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대전 당시의 복엽기 같은 초창기의 전투기는 일정 수준의 속도와 기동력만 갖추면 그럭저럭 일선에서 사용할 수 있었기에 어지간한
기술력을 보유한 국가나 업체면 충분히 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비행 및 전투 관련 장비에 각종 첨단기술이 접목되고 더불어 개발비용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어느덧 고성능 전투기는 아무나 만들 수 없는 무기가 되었다.
미국의 록히드 마틴(Lockheed Martin)이 주도하고 있지만, 최초 구상 단계부터 신규 전투기 소요 제기가 예정된 여러 국가들의
참여와 투자로 개발이 진행 중인 F-35의 경우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이처럼 전투기의 자력 개발은 예전에 비해 훨씬 힘들고 어렵다.
그래서 기술력이 부족한 국가는 독자적인 전투기 개발에 나서기 전에 먼저 라이선스 생산 등을 통해 경험과 기술을 축적하곤
한다.
이와 비슷하지만 카피캣(Copycat), 즉 무단복제를 하는 방식도 있다. 소련이 B-29를 그대로 베껴서 만든 Tu-4가 대표적인데,
도의상으로 보면 옳지 않지만 전시나 적대국 관계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레이더, 반도체, 소프트웨어, 스텔스처럼 쉽게 따라 할 수
없는 기술이 속속 등장하면서 첨단 무기일수록 흉내 내기도 어렵게 되었다.
게다가 이제는 무기를 무단복제하는 행위가 국가 간의 외교적 마찰까지 불러올 정도로 국제 정세가 바뀌었다. 만일 외국의 최신 전투기를 그대로
생산해 냈는데, 공식 면허 생산한 것이 아니라면 당연히 무단복제이고 분쟁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정작 원개발국은 형식적인 유감만
표명하고 오히려 복제한 나라가 자국산 전투기라고 자랑하며 외국에 수출까지 한다. 이처럼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이상한 사례의 주인공이 바로
이스라엘의 크피르(Kfir) 전투기다.
- ▲ 이륙 중인 에콰도르 공군 소속 크피르 CE. 현재 8기를 운용 중이다.
이스라엘이 전투기 자력 개발에 나서다
프랑스의 다쏘(Dassault)를 세계적인 군용기 제작업체로 이끈 일등 공신은 미라주(Mirage) III 전투기다. 그런데 미라주
III가 명성을 얻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1967년 6월에 벌어진 6일 전쟁이었다. 이때 이스라엘 공군은 놀라운 전과를 거뒀다. 지금은 미국이
후견인 노릇을 하지만 당시만 해도 이스라엘에 최신식 전투기를 공급한 유일한 나라가 프랑스였다. 덕분에 이스라엘이 전과를 올릴수록 프랑스제
전투기의 명성은 높아져 갔다.
이스라엘은 사막 기후에서 미라주 III의 레이더와 일부 항전장비의 안정성이 나쁘게 나오자 이를 제거하는 대신 차라리 항속거리와 무장
탑재능력을 늘린 공격형 미라주 III의 제작을 다쏘에 의뢰했다. 그렇게 최고 우량 고객이자 광고판인 이스라엘의 요청에 따라 개발된 또 하나의
걸작이 바로 미라주 5다. 이스라엘은 75기를 구매하기로 하고 선금까지 지불한 상태였는데, 초도 물량을 인도하기 직전에 문제가
발생했다.
- ▲ 미라주 5는 이스라엘의 요구로 개발이 시작된 기종이었으나 금수 조치로 인도가 거부되면서 이스라엘이 자국산 전투기 개발에 착수하였다. <출처: Chris Lofting>
1968년 12월 26일, 아테네 공항에 기착해 있던 이스라엘 민항기가 팔레스타인 무장 조직 PFLP의 공격을 받아 기체가 파손되고 승객이
다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이틀 후 이스라엘 특수부대가 레바논 베이루트 공항에 침투하여 12기의 아랍 여객기를 격파했지만 국제
사회로부터 너무 지나친 보복이라는 반발을 샀고 이스라엘에 첨단 무기를 제공한 프랑스에도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다.
이에 프랑스는 인도 직전이던 미라주 5에 대해 수출금지 조치를 내렸고, 이는 노후기를 대체하고 미라주 III의 손실분을 보충하려던
이스라엘의 계획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결국 이스라엘은 전투기 자력 개발로 정책을 선회했다. 비밀리에 전투기의 심장인 SNECMA Atar 09C
엔진의 도면을 확보하는 등의 노력 끝에 개발이 완료되어 1971년 초도 비행에 성공하고 이듬해부터 일사천리로 배치된 신예 전투기가 바로
이스라엘판 미라주 5인 네셔(Nesher)다.
- ▲ 네셔 전투기. 영락없는 미라주 5이지만 이스라엘은 독자 개발을 주장하였고 프랑스는 어정쩡한 태도를 보였다. <출처: (cc) Israel Defense Forces at Wikimedia.org>
자력 개발이 의심스러운 정황들
자국산 항전장비를 장착했기에 이스라엘은 전혀 다른 전투기라고 주장했지만 기체와 엔진은 영락없는 미라주 5였다. 이렇게 탄생한 네셔는
총 61기가 제작되어 1973년 발발한 제4차 중동전쟁, 이른바 욤키푸르 전쟁(Yom Kippur War)에서 15기가 피격되는 동안 102기의
적기를 격추시키는 전공을 세웠다. 이후 이스라엘은 자국군이 사용하던 39기의 네셔를 개수하여 대거(Dagger)라는 이름으로 아르헨티나에
수출했다.
사실 아르헨티나는 미라주 III를 사용 중이던 프랑스의 또 다른 주요 거래처였다. 그런 시장에 미라주 5의 짝퉁으로 의심받는 대거가
수출되었다는 것은 외교적 문제가 될 만한 사건이었지만 정작 프랑스는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 이렇게 아르헨티나로 건너간 대거는 1982년
발발한 포클랜드 전쟁(Falkland War)에서 맹활약했다. 이상은 이스라엘 최초의 전투기인 네셔의 탄생 및 활동과 관련하여 공식적으로 알려진
내용이다.
- ▲ 네셔는 대거라는 이름으로 아르헨티나에 수출되었고 포클랜드 전쟁에도 참전하였다. 성능에 만족한 아르헨티나는 종전 후 이스라엘에 요청하여 잔여 대거의 성능을 업그레이드하였는데 이것을 별도로 핑거(Finger)라고 한다. <출처: (cc) Jorge Alberto Leonardi at Wikimedia.org>
하지만 갑작스런 금수 조치로 어려움에 빠진 이스라엘이 각고의 노력 끝에 자국산 전투기를 만들어 냈다는 앞의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없다. 이스라엘과 프랑스가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을 뿐이지 실제로는 비공식적인 면허 생산이 이루어졌다는 의견이
대부분이다.
아무리 무단으로 복제해도 불과 3년 만에 고성능 전투기를 개발 완료하고 실전 배치하기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한마디로 이스라엘판 미라지
5의 실질적인 제작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루어졌다는 점을 암시한다.
그러나 실상은 오히려 이스라엘의 기체 제작에 다쏘의 개입이 노골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정설이다. 생산에 필요한 주요 설비와 미라지 5
시제기 2기가 금수 조치 전후로 프랑스에서 밀반출되어 이스라엘 국영 항공기 제작사인 IAI로 이전되었는데, 이는 프랑스도 갖춘 지 얼마 되지
않는 최신의 시설들이었다.
- ▲ 미라주 III, 미라주 5, 네셔의 심장이었던 SNECMA Atar 09C 엔진. 모사드가 빼돌린 도면으로 복제한 이스라엘제 엔진이 네셔에 장착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오래전부터 이스라엘의 Bet Shemesh가 부품을 제작하여 SNECMA에 공급하고 있었다. <출처: (cc) Jesimo11 at Wikimedia.org>
미국산 엔진을 장착한 최강의 미라주가 이스라엘에서 탄생하다
이에 대해 프랑스 정부는 국제 사회의 요구에 부응하여 무기 금수 조치를 했을 만큼 책임을 다했지만 민간 기업의 경영 행위까지 막을
수는 없는 일이라고 변명했다. 그런데 바로 그 즈음 미국이 이스라엘에 A-4 공격기와 F-4 전투기를 공급했다. 즉 프랑스의 금수 조치가
있었어도 이스라엘이 서둘러 국산 전투기 개발에 나서야 될 만큼 급박한 상황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변화는 그때까지 이스라엘의 전투기
시장을 석권하고 있던 프랑스에게는 상당한 위기였다.
따라서 프랑스가 겉으로는 금수 조치를 취하는 척하면서 뒤로는 이스라엘이 실리를 챙길 수 있도록 최대한 협조했을 개연성이 충분하다. 어쩌면
네셔의 등장은 미국제 전투기의 획득과 별개로 미라주 시리즈에 대한 이스라엘의 신뢰가 그만큼 컸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어쨌든 공식적으로 최초의
자국산 전투기인 네셔를 개발해 낸 이스라엘은 이후 더욱 성능을 향상시키고자 하였다.
- ▲ 다양한 무장 형태를 알 수 있는 크피르. 수직미익(동체 전방의 보조 수평 날개) 아래의 냉각용 공기흡입구로 네셔와 구분이 된다. <출처: (cc) User:Bukvoed at Wikimedia.org>
이스라엘은 F-4 전투기의 심장인 강력한 J79 엔진을 네셔에 장착하는 실험을 시도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신예기가 바로 크피르였고
1975년부터 배치되었지만 처음부터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기체의 크기는 그대로인데 크고 무거운 J79 엔진으로 인해 무게 중심이 바뀌면서
안전성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 추락 사고가 연이어 발생하자 이스라엘 공군 내에서 벽돌이라는 비난까지 나왔을 정도였다.
이렇게 애물단지가 될 뻔한 크피르는 작은 변화로 극적인 반전을 이루었다. 인테이크 옆에 카나드1)를 붙이면서 비행 성능이 놀라울 정도로 상승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크피르 C2로 1977년부터 일선에 배치되었고 1979년 벌어진 국지전에서 시리아의 MiG-21을 격추시켜 공대공 교전 능력을
입증하였다. 미라주 2000의 등장 이전까지 존재한 미라주 전투기 중에서 최강이 엉뚱하게도 이스라엘에서 탄생한
것이었다.
자주국방의 의지로 짝퉁의 의혹을 불식시키다
하지만 크피르는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났다. 양산 당시에 도입된 최신예 F-15, F-16에 밀려 제공 임무를 내주고 대지 공격에
투입되었다. 전작인 네셔와 달리 대외 판매에도 애를 먹었는데 J79 엔진을 공급한 미국이 반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비슷한 시기에
탄생한 F-16, 미라주 2000, MiG-29와의 경쟁에서 뒤졌다. 원론적으로 크피르는 미라주 III를 기반으로 하다 보니 개량 이상의
획기적인 성능 향상이 어려웠던 것이다.
총 200여 기가 양산되어 수적으로 이스라엘 공군의 중추를 담당하였고 미국의 정책이 바뀌면서 1982년 에콰도르의 12기를 시작으로 대외
판매도 이루어졌다. 한때 대외 판매를 방해한 미국도 1985년 해군의 훈련용 가상 적기로 25기의 크피르를 임대해 사용했다. 이때 흥미롭게도
미군 당국이 외국에서 제작되어 직도입된 소량의 전투기에 이례적으로 F-21이라는 정식 제식 부호를 부여하였다.
- ▲ F-21이라는 별도의 제식 번호가 부여된 미 해군의 어그레서용 크피르 C1.
하지만 크피르는 양산 당시부터 어정쩡한 위치여서 이스라엘에서는 1996년 완전히 퇴역하였고 현재 굳이 최고급 전투기가 필요하지 않은
에콰도르, 콜롬비아, 스리랑카에서 37기가 주력기로 운용 중이다. 지난 2015년 11월, 대거로 재미를 보았던 아르헨티나가 이스라엘이 보관
중인 중고기에 AESA 레이더를 비롯한 최신 항전장비를 장착하여 성능을 개량한 14기의 크피르 블록60을 도입하기로 결정하면서 국제 무기시장에서
다시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
크피르는 혼란한 시대상을 배경으로 개발 과정 중에 의심을 살 만한 정황이 분명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에서 자력으로 개발했다고
주장하는, 한마디로 탄생부터 뒷말이 많은 애매모호한 전투기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자국산 전투기 개발의 강력한 의지가 있었기에 탄생하였다는
점이다. 비록 이스라엘은 이 정책을 현재 더 이상 고수하지 않고 있지만 과거의 그러한 노력은 분명 자주국방력을 향상시키는 데 커다란 의의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 ▲ 미국 민간 항공사인 ATAC에서 민수용으로 운용 중인 크피르의 이륙 모습. 인상적인 카나드로 인해 쉽게 미라주 III, 미라주 5와 구별된다. <출처: 김민기>
▌제원
전장 : 15.65m / 전폭 : 8.22m / 전고 : 4.55m / 최대이륙중량 : 16,200kg / 최고속도 : 시속
2,440km (마하 2) / 전투행동반경 : 768km / 상승한도 : 17,680m / 무장 : 30mm 라파엘 기관포 2문, 사이드와인더
혹은 샤피르 AAM 2발, 5,775kg 폭장
글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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