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진호 혈전장의 한국 전투 경찰대
-제1편-
이번 글은 조금 길다. 전투 경찰의 한 숨은 비사를 소개하면서 우리 전사에서 너무 가볍게 다루어지고있는 전투 경찰의 활약을 소개할 기회를 같이 마련했기 때문이다.
6.25 전사를 찾아보면 유감스럽게도 크게 저평가 받고 있는 두 참전 부대가 있다.
우리 전사에서 망각 되다시피 저 평가를 받는 부대는 UN 참전 군 중 육해공군과 해병대까지 파견하고 미군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전사자를 낸 영연방 군이고 국내의 전투 부대로는 한국 전투 경찰이다.
한국 전투 경찰은 해방 후부터 한국 전쟁이 끝날 때까지 8년 간의 대공 전투에서 무려 1만 명의 전사자를 냈다.
이 숫자에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이 있었다. 절대 과장 된 숫자가 아니다. 여기 아래 전북 남원 광한루에 있는 전투 경찰 충혼비가 이를 증명해준다.
1955년에 광한루에 건립 된 전투 경찰 충혼 불멸비.
충혼비는 지전사[智戰司-지리산 지구 전투 경찰 사령부,1950년 12월에 창설]와 1955년 7월에 해체한 서전사[西戰司-서남 지구 전투 경찰 사령부,1953년 5월 창설, 지전사의 승계 조직임] 소속 6,333명의 희생 경찰들을 추모하는 기념물이다.
이 숫자는 오직 지전사 서전사 소속 전남북 경찰들의 전사자들만 말하니 위의 1 만 명이라는 숫자가 이해가 가리라 믿는다. 공비들의 활동이 왕성했었던 전남 도경 소속 전사자가 전국 경찰 중에 제일 많았었고 다음으로 많은 것이 전북 도경 소속 전사자들이다.
치열한 전투를 거듭했던 8년간 월남전에서 발생했던 국군 전사자가 5,000명 수준이니 경찰이 6,25 전쟁 중에 어느 정도로 치열한 전투를 겪었는지 짐작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즘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유해 발굴 작업 중에 지리산 지역에서 발굴된 다수의 유해가 국군이 아니라 전투 경찰의 것인 점이 위의 희생을 말없이 증명 해준다고 할 수 있다.
그 당시는 지금과 같은 전투 경찰 체제가 따로 없었다. 지금 전투경찰들이 직원으로 부르는 순경이상 경찰들이 치안 행정도 보고 불시에는 모두 보병 부대로 편제되어 총을 들고 나가 전투도 했었다.
이 태 선생의 저서 ‘남부군’에 보면 지리산 주변 공비들이 무장과 훈련이 잘 된 육군은 두려워했지만 장비나 훈련에서 훨씬 뒤쳐지는 전투경찰들은 우습게 보았다는 사실을 비치는 구절이 군데군데 보인다.
전투 경찰은 지리산 주변 공비들을 토벌한 부대로만 알려져있지만 사실 6.25 전사의 첫 페이지인 북한 침략 첫 날부터 한반도를 가로 지르는 전선 여기 저기서 북 침략 도배(徒輩; 함께 어울려 나쁜 짓을 하는 무리)와의 전투에 휘말려 얼굴을 내밀고 있다.
말이 전투 경찰이지 치안 업무를 보던 경찰들이 총을 들고 전투를 하러 나선 것이다.
전투 개시 당일 서울 시경은 전투 경찰 대대를 조직해서 포천 전선으로 급파했다. 각 개인 경찰들에게 지급된 실탄은 단 10발뿐이었다.누구나 목숨은 중요한 것이다. 이 상태로 각종 북한군 중화기의 화력 앞으로 나가라고 했으니 경찰들이 총 몇 발 쏴 보고 도망친 것이 인간의 본성상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6.25 당시 위기의 포천 전선으로 출동하는 경찰들. 대부분 전투 훈련을 받지 못했다.
철모에, 전투모에, 정모에 가지각색의 차림새가 이 때 경찰의 전투 준비 상태를 말해 준다. 이들 중 상당수가 다시 돌아 오지 못했다.
앞서 말한대로 한국 경찰들은 북한군 침공 개시 순간부터 전투에 휘말렸다.
전쟁 개시 당일인 25일 새벽, 막강한 북한군 중부 방면 침공군의 정면에 위치해 있던 춘천시[현] 북산면 내평리 지서에서 지서장 노 종해 경위 이하 12 명이 결사 저항하다가 9명과 북산면 청년단장 김 봉림이 전사하고 3명만이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일이 있었다. 문자 그대로 옥쇄했던 것이다.
무너지는 서울 방어선 최후의 방벽이었던 미아리 전선에서 육박해오는 북한 최강 4사단 18연대의 공격 전면에 투입되었다가 섬멸 당했었고, 동대문 경찰서를 지키다가 압도적인 전력의 북한군들과 전투를 하고 전사한 피해를 본 것도 전투 경찰대였었다.
전투 경찰들은 6.25동안 자신들만 피해를 당한 것이 아니었다. 적치하가 된 후 가족을 남겨놓고 부산으로 피신했던 경찰의 가족들은 빨갱이들에게 잔혹한 학살을 당하는 가족 소멸의 비극을 당하기도 하였다.
지방 빨갱이라고 불리던 토박이 부역자들이 경찰관 가족을 학살하는 사건이 다수 발생했었고 북한군 진주와 함께 산에서 내려온 공비들이 특히 경찰 가족을 찾아 죽이는 잔인한 짓을 많이 했었다.
한국 정부가 낙동강 지역으로 몰렸을 때 전투 경찰들도 최후의 보루였던 낙동강 전선의 전투에 투입되었었는데 무기가 빈약했었던 관계로 전투 경찰들의 피해가 컸었다.
이렇게 무장도 훈련도 군기도 시원치 않았던 전투 경찰대가 난데없이 저 북쪽, 지금은 전설의 전장이 되어 버린 함경남도 장진호 전투 전사에서 그 얼굴을 내밀었다.
장진호 전역도
맨 위에 유담리와 공격해온 중공군 3 개사단의 공격 방향을 보여 주고 있다.
그것도 미 해병 1사단이 최 북방으로 전진해 한국 전쟁 중 최대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유담리에서였다.
당시 해병 5연대는 유담리 최 전방에서 진격하던 중 그 간 불길한 징후를 보이던 중공군들이 전진을 차단하자 즉각 유담리 일대 고지에 방어 진지를 파고 적의 공격에 대비했었다.
유담리의 미 해병들을 공격하는 중공군 79사단 병사들.
유담리 북쪽의 정면으로 공격해온 사단으로서 5연대와 격돌한 사단이다.
인천 상륙작전에서 최초로 월미도에 상륙작전을 했던 5연대 3대대는 2대대 진지와 유담리 마을 사이에 예비대로 대기하고 있었다.
3 대대장 태프릿 중령은 자신 측면 고지에 배치되었을 이웃 리첸버그 대령의 7연대 E중대가 아무래도 그 곳에 배치되지 않았다는 의심이 들었다.
태프렛 중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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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부터 참전했었고 인천 상륙작전과 서울 탈환작전에서 큰 공훈을 세운
태프릿 중령은 전장의 냄새를 맡을 줄 알았다.
7연대 해병들이 배치되었다는 그 곳에 아무런 인기척이 없는 것이었다. 고지를 향해 큰 소리로 불러 봐도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연대 본부 참모와 5연대장 머래이 중령에게 거듭 확인해 보았으나 그들은 측면인 그 고지에는 7연대의 E중대가 있다고 안심시켰다.
그러나 태프릿 중령은 그 측면에 아무 부대도 없다고 판단하고 서둘러 부대를 배치했다.이 대목에서 느닷없이 한국의 전투 경찰이 출현한다. 장진호 전투 기록의 결정판이라는 “브레이크 아웃”의 작가 러스 마틴[임 승균 번역]은 이렇게 썼다.
풍부한 전투 경험과 자기 확신이 있는 보병 장교인 태플릿은 육감에 따라 산비탈 중턱에 전초(前哨; 군대가 주둔할 때 적을 경계하기 위하여 가장 앞쪽에 배치한 초소나 초병)를 설치하기로 하였다. 그 전초에는 미 해병에 의해 훈련되어 군기가 있고 상당한 전투력을 가진 한국 전투 경찰 부대가 운용하는 기관총 진지가 함께 배치되었다.
태프릿의 3대대 진지를 내려다보는 그 고지에는 그가 믿던 대로 아무도 없었다.
그 때 태프릿의 고지에 배치되어야 할 7연대 E중대는 동쪽으로 800m 떨어진 1,282 고지를 점령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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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1월 유담리 도로를 방어하고 있는 미 해병들
마틴 러스의 책에는 '곧 지옥과 같은 열전(熱戰)의 용광로가 되어 버릴 장소에 능력있는 한국 전투 경찰 기관총 반이 있었다'는 글 한 줄 만 남아있고 이후 전투 경찰에 관한 글은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진지 구축 후 촬영한 호남 지역 전투 경찰들
나는 그렇지 않아도 전투 경찰에 대한 전투 기록 부족을 한탄하여 자료를 모아 오던 참이라 마틴 러스의 책에서 발견한 정보의 단편을 붙들고 장진호의 가장 처참한 전장에서 싸웠던 한국 전투 경찰의 자세한 내력을 찾아보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했었다.
나의 능력이 부족했던가, 아니면 정말 국내에 관련 기록이 전혀 없던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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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담리에 나타난 전투 경찰의 전투가 우리 전사에서 꼭 밝혀져야할 이유에 대해서 서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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