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욕적으로 북방정책을 추진하던 노태우 정부는 1990년 9월 30일, 마침내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과 수교를 맺기에 이르렀다. 냉전체제가 무너지던 시기였으나 그 이면에는 30억 달러의 차관 제공이라는 미끼가 있었다. 그런데 절반 정도인 14억 7천만 달러가 지급 된 이듬 해, 놀랍게도 소련이 해체되었다. 추가 자금 제공은 중단되었고 기존 채무는 러시아가 승계하기로 했으나 경제 상황이 나빠 약속한 날짜에 상환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에 러시아는 공산품으로 갚겠다는 의사를 표명하였는데, 제시한 품목 중에는 불과 몇 년 전이라면 상상도 못할 무기류도 있었다. 군은 운용상 문제와 러시아(소련)제 무기에 대한 낮은 신뢰도 때문에 반대하였지만, 그래도 상환 불능보다 낫다고 판단한 경제 부처의 설득으로 도입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유명한 ‘불곰사업’이다. 엄밀히 말해 가격의 절반을 차관으로 공제하는 조건이니 50퍼센트 할인가에 도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 훈련을 위해 이동 중인 국군 OO부대 소속의 BMP-3. 불곰사업에 의해 도입된 대표적 장비로 예상과 달리 일선에서 상당한 호평을 받았다. <출처: 필자 제공>
이렇게 해서 1995년부터 다양한 종류의 러시아제 무기가 도입되었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군은 굳이 도입할 필요도 없는 동구권 무기를 울며 겨자 먹기로 떠안게 된 것이라 생각하였기에 단지 적성국 무기 및 전술 연구용으로 사용해보고 적당한 시기에 도태시키기로 예정하였다. 하지만 일부 무기는 예상했던 것보다 성능이 좋았고 종종 경탄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자 최초 도입한 33대 외에 2002년부터 진행 된 제2차 불곰사업에서 37대를 추가 도입하여 정규 제대를 편성한 후, 2004년 동부전선의 핵심 기갑부대의 기본 제식 장비로 정식 배치한 무기까지 등장하였다. 군과 국내 방산 기관은 물론 마니아들에게 T-80U 전차와 더불어 너무나 강렬한 인상을 안겨준 BMP-3 보병전투차(IFV, Infantry Fighting Vehicle)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 ▲ BMP-3의 베이스가 된 BMP-1. 무기 역사에 보병전투차 분야를 본격적으로 개척한 선구자다. <출처 (cc) Vitaly V. Kuzmin>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다
BMP-3은 이전 모델인 BMP-1, BMP-2를 이은 소련(러시아) 육군의 주력 보병전투차다. 1960년 중반에 등장한 BMP-1과 최근에 제작된 최신형 BMP-3은 단지 모양만 비슷할 뿐 전혀 다른 장갑차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성능 차이가 크지만 기본적인 구조나 운용 목적은 같다고 할 수 있다. 이전 모델을 운용하면서 드러난 단점을 개량하는 방식으로 후속 모델이 탄생하였기 때문이다.
BMP(Boevaya Mashina Pehoty)가 러시아어로 보병전투차의 약자이므로 한마디로 제식명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단지 이름만 이렇게 단순 명료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보병전투차 분야에서 BMP 시리즈는 상당히 선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1966년 소련군이 BMP-1을 배치하였을 때 서방은 그야말로 충격에 빠졌다. 기존 장갑차의 개념이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많은 자료에서 이를 최초의 보병전투차로 보기도 한다.
전차와 더불어 기갑장비를 대표하는 장갑차는 보병을 전투지역까지 안전하고 빠르게 이동시킬 목적으로 탄생하였다. 그래서 병력수송장갑차(APC, Armored Personnel Carrier)라고 부르는 기존 장갑차는 임무만 놓고 본다면 단지 철판을 두른 차량에 불과하였다. 하지만 소련의 BMP-1은 병력수송장갑차의 임무 외에도 보병들이 승차하여 사격을 할 수도 있고 73mm 저압포와 AT-3미사일로 보병화력지원이나 대전차전도 벌일 수 있었다.
- ▲ (좌)현재 국군의 주력 장갑차인 K200. 전투 지역으로 보병을 이동시키는 것이 주목적인 병력수송장갑차(APC)로 구분된다.
(우)최초의 보병전투차인 SPz 12-3. 하지만 병력수송장갑차에 단지 자위용 기관포를 장착한 것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출처 (cc) Sandstein at Wikimedia.org>
사실 최초의 보병전투차는 1958년 이스파노-수이자(Hispano-Suiza)의 스위스 법인이 개발하여 서독군이 사용한 SPz 12-3(SPz Lang HS.30)이다. 하지만 작은 병력수송장갑차에 자위용 20mm 기관포탑을 부착한 형태여서 오늘날 기준으로 보자면 보병전투차라고 하기에는 성능이 부족한 편이었다. 반면 BMP-1은 ‘승차전투’를 기본으로 하는 강력한 전투용 기갑장비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였다.
승차전투는 전술핵을 터뜨린 후 대규모 기갑부대를 앞세워 공격하는 소련의 전술사상을 바탕으로 탄생하였다. 오염지대에서 싸우거나 혹은 안전하게 통과하기 위한 새로운 기갑장비는 여압장치를 갖추고 탑승 보병들이 하차하지 않고 싸울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그렇게 BMP-1이 탄생한 것인데, 이에 놀란 서방측이 마더(Marder), M2 브래들리(Bradley) 같은 대항마 개발에 착수하면서 보병전투차는 오늘날 기계화보병부대의 대세가 되었다.
- ▲ (좌)수상도하 훈련 중인 러시아군의 BMP-3. 우리 군 당국은 이를 높게 평가하여 당시 개발 중이던 K-21에게도 수상도하 능력을 요구하였던 것으로 알려진다. <출처: 러시아육군>
(우)교전 상황을 가정하여 이동 탑승 훈련 중인 러시아군. 사진에서 보듯이 엔진의 위치 때문에 탑승이나 하차가 불편한 편이다. <출처: 러시아육군>
어쩔 수 없는 단점
BMP-3의 유래는 1975년 기존에 공수부대가 사용하던 ASU-85 돌격포와 육군의 PT-76 경전차를 대체하기 위한 소련군 당국의 프로젝트에서 찾을 수 있다. 핵심은 공수가 가능할 정도로 가볍지만 돌격포의 화력과 경전차의 수륙양용 능력을 모두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때 쿠르간마쉬자포드(Kurganmashzavod)는 BMP-2를 기반으로 해서 화력을 강화한 685계획안(Obyekt 685)을 제출하였으나 경쟁에서 고배를 마셨다.
그런데 그 즈음 BMP-1, 2에 놀랐던 서방에서 대항마를 속속 등장시키고 다양한 휴대용 저지수단들이 개발되자 앞서 진행 중인 프로젝트와 별개로 보다 강력한 신형 보병전투차의 소요가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기각되었던 685계획안을 기반으로 688계획안이 시작되었고 1981년 BMP-3 시제품제작이 완료되어 각종 실험 후 1985년부터 실전 배치되었다. 하지만 새로운 보병전투차가 아니라 앞서 언급한 것처럼 기존 BMP-2를 개량한 형태였다.
- ▲ 부가 장갑을 부착하여 방어력을 강화한 BMP-3M. 하지만 무게가 증가하여 수상도하가 어려운 것으로 알려진다.
BMP-3은 이전 모델처럼 수상도하능력을 요구 받다 보니 무게가 20톤을 넘을 수 없어 구조적으로 방어력이 약할 수밖에 없다. 비단 보병전투차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기갑장비는 화력, 방어력, 기동력이 반비례하는 요소다. 특히 엔진의 성능과 장갑의 재질이 획기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방어력을 늘리면 구조적으로 기동력이 저하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방어력을 늘리는 대신 수상도하능력을 포기하는 보병전투차도 많다.
무게에 신경 쓰다 보니 크기도 되도록 작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가뜩이나 차체가 작은데다가 엔진룸을 뒤편에 배치하면서 탑승여건이 나쁘고 승하차 과정도 상당히 불편하다. 따라서 전면 방어력이 30㎜ 기관포탄을 막아낼 수 있을 정도지만 포탑과 측면은 워낙 약해 중기관총에도 관통된다. 그래서 개량형인 BMP-3M은 콘탁트(Kontakt)-5 반응 장갑을 부착하여 방어력을 증대시켰는데 대신 수상도하능력은 포기한 것으로 알려진다.
- ▲ 주무장인 100mm 저압포와 30mm 기관포가 병렬로 연결되어 목표물에 따라 공격 수단을 달리 할 수 있다. <출처: 러시아육군>
강력한 화력
대신 BMP-3의 공격력은 현존하는 보병전투차 중에서 최고라는 평가를 들을 만큼 강하다. 사실 전작들도 서방측 보병전투차에 비한다면 상당한 수준이었는데, 소련군은 더 강한 무장을 원하였다. 이에 따라 보병근접지원과 경장갑차량 격파가 가능한 100mm 구경의 저압포와 고속 사격이 가능한 30mm 기관포를 주무장으로 하여 모든 화력을 통합 관리할 수 있는 2K23 무장시스템이 장착되어 전투효율을 극대화하였다.
더불어 BMP-3은 외부에 부착한 미사일 발사대를 이용하는 전작들과 달리 600mm 장갑을 관통할 수 있는 사거리 4km의 AT-11(9M117) 대전차 유도미사일을 주포로 내부에서 발사할 수 있다. 따라서 화력만 놓고 본다면 충분히 경전차 정도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 정도로 평가된다. 이전까지 M113이나 K-200같은 APC만 보유하였던 국군이 BMP-3에 특히 매료되었던 부분도 바로 이 점이었다. 더불어 뛰어난 도하능력도 호평을 받았다.
- ▲ 체첸 전쟁에서 격파 된 BMP-2. 이때 실전에 투입 된 BMP-3도 비슷한 피해를 입은 것으로 알려진다. <출처 (cc) Mikhail Evstafiev>
BMP-3은 1987년부터 양산에 들어가 약 2,000대 이상이 생산되었고 현재도 생산이 이루어진다. 러시아군이 사용하는 700여대를 제외한다면 해외에 판매된 물량이 훨씬 많기에 BMP-1, 2보다 적지만 상업적으로도 성공작이라 할 수 있다. 냉전 이후의 시대상처럼 전작들과 달리 옛 친소 국가보다 전통적으로 서방제 무기를 애용하는 나라들이 많이 샀는데, 쿠웨이트, UAE은 200여대 이상을 운용하고 있을 정도다.
수많은 전장에 모습을 드러낸 BMP-1, 2에 비해 BMP-3의 실전 사례는 1990년대 중반에 있었던 체첸 전쟁 정도가 대표적이다. 자세한 내용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지만 게릴라전을 펼친 체첸 반군의 대전차무기에 쉽게 격파된 점은 불곰사업 당시 군 당국이 러시아제 기갑장비 도입을 탐탁지 않게 여겼던 이유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는 도심에 무턱대고 전차나 장갑차를 밀어 넣은 러시아군의 잘못된 전술 때문에 피해가 컸던 것으로 알려진다.
우리와의 인연처음 언급한 것처럼 BMP-3은 국군이 보유한 최초의 보병전투차라는 타이틀도 가지고 있다. 일선에서 BMP-3을 운용했던 지휘관들은 강력한 화력과 기동력을 높게 보아 좋은 평가를 내렸다. 하지만 2015년 중반에 알려진 소식에 따르면 BMP-3은 T-80U 전차와 함께 치장물자로 전환될 것임이 밝혀졌다. 여타 기갑장비와 비교한다면 상당히 짧은 일선 배치 10여 년 만에 물러나는 것인데, 성능이 갑자기 저하되어 그런 것은 아니다.
가장 큰 문제는 기관총탄조차 기존에 국군이 운용하는 것과 다른 탄을 사용할 만큼 별도의 군수지원체계를 유지하여야 하는 부담 때문이다. 더불어 갈수록 부품 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우리만 해당되는 사항이 아니라 러시아군도 마찬가지인 것으로 알려진다. 더불어 프랑스제 열영상장비 등으로 업그레이드 하였을 만큼 러시아제 전자장비와 일부 센서의 성능이 부족한 점도 아쉬움을 주었다.
그 외 피아식별 문제처럼 여러 이유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는데, 결론적으로 성능보다 이를 계속 운용해서 얻는 효과보다 어려움이 많기 때문에 도태된다고 보면 된다. 비록 도입하여 운용한 물량은 전체 국군 기갑 전력을 고려한다면 결코 많은 편이 아니지만 현재 일선에 한창 배치 중인 국산 K-21 보병전투차의 개발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한마디로 BMP-3은 얼떨결에 이 땅에 왔지만 굵은 흔적을 남긴 인상적인 이방인이라 할 수 있다.
제원
중량 18.7톤 / 전장 7.14m / 전폭 3.2m / 전고 2.4m / 항속거리 600km / 최대속도 72km/h(도로), 45km/h(야지), 10km/h(수상)/ 승무원 3명+보병 7명 / 무장 100mm 2A70 저압포 1문(9M117 발사가능), 30mm 2A72 기관포 1문, 7.62mm RKM 기관총 3정
글 남도현 | 군사 저술가[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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