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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본토 항공전(The Battle of Britain) [3] 하늘에서의 전쟁

바래미나 2017. 3. 20. 10:58

영국 본토 항공전(The Battle of Britain) [3] 하늘에서의 전쟁

독일 공군의 전력


1940년 7월로 예정된 바다사자 작전 개시일에 발맞추어 독일 공군은 주인공이 되고 싶어 안달 난 괴링의 관심 속에 즉각 준비에 들어갔다. 프랑스 침공전에서 대단한 전과를 올린 공군의 제 부대들이 재편에 착수함과 동시에 영국을 타격할 수 있는 북부 프랑스 일대의 요충지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당시 독일 공군은 5개 항공군(Luftflotte)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 중 3개 부대가 영국 침공전에 할당되었다.

1937년 퍼레이드에서 공중 분열 행사를 펼치는 독일 공군. 영국 침공 당시에 독일은 5개 항공군을 보유했는데 1개 항공군 전력이 어지간한 국가의 공군력을 능가할 만큼 강력했다. <출처: (cc)Bundesarchiv at Wikimedia.org>

브르타뉴(Bretagne) 일대에 전진 배치된 제3항공군은 잉글랜드 남서부와 웨일즈를 담당할 예정이었고 노르웨이에 배치된 제5항공군은 필요할 경우 영국 동부와 스코틀랜드에 협공을 가할 수 있도록 준비되었다. 하지만 중핵은 칼레 인근에 배치되어 영불 해협과 런던을 중심으로 하는 잉글랜드 남동부를 담당한 제2항공군으로, 프랑스 침공전 승리 후 원수로 승진한 케셀링(Albert Kesselring)이 지휘했다.

독일 본토 방어를 위해 2개 항공군이 후방에 남아 있었지만 소속 폭격기의 상당수는 제2항공군으로 이동 전개했다. 당시 공군이 보유한 2,600여 기의 작전기 중에서 2,200여 기가 참여했으니 독일 공군 대부분이 바다사자 작전에 동원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독일 공군이 보유한 전투기와 폭격기의 성능은 당대 최고를 자부할 만큼 성능이 좋았고 수차례의 전쟁으로 조종사들의 경험도 풍부했다.

독일의 주력 폭격기 중 하나인 Do 17. 당시 독일 공군은 육군 지원에 최적화되어 단독으로 장거리 작전을 펼치기에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하지만 영국 본토 항공전 이전까지는 이런 약점을 깨닫지 못했다. <출처: (cc)Bundesarchiv at Wikimedia.org>

하지만 약점도 있었다. 독일 공군 자체가 육군을 가까이서 지원하는 공중 포대의 개념으로 육성되다 보니 장거리를 비행하며 단독으로 작전을 펼칠 능력이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특히 폭격기를 호위할 Bf 109는 항속거리가 짧아 영국 본토 상공 위에 잠시만 체류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는 육군의 전진 속도에 맞추어 기지를 옮겨가며 작전을 펼쳤기에 별다른 문제를 느끼지 못했지만 영국 침공전은 상황이 전혀 달랐다.

괴링의 계획


독일 지상군이 바다를 건너려면 당연히 영국 해군을 제압해야 했다. 하지만 독일 공군이 그보다 먼저 목표로 삼아야 할 대상이 따로 있었으니 바로 영국 공군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폭격기들이 목표물을 마음 놓고 공격하려면 방해에 나설 영국 공군을 무력화시켜야 했다. 그중에서도 핵심은 독일 폭격기를 요격하려고 달려들 전투기 전력이었다. 독일은 본격적인 영국 본토 공격 이전에 영국 전투기를 최대한 끌어내 소모시키고자 했다.

프랑스 침공전 당시부터 독일과 영국 공군의 소소한 공중전이 계속 진행 중이던 영불 해협 일대는 그런 사전 정지작업을 펼치기 좋은 위치였다. 독일은 이곳으로 출격 횟수와 양을 늘려 영국 전투기들의 적극적인 대응을 이끌어내고자 했다. 당시까지 파악한 정보로는 독일 공군의 전력이 압도적으로 우세하므로 비슷한 수준으로 영국 공군을 소모시키기만 해도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전쟁 초기 독일의 전성기를 이끈 Bf 109E. 독일은 그동안의 승리를 통해 얻은 자신감을 발판으로 영국 공군을 전멸시키고자 했다.  

    
 

영국 본토 항공전 당시에 주력 부대를 지휘한 제2항공군 사령관 케셀링(좌)과 공군 총사령관 괴링.
<출처: (cc)Bundesarchiv at Wikimedia.org>

독일은 영불 해협 하늘을 완전히 장악함과 동시에 영국 본토에 위치한 공군 기지, 방공 감시 시설, 군수품 제작 시설을 대대적으로 공격할 예정이었다. 그렇게 해서 영국이 공군의 소모를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면 전쟁의 승패는 자연스럽게 결정이 난다고 보았다. 이러한 작전의 세부 내용은 예쇼네크(Hans Jeschonnek) 공군 참모총장의 주도하에 작성되었으나 공군 총사령관 괴링의 입김도 많이 작용했다.

괴링은 비록 무능, 아부 등의 부정적인 평가가 주를 이루는 인물이지만 적어도 이때까지는 상당히 이성적인 면모를 보였었다. 선봉에 설 케셀링이 심리적인 측면을 노려 제일 먼저 런던을 대대적으로 폭격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괴링은 이를 일축하고 오로지 군사적인 목표물만을 우선 공격 대상으로 못 박았다. 영국 공군, 특히 전투기 전력의 제거에 영국 침공전의 성패가 달려있음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국 공군의 전력


영국도 독일의 침공이 하늘을 통해 시작되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들을 최일선에서 막아내야 할 중차대한 임무는 당연히 공군의 몫이었으나 프랑스가 무너져 가던 6월 초의 상황만 놓고 본다면 절망적이었다. 당장 독일 공군을 막을 수 있는 전투기가 500여 기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대공황의 여파도 있었지만 독일의 재무장을 보면서도 군비 확충을 게을리한 결과였다. 부랴부랴 생산량을 늘리고는 있었으나 시간이 부족했다.

그런데 프랑스 항복 후 곧바로 공격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히틀러가 공세를 유보하면서 흘러간 약 한 달간의 시간은 그야말로 예상치 못한 행운이었다. 영국은 모든 국력을 전투기 생산에 올인해 그동안 소모된 분량 외에도 약 140여 기의 전투기를 추가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영국 본토 항공전 개시 직전에 전투기 전력비가 1대 3까지 줄어들었다. 여전히 격차가 컸지만 지금의 생산량을 유지한다면 점차 차이를 좁힐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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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철한 판단으로 영국 본토 항공전을 이끈 영국 공군 전투기 사령부 총사령관 휴 다우딩.

개전 직전 영국 공군 전투비행단의 관할 구역도. 곧바로 2개의 전투비행단이 추가 창설되어 후방에 배치되면서 전방의 전투비행단이 방어에 전념할 수 있었다.

게다가 영국은 유아독존처럼 활보하는 독일의 Bf 109에 능히 맞설 수 있는 스피트파이어(Spitfire)를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생산량을 늘리고 있었음에도 아직은 보유량이 절대 부족한 상황이어서 영국 공군 전투기 사령부의 총사령관 다우딩(Hugh Dowding)이 본토 방어를 위해 프랑스 파견을 금했을 정도로 귀중하게 취급했다. 따라서 비슷한 시기에 데뷔한 허리케인(Hurricane)이 많은 역할을 담당해야 했다.

다우딩은 기존의 4개 전투비행단(Group)만으로는 효율적인 작전을 펼치기 어렵다고 판단해 대륙원정군에 속해 있다가 철군 직후 해체된 제14전투비행단을 즉시 재건했고, 전투기의 생산량이 늘어나면 제9전투비행단을 추가로 창설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새로운 2개 전투비행단으로 스코틀랜드 북부와 북아일랜드 방어를 전담시켜 독일의 침공로 초입에 위치한 제11전투비행단과 이를 바로 뒤에서 백업할 제12전투비행단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다우딩의 계획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다우딩은 본토 방어를 위해 스피트파이어 부대의 프랑스 이동을 금지했을 만큼 냉철한 인물이었다. 이후 처칠이 항전 의지를 고취시키기 위해 일부러 위험한 영불 해협을 통해 상선을 운행시키며 전투기로 보호할 것을 명하자, 굳이 하지 않아도 될 행위에 귀중한 전력을 낭비할 수는 없다며 거부했을 정도다. 전투기 부대 외에는 당장 독일의 침략을 막아낼 이들이 없다는 사실을 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영국 본토 항공전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스피트파이어. 물량이 부족했기에 다우딩은 귀중하게 취급했다.

아무리 독일 공군이 강하더라도 모든 전력을 한 번에 투입해 영국을 공격할 수는 없다. 그래서 다우딩은 곧바로 착륙해 보급을 받고 즉시 재출격할 수 있는 홈코트의 이점을 최대한 살려 전투기의 가동률을 높이면 수적 열세를 충분히 만회할 수 있다고 보았다. 즉 단순하게 봤을 때 독일의 세 배 정도로 출격을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조종사를 비롯한 많은 이들의 노고가 필요했다.

독일 공군의 침입을 사전에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던 영국의 레이더 방공망. 체인 홈(Chain Home)이라 불린 이 조기 경보 체계는 영국의 승리를 이끈 원동력이었다.
<출처: (cc)Nasiruddin at Wikimedia.org>

때문에 언제 올지도 모를 적을 막기 위해 미리 전투기를 상공에 대기시켜 조종사들의 피로도를 증가시키는 행위는 최소한으로 축소했다. 다행히도 영국은 이러한 방어전을 펼칠 수 있는 엄청난 방패를 보유하고 있었다. 바로 레이더(Radar)였다. 독일도 프레야(Freya)라는 비슷한 조기 경보 장비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영국이 보유한 방공 레이더는 당시 최고의 성능을 자랑하는 비밀 병기였다.

공교롭게도 영국의 방공 레이더는 제1차 대전 당시 독일 비행선의 공습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경험의 산물이었다. 덕분에 영국 공군은 독일 공군의 움직임을 레이더로 충분히 파악한 후 전투기를 출격시킬 수 있었다.

또한 상대 전력이 일거에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클 경우 우선순위를 정해 요격 작전을 나누어 펼칠 수 있도록 하는 관제도 가능했다. 독일은 몰랐지만 이처럼 영국은 나름대로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해놓고 있었다.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