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춘단공원(奬忠壇公園)의 기막힌 역사(歷史)
奬忠壇 ( 장춘단 )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閔氏)가
살해된 지 5년 뒤인 1900년 9월, 고종은 남소영(南小營)
자리에 장충단을 꾸며 사전(祠殿)과 부속건물을 건립,
을미사변 때 순사한 장졸들의 영혼을 배향하여
매년 봄·가을에 제사를 지냈다.
처음에는 을미사변 때 전사한 시위대장 홍계훈(洪啓薰),
영관(領官) 염도희(廉道希)·이경호(李璟鎬)를 주신으로
제향하고 대관(隊官) 김홍제(金鴻濟)·이학승(李學承)·
이종구(李鍾九) 등 장병들을 배향하여 제사지냈다.
그러나 ‘창선(彰善)·표충(表忠)의 일이 어찌 군인
에게만 한할 것이랴.’는 육군법원장(陸軍法院長)
백성기(白性基)의 제청에 의해 다음해부터 을미사변
때 순국한 궁내부대신 이경직(李耕稙)을 비롯,
임오군란· 갑신정변 당시에 순의(殉義), 사절(死節)한
문신들도 추가, 문무의 많은 열사들이 장충단제향신위
(奬忠壇祭享神位)에 포함되었다.
당시 이 같은 항일 ·배일(排日)의 인물들을 장충단에
제향한 일은 장병들을 크게 감격 고무시켰으며 일제의
횡포가 극심함에 따라 일반의 장충단에 대한 경모심도
더욱 커졌다. 경술국치(庚戌國恥)를 전후하여 애창된
있어 그러한 일면을 말하여 준다.
"남산 밑에 지은 장충단 저 집
나라 위해 몸바친 신령 뫼시네/
태산 같은 의리에
목숨 보기를 터럭같이 하도다/
장한 그분네."
제사를 지낼 때에는 군악을 연주하고 군인들이
조총(弔銃)을 쏘았다. 그러나 1910년 8월 장충단은
일제에 의해 폐사되고 말았다. 1920년대 후반부터 일제는
이 곳 일대를 장충단공원으로 이름하여 벚꽃을
심고 공원시설을 설치하였으며, 상해사변(上海事變)
당시 일본군인 결사대로 전사한 육탄삼용사의
동상과 이토(伊藤博文)의 보리사(菩提寺)인
박문사(博文寺)를 건립하였다.
광복 후 육탄삼용사의 동상과 박문사는 철거되었다
. 6·25전쟁으로 장충단 사전과 부속 건물은 파
손되었으나 장충단비(奬忠壇碑: 서울특별시
지방유형문화재 제1호)는 남아 있다.
이 비는 원래 영빈관 내에 있었는데, 1969년 지금의
수표교(水標橋: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8호) 서편으로 옮겼다.
비의 ‘奬忠壇(장충단)’ 세 글자는 순종이 황태자였을 때
쓴 글씨이며, 뒷면에는 민영환(閔泳煥)이 쓴 143자의
찬문(撰文)이 새겨져 있다. 정부수립 후
장충단공원 경내에는 여러 공원시설이 들어섰다.
장충단은 지금의 신라호텔내의 영빈관자리가
유력하고 그남쪽의 타워호텔에 이르는 터는 南小營으로
대한제국육군의 병영으로 군의 주둔지였으며
서로는 국립극장을 포함하는 넓은 지역이였다.
↓3호선 동국대입구역 6 번출구
가객(歌客) 배 호
1967년 3월 장충동 녹음실.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한 가수가 힘겹게 녹음을
하고 있었다. 그는 당시 신장염 투병 중이었다.
한 소절 부르고는 의자에 주저앉고 다시 일어서
한 소절 부르고... 한 시간 여 만에 힘겨운 녹음을
마치고 어머니의 부축을 받으며 녹음실을
빠져나간 그 사람. 가수 배호다.
이 날 녹음된 곡은 <돌아가는 삼각지>
올해엔 미발표곡까지 포함된 전집앨범이
10장의 CD로 나왔다.
1960년대는 한국 대중음악의 부흥기로 기존의
남인수 등 전통방식의 트로트에서부터 패티김,
최희준 등의 스탠다드 팝에 기반을 둔 노래들이
공존하고 있었다. 배호는 전통과 현대 음악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을 이루며 그 자신만의
창법으로 대중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것이다.
배호 창법의 바탕에는 나름의 음악적 배경이 있었다.
배호의 외삼촌인 김광수, 김광빈은 KBS와
MBC악단장을 역임하였다. 서울음대 교수로
재직했던 당대 최고의 음악가들이었고
그들에게 음악수업을 받은 배호는 그 자신이
드러머이면서 12인조 악단을 이끌던
밴드마스터였던 것이다. 그의 창법은
충실한 음악수업과 드러머의 정확한
리듬감을 바탕으로 창조된 것이다.
배호가 <돌아가는 삼각지>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것은 1967년. 그러나 배호는
1966년 이미 당시로는 불치의 병이었던 신장염으로
투병 중이었다. 1971년 그가 사망하기까지 그가
취입한 곡은 무려 200여곡, 동료의 부축을 받아야
무대에 설 수 있었던 그가 항상 하던 말은
“죽어도 무대에서 죽겠다”였다.
숨쉬기조차 힘든 고통 속에서도 무대에
올라 노래했던 그의 가수혼을 담는다.
죽은 지 35년이 지났는데도 한국인의 애창가요
다수가 그의 노래이고 300여개가 넘는
팬클럽이 사이버 공간을 채우고 있으며,
아직도 그의 목소리를 흉내 낸 가짜 배호가
떠돌고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스타들이 탄생했다가 사라지는 지금,
사후 35년인 지금에도 배호의 노래는 왜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 것일까.
우리는 왜 그를 떠나보내지 않는 것일까?
29년의 짧은 생을 살다간 가수 배호.
(1971년 11월 7일 타계) 그러나 그의 노래는
44년이 지난 오늘까지 우리들 가슴에 남아있다.
이제 낡은 LP디스크 한 장이 세월의 더께를
걷어내고 오래도록 참아왔던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그 목소리에 담긴
가객의 회한과 가락에 실린 그 시절의
자화상, 그리고 그에게 소리 없이 빚져온
우리 노래의 역사까지...
가수 배호는 60년대 후반 이미자, 최희준 등과
함께 최고의 인기를 누린 가수다. 당시 배호는
독특한 창법, 중절모와 안경을 쓴 특이한 외모로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1971년 11월 7일
신장염으로 사망한 후 44년이 지난 지금도
그는 우리 가슴속에 남아있다. 2000년에는
대중가수 최초로 그의 이름을 딴 행정도로가
용산 삼각지에 생겼으며, 2003년에는 정부에서
옥관문화훈장을 추서했고,
안개낀 장충단공원/배호(1967)
안개 낀 장충단 공원 누구를 찾아왔나
낙엽송 고목을 말없이 쓸어안고 울고만 있을까
지난달 이 자리에 새긴 그 이름
뚜렷이 남은 이 글씨 다시 한번 어루만지며
돌아서는 장충단 공원
비탈길 산길을 따라 거닐던 산기슭에
수많은 사연에 가슴을 움켜지고 울고만 있을까
가버린 그 사람이 남긴 발자취
낙엽만 쌓여 있는데 외로움을 달래가면서
돌아서는 장충단 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