년 9월, 미 해군은 기존에 함재기로 운용하며 전폭기 용도로 사용해 온 보우트(Vought) 사의 F7U 커틀러스(Cutlass) 전투기를 대체하기 위한 차기 함재기 도입 사업을 추진하게 되었다. 미군은 6·25전쟁 때부터 시작된 제트기의 시대를 맞이하며 차기 전투기는 현대적인 초음속 전투기가 되어야 한다고 판단했고, 이에 따라 미 해군은 사상 처음으로 초음속 전투기를 함재기로 도입할 계획을 수립했다. 미 해군은 상세한 요구도를 수립하면서 속도는 고도 1,144m에서 마하 1.2를 돌파할 수 있어야 하고, 상승률은 127m/s에 달해야 하며, 착륙 속도는 160km/h를 넘지 않을 것을 명시했다. 또한 6·25전쟁 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12.7mm 짜리 기총은 더 이상 효용성이 없다는 판단을 내림에 따라 최소 20mm 기관포를 장착하기를 희망했다. 미 해군의 요구도를 받은 보우트의 존 러셀 클라크(John Russell Clark, 1908~1986) 항공기 개발본부 차장은 요구도를 충족하는 항공기 개발을 위해 V-383 팀을 꾸린 후 작업에 들어갔다.
V-383은 전투기로써는 이례적으로 고익(高翼)을 채택했으며, 이 때문에 랜딩기어는 모두 동체에 수납 돼야 했으므로 기어의 몸체가 짧고 가벼운 제품이 채택됐다. ‘십자군(十字軍: Crusader)’에서 따온 이름을 별칭으로 부여한 이 기체에는 프랫 앤 위트니(Pratt & Whitney) 사의 J57 엔진을 장착했으며, 이는 J57 엔진의 최대 출력이 18,000 파운드 이상으로 강력한 추진력을 냈으므로 기체가 손쉽게 음속을 돌파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크루세이더는 1956년 시험 비행 중 1,633km/h를 기록해 미군이 운용한 역대 항공기 중 최초로 1,000 mph(1,609km/h)에 도달한 항공기가 되었다. 크루세이더는 또한 근접전 용도로 20mm 이상 기관포를 장착하기를 희망하는 미 해군의 요구도를 충족하기 위해 무려 4정의 20mm 내장 기관포를 장착해 근접전 능력을 강화했으며, 중거리 전투를 위해 AIM-9 사이드와인더(Sidewinder) 단거리 공대공 미사일을 장착했다.
미 해군이 본격적으로 차기 함재기 사업의 입찰을 시작하자 총 8개 사가 제안서를 제출했으며, 입찰에 참가한 주요 기체는 XF8U 크루세이더 외에 그루먼(Grumman/1994년 노스롭에 합병)의 F-11 타이거(Tiger), 훗날 F-4 팬텀(Phantom) II가 될 맥도넬(McDonnell/1967년 더글러스에 합병) 사의 F3H 데몬(Demon), 그리고 노스 아메리칸(North American/1967년 록웰에 합병)의 F-100 슈퍼 세이버(Super Sabre)를 함재기로 개량한 “슈퍼 퓨리(Super Fury)” 등이었다. 미 해군은 각 기종의 시험 평가 후 크루세이더가 가장 함재기 용도에 맞게 착륙 거리가 짧고, 혹독한 함상 착함의 충격을 견딜 수 있는 강력한 랜딩기어와 착함용 테일후크가 기본적으로 장착되어 있었기 때문에 1953년 5월부로 보우트의 XF8U를 최종 후보로 선택했다. F8U는 약 7도 가량을 틸트(tilt) 시킬 수 있는 가변 붙임각 날개(Variable-incidence wing)를 채택한 점도 독창적이었다. 가변 붙임각 날개는 동체가 특정 방향으로 비행을 하고 있는 동안 날개만 약 7도 가량 움직임으로써 받음각을 넓힐 수 있게 해주었으며, 전방 시계에 영향을 주지 않고도 양력을 늘릴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 함재기에 적합했다.
미 해군은 우선 세 대의 XF8U-1 시제기 납품 계약을 체결했으며, 시제기 1호기는 1955년 3월 25일에 초도 비행을 실시하면서 첫 비행에서 음속을 돌파했다. 이후 개발은 아무런 문제 없이 순탄하게 진행되어 양산 1호기인 F8U-1은 1955년 9월 30일 자로 초도 비행에 성공했다. 미 해군은 F8U-1을 항모 포레스탈(USS Forrestal, CV-59)에 탑재하여 캐터펄트(catapult) 이함(離艦) 테스트까지 마쳤다. 이후 크루세이더는 1956년 12월부터 실전 배치에 들어갔으며, 1957년 4월부터는 프랭클린 루스벨트(USS Franklin Roosevelt, CV-42) 항모에 배치되었다. 이후 크루세이더는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에도 정찰기 사양인 RF-8이 투입되어 소련군이 쿠바에 IRBM을 설치 사실을 증명할 결정적인 증거를 수집했으며, 이후 미-소가 합의를 하면서 소련이 쿠바에서 IRBM을 제거하기 시작했을 때에도 철수 상황을 감시했다. 크루세이더는 이후 베트남 전쟁에 투입되어 ‘미그 사냥꾼’의 명성을 쌓으며 대활약 했다.
크루세이더가 실전 배치된 후 삼군(해군, 공군, 해병대)이 운용하는 항공기 식별 기호의 통일성이 없어 혼동되는 경우가 많다는 지적이 제기됨에 따라 미 국방부는 1962년 9월 18일 자로 삼군 항공기 식별 기호 지정 제도(Tri-Service Aircraft Designation System)를 도입하게 되었다. 최초 골자는 주로 중첩되는 기능의 항공기를 운용하는 해군, 해병대, 공군의 고정익 항공기 식별 기호를 통일하자는 취지였으나, 결과적으로는 미 육군(회전익)과 미 해안수비대(USCG), 심지어 실험용 항공기를 운용하는 미 항공우주국(NASA)까지 식별 기호를 통일했다. 이에 따라 전투기는 F, 공격기는 A, 수송기는 C, 전자전기는 E, 공중급유기는 K, 정찰기는 R 등으로 명칭이 정리가 됐으며, 크루세이더 또한 지정된 형식에 맞춰 F8U에서 F-8로 식별 번호가 지정됐다. 미 해군은 1970년대 중반까지 크루세이더를 운용했으나 미 해군 예비군에서는 1987년에 가서야 크루세이더를 퇴역시켰다.
쿠바 미사일 사태를 그린 영화 <13일간(Thirteen Days, 2000)>에 등장한 F-8 크루세이더의 비행 장면. <출처: 유튜브 채널>
특징
크루세이더는 이후에 등장할 현대적 전투기 설계의 효시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F-8이 채택한 가변 붙임각은 항공기의 날개만 최대 7도 가까이 꺾을 수 있게 하여 받음각 범위를 크게 늘리는 효과를 가져왔으며, 날개각을 변경시키는 아이디어는 F-111 아드바크(Aardvark)나 B-1 랜서(Lander), F-14 톰캣(Tomcat) 등에서 다시 등장했지만, 이 ‘가변익’ 개념의 개념 실증은 F-8에서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F-8은 “미국의 마지막 총잡이(The Last American Gunfighter)”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는데, 이는 전투기의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하면서 내장 기관총의 효용성이 의심 받기 시작한 상황에서 20mm 기관포를 4정이나 기본으로 탑재했기 때문이다. 크루세이더가 등장한 시점은 아직 공대공 미사일 기술이 성숙하지 않은 단계였기 때문에 전투기가 근접전을 벌이며 기총으로 싸워야 했으며, F-8은 베트남에서 소련제 전투기들과 교전을 벌이며 아직 이 근접전 개념이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직접 증명했다. 반면 F-4 팬텀(Phantom) II는 크루세이더와 완전히 반대 개념을 채택하여 내장 기관총을 빼버리고 미사일로만 무장하는 방식을 택했다.
크루세이더에는 프랫 앤 위트니(Pratt & Whitney) 사의 J57-P-20A 애프터버너 터보제트 엔진이 장착됐고, 20A형 엔진은 최대 10,700 파운드의 추력을 낼 수 있었다. 따라서 크루세이더는 손쉽게 음속을 돌파할 수 있는 빠른 기종이었으나, 기본적으로는 비행이 쉬운 기종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착륙 간 하강 속도가 빨랐기 때문에 착함 도중 발생하는 사고 빈도가 잦았다. 때문에 크루세이더를 안전하게 착함시키기 위해서는 항모도 최고 속도로 항해를 하며 크루세이더의 상대적 착함 속도를 줄여주는 방법 밖에는 없었을 정도다. 심지어 크루세이더는 전방 랜딩기어가 동체 전면부의 뒤쪽에 설치되어 있어 지상에서도 방향 전환마저 쉽지 않아 “소위(少尉) 제거기(Ensign Eliminator)”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도 붙어있었다. 크루세이더는 42년 간 양산된 1,261대 중 1,106대가 어떤 식으로든 사고를 겪은 적이 있을 정도였으며, 베트남 전쟁 중 적에게 격추 당해 추락한 사례는 손에 꼽을 정도다.
재미있는 사실은 크루세이더가 주익을 접은 상태로 이륙한 사례가 있다는 사실이다. 1960년 8월 23일, 이탈리아 나폴리에 착륙되어 있던 크루세이더 한 대가 날개를 접은 상태에서 애프터버너를 가동하여 이륙했으며, 고도 1,500m까지 도달했다가 다시 무사히 착륙했다. 날개가 접힌 것도 모르고 있었던 조종사는 착륙 후 그날따라 항공기의 조종력이 지나치게 나빴다는 불만을 내뱉었다. 이후 수 차례의 증명을 통해 크루세이더는 날개를 접은 상태로도 어느 정도 비행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나, 대신 무장과 연료를 모두 비운 상태여야만 착륙이 가능했다.운용 현황
크루세이더는 초음속 비행 능력을 우선시하여 개발됐으며, 초창기부터 다양한 음속 돌파 기록을 수립했다. 훗날 상원의원이 된 존 글렌(1921~2016/민주/오하이오 주)은 시험 비행 조종사로 F8U 크루세이더에 탑승하여 1957년 7월 16일에 캘리포니아 주 로스 알라미토스(Los Alamitos)에서 이륙하여 3,935km 떨어진 동부 해안의 뉴욕 시까지 3시간 23분 8.3초 만에 도달하여 당시까지 최단 시간 대륙 횡단 기록을 수립했다. 당시 크루세이더는 세 차례 공중 급유를 했기 때문에 급유 시 속도가 480km/h까지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평균적으로 음속 이상 속도를 비행 내내 유지했다.
베트남에서 처음 실전에 투입된 크루세이더는 소련제 전투기들과 근접전을 치르며 스스로의 효과를 입증했으며, 전쟁 기간 중 크루세이더와 미그기 간의 교환 비율은 1:19에 달했다. 크루세이더는 공산 진영이 가장 두려워했던 전투기 중 하나였으며, 심지어는 크루세이더와 마주친 적기 조종사가 교전을 시작하기도 전에 사출해버린 사례도 있었다. 베트남 전쟁 말기인 1972년 5월, 미 제211 항모전투단(VF-211) 소속 크루세이더 두 대는 임무 종료 후 귀환을 하다가 미 해군 항모 쪽으로 접근하는 베트남 공군의 미그기를 발견하여 요격에 나섰다. 미 해군 항모는 최초 F-4를 내보냈다가 귀환 중인 크루세이더 두 대가 요격한다는 보고를 받고 F-4를 모두 불러들였으며, 크루세이더는 잠시 후 요격 지점에 도달했다. 하지만 본격적인 교전이 시작되기도 전, 미그기 조종사는 크루세이더 두 대와 마주치자마자 그 자리에서 사출해버려 바다 위로 낙하해버렸다. 물론 북베트남 조종사가 사출한 정확한 이유는 영영 밝혀지지 않았지만, 어쨌든 이 일화는 얼마나 공산 진영에서 크루세이더를 공포스러운 존재로 받아들였는지를 증명하는 일화로 남았다. 크루세이더는 베트남전쟁 기간 중 공중전으로만 20회 이상 미그기(대부분 MiG-17)를 격추하는 동안 단 3대의 손실을 입어 “미그 킬러”라는 별명이 있었으며, 최종 확인된 격추는 1967년 7월에 레이 허버드(Ray Hubbard Jr.) 중령의 크루세이더가 주니(Zuni) 로켓으로 달성한 미그 17기 격추였다.
크루세이더는 프랑스 해군도 F-8FN이라는 명칭으로 약 42대를 도입했다. 이들 기체는 최초 다쏘(Dassault)의 라팔(Rafale)과 교대하기로 했었으나 냉전이 종식됨에 따라 프랑스 국방부의 국방 예산 감축으로 라팔 사업이 지연되자 중고 F/A-18과 교체하는 방안이 고려되었다. 하지만 프랑스 해군은 F/A-18을 항모 위에서 시험 운용해본 후 크루세이더의 수명을 약 10년 가량 연장하는 방향으로 계획을 틀었다. 이렇게 수명 연장과 기골 보강이 이루어진 ‘F-8P’ 형상은 프랑스 해군에서 1999년 말~2000년 초반까지 운용됐으며, 결국에는 뒤늦게 도입된 라팔과 전량 교대했다. F-8P의 퇴역은 전 세계 모든 크루세이더 시리즈의 공식적인 퇴역으로 기록됐으며, 크루세이더 시리즈는 1957년 첫 실전 배치에서부터 2000년 프랑스 해군의 F-8P형 퇴역까지 총 42년 간 1,261대가 양산되었다. 1977년에는 필리핀 공군이 퇴역 후 애리조나 주 데이비스-몬산(Davis-Monthan) 기지에 보관 중이던 미 해군의 퇴역 F-8H 35대를 도입했으며, 그중 10대는 예비 부품으로 해체하고 25대는 원 제조사인 보우트가 재단장을 실시했다. 미군은 거래 조건에 따라 필리핀 조종사들을 TF-8A로 교육했으며, 필리핀 공군은 F-8을 바사(Basa) 공군 기지에 배치하고 주로 소련 폭격기 요격 용도로 운용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예비 부품이 부족한 기종인데다 계속해서 예비 부품이 소모되자 1988년 이후부터는 비행을 금지시켰으며, 결국에는 1991년 피나투보(Pinatubo) 화산 폭발 때 주기 중이던 F-8 일부가 심각하게 파손되자 기체 전량을 퇴역 처리했다.
보우트 사는 1950년대 말 미 해군 사업을 염두에 두고 일명 “슈퍼 크루세이더”, 혹은 “크루세이더 III”로 불린 XF8U-3 개발을 시작했다. "대시(Dash) III”라고도 불린 크루세이더 III는 1958년 6월에 초도 비행을 실시하면서 최고 속도 마하 2.39를 기록했으며, 비공식적으로는 최대 2.6까지도 도달이 가능할 것으로 예측됐다. 당시 기준으로 크루세이더 III는 단발 엔진 항공기로써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마하 2.4를 돌파할 수 있었으며, 이는 기존 엔진보다 강력한 JT-4 터보제트 엔진을 탑재했기에 가능했다. 성능 면에서도 크루세이더 III는 기존 크루세이더에 비해 실용 상승한도나 상승률 면에서 우수했으며, 항속 거리, 전천후 비행 능력, 기동성 등에서도 유리했다. 특이하게도 크루세이더 III 또한 F-4와 마찬가지로 내부 기관총을 제거하고 6발의 공대공 미사일만 장착했지만, 모의 전투에서 크루세이더 III는 F-4 초창기 형상을 대부분 격추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 해군은 가격, 중량이 유리하고, 심지어 연료 효율성까지 높은 크루세이더 III 대신 F-4H-1을 선택함에 따라 크루세이더 III 개발은 취소됐다. 미 해군이 거의 모든 면에서 우세한 크루세이더 III 대신 F-4를 선택한 이유는 불분명하나, 정황 상의 추정으로는 당시 미 국방부가 삼군(공군/해군/해병대) 공통 플랫폼 사업을 밀고 있었기 때문에 이미 공군이 채택한 F-4를 선택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크루세이더 III가 성능은 우수했을지 모르나, 기본 설계인 크루세이더 I과 II형의 사고율이 매우 높았기 때문에 안전성을 이유로 미 해군이 F-4를 선택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어찌 됐든 시제기만 개발한 상태에서 미 해군이 경쟁 기종인 F-4를 선택해버리자 크루세이더 III 개발은 영영 폐기되었으며, 이는 어쩌면 F8U-3은 역사상 취소된 항공기 중 가장 우수한 기체일지도 모른다는 평가를 받았다.
프랑스 해군용 F-8FN 크루세이더 <출처: 유튜브 채널>
파생형
XF8U-1(XF-8A, V383): 시제기로 제작한 두 대의 기체로, 무장은 장착할 수 없었다.
F8U-1 (F-8A): 최초 양산 형상. 총 318대가 제작되었으며, 31번기부터 J57-P-12 엔진을 더 강력한 J57-P-4A로 교체했다. 이후 F-8A로 제식 번호가 재지정되었다.
YF8U-1E: F8U-1E 개발을 위해 F8U-1 한 대를 개조한 시제기 형상. 이후 YF8-B로 재지정됐다.
XF8U-1T: 복좌형 설계를 테스트하기 위해 제작한 기체로, XF8U-2NE 한 대를 개조했다.
F8U-1T (TF-8A): F8U-2NE를 개조한 복좌식 훈련기 형상. 좌석을 늘리기 위해 동체가 0.61m 가량 늘어났으며, 내장 기관총도 2정을 제거하고 엔진도 J57-P-20으로 교체했다. 1962년 2월 6일에 초도 비행을 실시했으며, 영국 왕립해군은 엔진만 롤스-로이스(Rolls-Royce) 사의 스페이(Spey) 엔진을 장착한 F8U-1T 도입을 고려했으나 향후 F-4 팬텀 II를 선택했다. 이후 TF-8A로 재지정됐으나 단 한 대만 정식으로 제작되었고, 퇴역한 F-8A형 일부가 훈련기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 TF-8A 사양과 유사한 복좌형으로 개조되었다.
YF8U-1P (YRF-8A): F8U-1P 영상정찰기를 개발하면서 제작한 시제기.
F8U-1P (RF-8A): 정찰용 형상. 무장이 장착되지 않고 사진촬영용 장비가 탑재됐다. 총 144대가 양산되었다.
RF-8G: RF-8A를 현대화 한 기체.
F8U-1E (F-8B): 레이더를 향상시킨 제한적 전천후 전투기 형상. 단 한 대만 시제기로 제작되었으며, F8U-1 한 대를 개조했다. F-8B로 재지정됐다.
YF8U-2(YF8-C): J57-P-16 터보제트 엔진을 테스트하기 위해 F8U-1 두 대를 개조한 시제기.
F8U-2 (F-8C 크루세이더 II): 레이더와 화력통제장치를 개선하고, 엔진을 J57-P-16으로 교체하여 애프터버너 사용 시 최대 16,900 파운드까지 추진력을 낼 수 있게 한 형상. 동체 후방에 배면 날개를 하나 설치하여 요잉(yawing: 빗놀이) 불안정성을 개선했고, 동체 측면에 Y자 파일런을 설치하여 두 발의 사이드와인더 미사일을 장착할 수 있게 했다. 1957년 8월 20일에 초도 비행을 실시했으며, 총 187대가 제작되었다. 훗날 F-8C로 제식 번호가 재지정되었으며 “크루세이더 II”로 불렸다.
F8U-2N (F-8D): 항전장비를 최신화 한 형상. 엔진 역시 J57-P-20으로 교체해 최대 18,000 파운드까지 추진력을 낼 수 있다. 전천후 전투기 형상으로 외장 탱크 하나를 대신하여 무유도식 로켓 팩이 설치됐으며, 18,000 파운드 급 J57-P-20 엔진이 설치되었다. AN/APQ-83레이더와 연동하여 어프로치(approach)를 시작하면 현재 비행 속도를 자동으로 유지할 수 있는 착륙 시스템이 도입되었다. 1960년 2월 16일에 초도 비행을 실시했으며, 총 152대가 제작되었다.
YF8U-2N(YF-8D): F8U-2N 개발을 위해 제작된 시제기. 한 대만 제작되었다.
YF8U-2NE: F8U-2NE 개발을 위해 F8U-1 한 대를 개조한 시제기.
F8U-2NE (F-8E): 레이더와 화력통제장치를 개선한 개선형 전천후 전투기. J57-P-20A 엔진과 AN/APQ-94 레이더가 장착되었고, 양쪽 주익 사이에 돌출 덮개를 설치하여 AGM-12 불펍(Bullpup) 공대함 미사일을 운용하기 위한 전자 장비를 탑재했다. 사출좌석 또한 마틴-베이커(Martin-Baker) 사의 사출좌석이 설치되었으며, IRST 센서가 캐노피 앞에 추가됐다. 탑재 중량 역시 2,270kg 가량 증가했다. 1961년 6월 30일에 초도 비행을 실시했으며, 총 286대가 양산되었다.
F-8(FN): 프랑스 해군용 수출 형상. 착륙 속도를 줄이기 위해 플랩(flap) 크기를 키우고, AIM-9 사이드와인더 대신 프랑스제 마트라 공대공 미사일을 통합했다. 제공권 장악용으로 도입되었으며, 경계층제어(境界層制御: boundary layer control) 시스템 및 수평안전판 승강타를 결합한 스테이블레이터(Stabilator)와 AN/APQ-104 레이더가 추가되었다. 총 42대가 양산되었다.
F-8H: F-8D의 동체와 랜딩기어를 강화하고, AN/APQ-84 레이더를 탑재한 형상. 총 89대가 개조되었다.
F-8J: F-8E형을 업그레이드하여 F-8D형과 유사해졌으나, 주익은 F-8FN과 유사하게 개량됐다. 외부 연료탱크 탑재 공간이 늘었고, J57-P-20A 엔진과 AN/APQ-124 레이더가 설치되었다. 총 136대가 개조되었다.
F-8K: F-8C를 업그레이드하면서 불펍 대함미사일을 운용할 수 있게 했으며, J57-P-20A 엔진과 AN/APQ-125 레이더가 추가됐다. 총 87대가 개조되었다.
F-8L: F-8B를 개량한 형상으로, 주익 아래에 하드포인트를 늘리고 AN/APQ-149 레이더가 탑재되었다. 총 61대가 개조되었다.
F-8P: 프랑스 해군의 F-8E를 1980년대에 개조한 형상으로, 수명 주기를 약 10년 정도 늘릴 목적으로 대대적인 기골 보강 작업을 실시했다. 2000년에 전량 퇴역했다.
F8U-1D(DF-8A): 퇴역한 F-8A를 개조하여 SSM-N-8 레굴루스(Regulus) 순항미사일 시험 간 통제기로 운용한 기체. 총 17대가 개조되었으며, 일부 기체는 무인기가 되었다.
DF-8F: 미사일 시험 발사 간 통제기로 운용하기 위해 퇴역한 F-8A를 개량한 형상.
F8U-1KU (QF-8A): 퇴역한 F-8A를 무인화하여 표적기로 개조한 형상.
LTV V-100: F-8 초기 형상을 이용하여 저가형 항공기로 개발하려던 기체로, 1970년대 F-4E 팬텀(Phantom) II, 록히드의 CL-1200 랜서(Lancer), F-5-21과 미 군사지원사업(MAPS: US Military Assistance Program) 입찰을 위해 기획되었다. 하지만 설계 자체가 실패작이었기 때문에 설계도만 작성하다가 계획이 전면 폐기되었다.
XF8U-3 크루세이더 III: 초기 F-8 파생형 설계에 기반한 설계로, F-4 팬텀 II와 경쟁하기 위해 개발됐다. 29,500 파운드 급 J75-P-5A 엔진이 설치되었으며, 1958년 6월 2일에 초도 비행에 들어가며 마하 2.39까지 도달했다. 하지만 결국 F-4가 미 해군으로부터 계약을 수주했기 때문에 총 5대의 시제기가 개발된 후 개발이 취소되었다. "슈퍼 크루세이더"라는 별명이 있었다.
저자 소개
윤상용 | 군사 칼럼니스트 예비역 대위로 현재 한국국방안보포럼(KODEF)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미국 머서스버그 아카데미(Mercersburg Academy) 및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으며, 동 대학 국제대학원에서 국제관계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육군 통역사관 2기로 임관하여 육군 제3야전군사령부에서 군사령관 전속 통역장교로 근무했으며, 미 육군성에서 수여하는 육군근무유공훈장(Army Achievement Medal)을 수훈했다. 주간 경제지인 《이코노믹 리뷰》에 칼럼 ‘밀리터리 노트’를 연재 중이며, 역서로는 『명장의 코드』, 『영화 속의 국제정치』(공역), 『아메리칸 스나이퍼』(공역)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