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의 맥아더가 크게 한 방 먹은 사연
[한국전쟁, 그 지울 수 없는 이미지 복원 23] 동장군에 가로막힌 크리스마스 공격작전
1950. 11. 23. 미 7사단 장병들이 혜산진 압록강 강변에다 성조기를 꽂고 있다.ⓒ 맥아더기념관
중국군의 개입
미국은 중국의 경고를 외면한 채 계속 북진을 감행했다. 그러자 중국은 자국의 국방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마침내 '중국인민지원군'(아래 중국군)을 한국전에 참전시켰다. 중국이 한국전에 개입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중국의 대 한반도 정책에 있었다. 중국은 예로부터 한반도를 '순치보거'(脣齒輔車)의 관계로 여겼다. 이는 '입술과 이의 관계'와 '수레의 덧방나무와 바퀴의 관계'로, 어느 한쪽이 없어서는 안 될 만큼 중요하다고 인식했다. 곧 중국은 한반도를 그들의 안보 완충지대로 생각한 바, 유엔군이 38선을 돌파하자 곧 자기네 나라의 위기로 여기고 한국전쟁에 개입한 것이다.
두 번째는 국내 정세 때문이다. 중국은 당시 장제스(蔣介石) 국민당 정권을 대만으로 몰아내고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한 지 불과 1년 남짓밖에 지나지 않아 내부 혼란이 있었다. 이런 문제를 파병을 통해 수습하고자 했다.
이밖에도 중국은 지난 세기에 국제 사회로부터 실추된 그들의 명예와 지위 그리고 아시아에서의 맹주 노릇을 회복하겠다는 등 여러 가지 포석이 깔려 있었다.
중국군은 13병단의 4개 군, 포병 3개 사단, 1개 고사포연대, 1개 공병연대 등 총 25만5000명으로 항미원조 지원부대를 편성했다.
미국은 중국의 경고를 외면한 채 계속 북진을 감행했다. 그러자 중국은 자국의 국방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마침내 '중국인민지원군'(아래 중국군)을 한국전에 참전시켰다. 중국이 한국전에 개입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중국의 대 한반도 정책에 있었다. 중국은 예로부터 한반도를 '순치보거'(脣齒輔車)의 관계로 여겼다. 이는 '입술과 이의 관계'와 '수레의 덧방나무와 바퀴의 관계'로, 어느 한쪽이 없어서는 안 될 만큼 중요하다고 인식했다. 곧 중국은 한반도를 그들의 안보 완충지대로 생각한 바, 유엔군이 38선을 돌파하자 곧 자기네 나라의 위기로 여기고 한국전쟁에 개입한 것이다.
두 번째는 국내 정세 때문이다. 중국은 당시 장제스(蔣介石) 국민당 정권을 대만으로 몰아내고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한 지 불과 1년 남짓밖에 지나지 않아 내부 혼란이 있었다. 이런 문제를 파병을 통해 수습하고자 했다.
이밖에도 중국은 지난 세기에 국제 사회로부터 실추된 그들의 명예와 지위 그리고 아시아에서의 맹주 노릇을 회복하겠다는 등 여러 가지 포석이 깔려 있었다.
중국군은 13병단의 4개 군, 포병 3개 사단, 1개 고사포연대, 1개 공병연대 등 총 25만5000명으로 항미원조 지원부대를 편성했다.
맥아더 장군이 신의주 상공 비행기 안에서 파이프를 문 채 지도를 펴 보며 ‘크리스마스 공격작전’ 구상을 하고 있다.ⓒ 맥아더기념관
크리스마스 공격작전
유엔군과 중국군의 첫 교전은 10월 하순에 이뤄졌다. 유엔군은 첫 전투에서 생포한 중국군 포로를 통해 그들의 참전을 확인했다. 하지만 이를 사실로 믿으려 하지 않았다. 미국은 그때까지 중국을 종이호랑이로, 감히 그들이 세계 최강인 자신들에게 대항한다는 건 무모한 도전으로 아주 우습게 여겼다.
맥아더는 중국군을 깔보며, 설사 그들이 참전하더라도 한국전쟁의 양상은 크게 바뀌지 않으리라고 판단했다. 그는 크리스마스 이전에 한국전을 끝내고자 최후의 대공세로 '크리스마스 공격작전'을 준비했다.
맥아더의 '크리스마스 공격작전'은 11월 초 한만 국경지대 폭격으로 시작됐다. 1950년 11월 8일 한만 국경 신의주 일대는 미 B-29 폭격기 79대가 출격해 도시 전체를 완전 잿더미로 만들었다. 미 폭격기와 전투기들은 2주 동안 북한 대부분 중요 지역을 초토화시켰다.
유엔군과 중국군의 첫 교전은 10월 하순에 이뤄졌다. 유엔군은 첫 전투에서 생포한 중국군 포로를 통해 그들의 참전을 확인했다. 하지만 이를 사실로 믿으려 하지 않았다. 미국은 그때까지 중국을 종이호랑이로, 감히 그들이 세계 최강인 자신들에게 대항한다는 건 무모한 도전으로 아주 우습게 여겼다.
맥아더는 중국군을 깔보며, 설사 그들이 참전하더라도 한국전쟁의 양상은 크게 바뀌지 않으리라고 판단했다. 그는 크리스마스 이전에 한국전을 끝내고자 최후의 대공세로 '크리스마스 공격작전'을 준비했다.
맥아더의 '크리스마스 공격작전'은 11월 초 한만 국경지대 폭격으로 시작됐다. 1950년 11월 8일 한만 국경 신의주 일대는 미 B-29 폭격기 79대가 출격해 도시 전체를 완전 잿더미로 만들었다. 미 폭격기와 전투기들은 2주 동안 북한 대부분 중요 지역을 초토화시켰다.
1950. 11. 21. 미 7사단 장병들이 국경지대인 압록강까지 진격하고 있다.ⓒ NARA
후일 한국전 당시 미 극동군 공군사령관을 지낸 에밋 오도넷은 미 상원 청문회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한국에는 더 이상 공격 목표가 없었다. 모든 것이 파괴됐다. 전 한반도는 단지 끔찍한 잿더미일 뿐이다." - 강준만 <한국현대사 산책 1950년대 1> 154쪽
미 폭격기의 대공습이 끝나자 맥아더는 사전 정지작업이 완료된 것으로 판단했다. 1950년 11월 24일, 맥아더는 유엔군 총병력 42만 명에게 '크리스마스 공격작전'을 명령했다.
"적은 재기할 능력이 없다. 압록강까지 진격하라! 그대들은 크리스마스에 가족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에는 더 이상 공격 목표가 없었다. 모든 것이 파괴됐다. 전 한반도는 단지 끔찍한 잿더미일 뿐이다." - 강준만 <한국현대사 산책 1950년대 1> 154쪽
미 폭격기의 대공습이 끝나자 맥아더는 사전 정지작업이 완료된 것으로 판단했다. 1950년 11월 24일, 맥아더는 유엔군 총병력 42만 명에게 '크리스마스 공격작전'을 명령했다.
"적은 재기할 능력이 없다. 압록강까지 진격하라! 그대들은 크리스마스에 가족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중국군이 나팔을 불며 유엔군 진지를 공격하고 있다.ⓒ 중국해방군화보사 / 눈빛출판사
마오쩌둥의 '16자 전법'
유엔군은 당초 이 작전에 자신만만했으나 복병 중국군의 고전적인 공세와 벼랑 끝 전술로 인한 반격에 몹시 당황했다. 국공내전으로 산전수전을 겪은 펑더화이(彭德懷)가 사령관인 중국군은 뜻밖의 장소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북과 꽹과리를 치거나 나팔을 불며 불쑥불쑥 전장에 나타나는, 지극히 고전적인 전법으로 유엔군을 공격했다.
중국군은 적은 병력으로 북, 꽹과리, 나팔 등 갖가지 악기로 음향효과를 내면서 상대에게는 대부대가 공격하는 것처럼 꾸몄다. 그들은 미 전투기의 공습을 피하고자 주간에는 산악 밀림이나 골짜기 동굴 등에 숨어서 지내다가 야간에는 갖가지 악기로 우레와 같은 소리를 내면서 무리를 지어 들짐승처럼 유엔군을 공격했다.
유엔군 측에서는 이를 '인해전술'(人海戰術)로 폄하했지만 중국군은 수천 년 전부터 써왔던 고도의 심리전에다가 항일전과 국공내전으로 익힌 유격전술로 유엔군을 혼란에 빠트렸다. 유엔군은 이런 중국군의 고전적인 전술에 지레 겁을 먹고 나팔소리만 울리면 공포감으로 허둥지둥 갈피를 잡지 못했다.
중국군의 이런 전술은 마오쩌둥(毛澤東)의 16자 전법을 교범으로 한 바 전문은 다음과 같다.
"적군이 진격하면 아군은 후퇴하고(敵進我退), 적군이 근거지를 마련하면 아군은 어수선하게 하며(敵據我擾), 적군이 피로하면 아군은 공격하고(敵疲我攻), 적군이 달아나면 아군은 추적한다(敵退我追)."
유엔군의 최신 무기도 중국군의 고전 전술에 별반 소용이 없었고, 그저 정신을 잃은 채 우왕좌왕 속수무책이었다. 게다가 대규모 중국군의 끊임없는 파상공세에 유엔군 측은 그만 기가 질려버렸다.
유엔군은 당초 이 작전에 자신만만했으나 복병 중국군의 고전적인 공세와 벼랑 끝 전술로 인한 반격에 몹시 당황했다. 국공내전으로 산전수전을 겪은 펑더화이(彭德懷)가 사령관인 중국군은 뜻밖의 장소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북과 꽹과리를 치거나 나팔을 불며 불쑥불쑥 전장에 나타나는, 지극히 고전적인 전법으로 유엔군을 공격했다.
중국군은 적은 병력으로 북, 꽹과리, 나팔 등 갖가지 악기로 음향효과를 내면서 상대에게는 대부대가 공격하는 것처럼 꾸몄다. 그들은 미 전투기의 공습을 피하고자 주간에는 산악 밀림이나 골짜기 동굴 등에 숨어서 지내다가 야간에는 갖가지 악기로 우레와 같은 소리를 내면서 무리를 지어 들짐승처럼 유엔군을 공격했다.
유엔군 측에서는 이를 '인해전술'(人海戰術)로 폄하했지만 중국군은 수천 년 전부터 써왔던 고도의 심리전에다가 항일전과 국공내전으로 익힌 유격전술로 유엔군을 혼란에 빠트렸다. 유엔군은 이런 중국군의 고전적인 전술에 지레 겁을 먹고 나팔소리만 울리면 공포감으로 허둥지둥 갈피를 잡지 못했다.
중국군의 이런 전술은 마오쩌둥(毛澤東)의 16자 전법을 교범으로 한 바 전문은 다음과 같다.
"적군이 진격하면 아군은 후퇴하고(敵進我退), 적군이 근거지를 마련하면 아군은 어수선하게 하며(敵據我擾), 적군이 피로하면 아군은 공격하고(敵疲我攻), 적군이 달아나면 아군은 추적한다(敵退我追)."
유엔군의 최신 무기도 중국군의 고전 전술에 별반 소용이 없었고, 그저 정신을 잃은 채 우왕좌왕 속수무책이었다. 게다가 대규모 중국군의 끊임없는 파상공세에 유엔군 측은 그만 기가 질려버렸다.
1950. 11. 29. 중국군 참전으로 후퇴하던 유엔군들이 추위와 졸음에 지쳐 길가에서 잠시 쉬고 있다. ⓒ NARA
장진호전투
맥아더는 낭림산맥을 기준으로 서부전선은 미 제8군과 국군 제2군단(예하 6, 7, 8사단), 동부전선은 미 제10군단(예하, 제1해병사단, 제3, 7사단)과 국군 제1군단(예하 수도사단, 3사단)을 주공부대로 삼았다. 이 부대로 압록강·두만강까지 밀고 올라가 전쟁을 조기에 끝내는 게 '크리스마스 작전'이었다.
하지만 낭림산맥을 주로 야간 이동으로 몰래 내려온 중국군은 장진호 일대에서 고지를 점령한 채 유엔군이 공격해 오기를 기다렸다. 세계 최강을 자부하던 미 제1해병사단 1만3500명은 중국군이 쳐놓은 덫에 걸려들었다. 게다가 퇴로마저 차단되면서 괴멸될 위기에 놓였다. 중국군이 7만 명이 이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11월 초에 첫눈이 내린 뒤 얼마 되지 않아 기온은 급강하했다. 장진호 언저리는 해발 1000m가 넘는 한국에서 가장 추운 개마고원 고지대로, 겨울철 평균 기온은 영하 30℃이며, 최하 영하 45℃까지도 내려가는 극한지대였다.
맥아더는 낭림산맥을 기준으로 서부전선은 미 제8군과 국군 제2군단(예하 6, 7, 8사단), 동부전선은 미 제10군단(예하, 제1해병사단, 제3, 7사단)과 국군 제1군단(예하 수도사단, 3사단)을 주공부대로 삼았다. 이 부대로 압록강·두만강까지 밀고 올라가 전쟁을 조기에 끝내는 게 '크리스마스 작전'이었다.
하지만 낭림산맥을 주로 야간 이동으로 몰래 내려온 중국군은 장진호 일대에서 고지를 점령한 채 유엔군이 공격해 오기를 기다렸다. 세계 최강을 자부하던 미 제1해병사단 1만3500명은 중국군이 쳐놓은 덫에 걸려들었다. 게다가 퇴로마저 차단되면서 괴멸될 위기에 놓였다. 중국군이 7만 명이 이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11월 초에 첫눈이 내린 뒤 얼마 되지 않아 기온은 급강하했다. 장진호 언저리는 해발 1000m가 넘는 한국에서 가장 추운 개마고원 고지대로, 겨울철 평균 기온은 영하 30℃이며, 최하 영하 45℃까지도 내려가는 극한지대였다.
1950. 12. 10. 강추위 속에 유엔군들이 후퇴 행렬로 동장군은 적보다 더 무서웠다고 말하고 있다.ⓒ NARA
기온이 급강하하자 유엔군은 적군보다 더 무서운 적인 동장군을 만났다. 이 동장군은 유엔군 병사들에게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유엔군 참전 용사 가운데는 따뜻한 지역 출신이 많았다. 이들에게 영하 30℃가 넘는 강추위는 온몸을 얼게 할 뿐 아니라 정신마저 혼몽케 했다. 게다가 혹한의 날씨는 식수와 음식조차 모두 얼게 했고, 모든 장비의 성능을 크게 떨어트렸다.
강추위는 소총의 발사도, 야포의 발사도 저하시켰고, 환자용 혈액과 모르핀도 꽁꽁 얼게 했다. 부상자는 잠시만 눈 위에 눕혀둬도 동사했고, 대부분 병사들의 발은 동상으로 시커멓게 변해갔다. 개마고원 일대의 강추위는 유엔군 병사들을 무기력증에 빠지게 했다.
강추위는 소총의 발사도, 야포의 발사도 저하시켰고, 환자용 혈액과 모르핀도 꽁꽁 얼게 했다. 부상자는 잠시만 눈 위에 눕혀둬도 동사했고, 대부분 병사들의 발은 동상으로 시커멓게 변해갔다. 개마고원 일대의 강추위는 유엔군 병사들을 무기력증에 빠지게 했다.
1950. 12. 8. 장진호 밑 고토리마을로 강추위에는 전차도 별반 소용이 없다.ⓒ NARA
맥아더, '하늘의 때'를 읽지 못하다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맥아더는 콧대만 잔뜩 높았고 의욕만 앞섰지, 전략의 가장 기본인 천시(天時)를 전혀 읽지 못했다. 이는 지난날 나폴레옹군이나 독일군의 러시아 원정과 같은 일대 패착이었다.
모택동의 중국군은 지난날 장제스의 국부군이 아니었다. 그들은 소수의 병력으로 국부군을 물리친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그들은 눈 위에서도 노숙할 정도로 추위에는 내성이 강했다.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맥아더는 콧대만 잔뜩 높았고 의욕만 앞섰지, 전략의 가장 기본인 천시(天時)를 전혀 읽지 못했다. 이는 지난날 나폴레옹군이나 독일군의 러시아 원정과 같은 일대 패착이었다.
모택동의 중국군은 지난날 장제스의 국부군이 아니었다. 그들은 소수의 병력으로 국부군을 물리친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그들은 눈 위에서도 노숙할 정도로 추위에는 내성이 강했다.
중국군이 눈 쌓인 산에서 노숙하고 있다. ⓒ 중국해방군화보사 / 눈빛출판사
그동안 지상의 모든 것을 장악하던 미 전투기도 개마고원의 산악지대에서는 별반 힘을 쓰지 못했다. 유엔군은 총 한 발 제대로 쏴보지도 못한 채 동사자가 속출했다.
맥아더는 중국군의 맹공과 강추위로 흥남 철수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로서는 받아들이기 무척 힘든 치욕적인 후퇴요, 패착이었다.
하늘(날씨)은 맥아더를 도와주지 않았다.
(* 이 기사에 실린 사진들은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및 맥아더기념관에서 직접 검색하여 수집한 것으로 스캔한 원본대로 게재합니다. 사진 이미지가 다소 삐뚤어진 것은 원본 사진이 최소한 50년 전에 현상되었으므로 그 가운데 일부는 몹시 동그랗게 말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짧은 시간에 이를 바로 펴 스캔하기가 매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맥아더는 중국군의 맹공과 강추위로 흥남 철수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로서는 받아들이기 무척 힘든 치욕적인 후퇴요, 패착이었다.
하늘(날씨)은 맥아더를 도와주지 않았다.
(* 이 기사에 실린 사진들은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및 맥아더기념관에서 직접 검색하여 수집한 것으로 스캔한 원본대로 게재합니다. 사진 이미지가 다소 삐뚤어진 것은 원본 사진이 최소한 50년 전에 현상되었으므로 그 가운데 일부는 몹시 동그랗게 말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짧은 시간에 이를 바로 펴 스캔하기가 매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1950. 12. 8. 유엔군들이 장진호전투에서 후퇴 중 동사하여 고토리 길섶에 뉘어져 있다.ⓒ NARA
1950. 12. 10. 중국군 참전으로 강추위 속에 후퇴하는 유엔군 차량 대열.ⓒ NARA
1950. 12. 8. 장진호 밑 고토리에 쌓인 유엔군 시신들.ⓒ NARA
1950. 12. 8. 유엔군들이 장진호작전에서 참패한 뒤 고토리로 마을길을 따라 후퇴하고 있다. ⓒ NARA
.
'그룹명 > 6·25 자료들(1950·06·25)'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울 수 없는 그때 그시절 (0) | 2017.11.18 |
---|---|
1950년도 사진자료 모음 (0) | 2017.11.18 |
천하의 맥아더가 크게 한 방 먹은 사연 (0) | 2017.09.16 |
6.25 전쟁 당시 미군의 C 레이션 / http://cafe.daum.net/hknetizenbonboo/Grm0/3296 (0) | 2017.07.14 |
6.25 전쟁 당시 논산 제 2 훈련소 (0) | 2017.07.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