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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된 전설 A6M 0식 함상 전투기(제로센)

바래미나 2015. 11. 23. 01:53

왜곡된 전설 A6M 0식 함상 전투기(제로센)


일본 해군의 항공모함 탑재 전투기 A6M, 통칭 제로센의 비행 모습 <출처 (cc) Kogo at Wikimedia.org>
일본 해군의 항공모함 탑재 전투기 A6M, 통칭 제로센의 비행 모습 <출처 (cc) Kogo at Wikimedia.org>

무기의 세계에서 선전이나 단편적인 평가 덕분에 실제 성능보다 뛰어난 무기로 대접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 사실 적에게 위압감을 주고 반대로 아군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서 일부러 그런 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Bf 109나 스피트화이어(Spitfire)가 아직도 불후의 명작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주먹을 섞은 상대방도 훌륭하다고 인정하였을 만큼 그 능력이나 전과가 훌륭하였기 때문이었다.


 

 

해군 연습항공대 소속의 A6M3
해군 연습항공대 소속의 A6M3

그런데 처음 접촉 당시 얻은 적은 정보로 말미암아 최강으로 대접받게 되면서 현재까지도 막연히 그렇게 여겨지는 무기가 있다. 흔히 제로센이라 불리는 일본 해군의 A6M 전투기(0식 함상전투기)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물론 그렇다고 실제로는 짝퉁인데 그럴듯하게 속여서 고급품 흉내를 내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기본적으로 좋은 전투기는 맞지만 A6M은 성능이상으로 과장된 평가를 받은 대표적인 무기라 할 수 있다.


 

 

중국 상공에서 작전 중인 A5M. 기동력은 좋았지만 외형에서 알 수 있듯이 구시대적 스타일의 전투기였다.
중국 상공에서 작전 중인 A5M. 기동력은 좋았지만 외형에서 알 수 있듯이 구시대적 스타일의 전투기였다.

최고의 전투기를 원하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며 제국주의 클럽에 가입한 일본은 섬나라인 특성을 살려 강력한 해군력 확충에 박차를 가하여 1940년대 초에 이르러 미국, 영국 다음가는 해군력을 보유한 국가가 되었다. 이러한 일본 해군이 해군사에 선도적인 업적을 남긴 것이 하나 있는데, 바로 항공모함의 운용과 관련한 부분이다. 1922년 취역한 호쇼(鳳翔)처럼 일본은 기존 함정을 개조한 형태가 아닌 최초로 설계 단계부터 전용 항공모함을 제작하여 운용한 나라다.


 

뿌리 깊은 거함거포주의를 신봉하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음에도 별도로 항공모함 함대를 이용한 원거리 타격 방법을 연구하고 실전에도 응용하였다. 이것은 항공모함을 단지 전함 위주로 구성된 함대의 보조 전력 정도로만 생각하던 미국이나 영국과는 엄청난 차이였고, 태평양전쟁 초기에 일본이 연이어 승리를 거둔 원동력이 되기도 하였다. 이렇듯 항공모함의 효용성을 높이 평가하고 있던 일본은 당연히 여기에 탑재할 함재기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적어도 비행 성능만 놓고 본다면 탄생 초기에 A6M은 상당히 뛰어난 전투기였다. 하지만 기술 부족으로 인하여 고성능을 달성하기 위해 생략된 부분이 많았다.
적어도 비행 성능만 놓고 본다면 탄생 초기에 A6M은 상당히 뛰어난 전투기였다. 하지만 기술 부족으로 인하여 고성능을 달성하기 위해 생략된 부분이 많았다.

1936년 일본 해군은 A5M 전투기(96식 함상전투기)를 개발하여 1,000여기 가량 운용하였다. 고정식 강착(降着)장치를 가진 구시대적 디자인이었지만 기동성만큼은 후속기인 A6M보다 우위에 있다는 평가를 받았을 정도로 뛰어났다. 하지만 전투를 벌인 상대가 한 수 아래였던 중국군이어서 장차 남방 진공을 염두에 둔다면 필연적으로 마주할 미군이나 영국군 전투기와 맞상대하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하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일본 해군은 차세대 항공모함 탑재 전투기 개발에 나섰는데, 이때 개발 업체에 요구한 조건이 상당히 까다로웠다. A5M 정도의 기동력에 시속 500km 정도의 최고속도, 10분내 2만 피트 상승, 장거리 항속과 조종이 용이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함재기는 육상에서 운용하는 전투기에 비해 제약 요소가 많은 편이었음에도 일본 해군은 소문이 자자한 독일의 Bf 109나 영국의 스피트화이어 수준의 전투기를 원하였던 것이다.


 

 

호리시코 지로(가운데)를 비롯한 A6M 개발팀. 30대 중반의 젊은 엔지니어들의 노력에 의해 개발 착수 2년 만에 A6M이 완성되었다.
호리시코 지로(가운데)를 비롯한 A6M 개발팀. 30대 중반의 젊은 엔지니어들의 노력에 의해 개발 착수 2년 만에 A6M이 완성되었다.

생존성을 희생시켜 얻은 성능


 

속도를 비롯하여 비행과 관련된 대부분의 능력은 엔진의 힘에 크게 좌우되지만 기술력이 부족하였던 당시 일본에 이런 요구 조건을 충족할 수 있는 고성능 엔진이 없었다. 하지만 미쓰비시(三菱) 중공업의 엔지니어인 호리코시 지로(堀越二郞)는 개발 지시가 내려온 지 불과 2년만인 1939년에 목표를 달성한 전투기를 개발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는 강력한 엔진이 없다면 기체의 무게를 줄이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였다.


 

지로는 고심 끝에 조종석과 엔진 탑재 부위에 당연히 설치되던 장갑판을 삭제하고 피탄(被彈)시 연료 누출을 막는 탱크 봉합 장치를 생략하는 방식으로 기체를 경량화하여 비행 성능과 관련한 요구 조건 대부분을 충족시켰다. 한마디로 조종사 보호를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없다는 이야기다. 사실 엔지니어는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군부는 그러한 생략을 통해서라도 싸움 잘하는 무기를 원하였던 것이었다.


 

 

중국 상공에서 작전을 벌이는 A6M2. 시대에 뒤진 전투기를 보유한 중국 공군을 상대로 압도적인 전과를 기록하였다.
중국 상공에서 작전을 벌이는 A6M2. 시대에 뒤진 전투기를 보유한 중국 공군을 상대로 압도적인 전과를 기록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A6M가 단지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으로 탄생한 전투기는 아니었다. 사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단지 무게만 줄인다고 무조건 비행 성능이 좋아지지는 않는다. A6M은 플랩을 통해 충분한 양력을 받을 수 있었기에 저속에서 기동성이 탁월하였다. 날개의 지지구조, 랜딩기어의 수납 방법 등에서도 등장 당시 기준으로 당대를 선도하였다는 평가를 들었을 정도로 많은 개발에 노력이 함께 있었다.


 

각종 실험 지표에 만족한 군부는 A6M을 1940년 7월 전선에 투입하였다. 한창 중국과 전쟁 중이었기에 개발과 동시에 실전 테스트가 이루어진 셈이었다. 1940년 9월 13일 신도 사부로(進藤三郎) 대위가 이끌던 13기로 이루어진 A6M 비행대가 소련제 I-15와 I-16들로 이루어진 27기의 중국 공군 비행대와 공중전을 벌여 단 한기의 손실 없이 모든 중국 전투기를 격추시키는 전과를 거두며 전쟁사에 찬란하게 데뷔하였다.


 

 

1941년 12월 진주만 급습 당시 항공모함 쇼카쿠(翔鶴)에서 출격 준비 중인 A6M2 비행대. 전쟁 초반에 공포로 인식 될 만큼 미군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1941년 12월 진주만 급습 당시 항공모함 쇼카쿠(翔鶴)에서 출격 준비 중인 A6M2 비행대. 전쟁 초반에 공포로 인식 될 만큼 미군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6개월만에 끝난 전성기


 

이후 중국군과 벌인 수많은 공중전에서 A6M은 압도적인 전과를 올렸고 이러한 소식은 곧바로 미국의 정보 당국에 흘러 들어갔다. 그런데 정작 미국은 중국이 못해서 그런 것일 뿐이라며 정보를 애써 무시하였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일본의 기술력을 폄하하고 무시한 뿌리 깊은 자만심이 함께 자리 잡고 있었다. 일본이 적극적으로 대외 도발을 벌여 세력권을 넓혀가고는 있었지만 미국은 그저 동네 주먹대장 정도로 인식하였던 것이었다.


 

결국 미국은 코피가 터졌다. 1941년 12월 진주만 기습을 시작으로 일본은 기다렸다는 듯이 동남아로 밀물처럼 밀려들어갔다. 이러한 침략 전쟁의 선봉은 항공모함 함대였다. 이때 하늘에서 미 육군, 해군의 주력기인 F4F, P-40을 압도하며 일본 함대를 철통 경호하였던 주역이 A6M 전투기였다. 미군은 자기들 보다 한참 밑으로 보고 있던 일본의 전투기를 도저히 상대 할 수 없음을 깨닫고 충격에 빠졌다.


 

 

 
(좌)전쟁 초기 A6M의 상대역이었던 미 해군의 F4F. 교전 경험이 축적되면서 어느정도 A6M에 대응할 수 있었으나 전반적으로 기동성이 뒤졌다.
(우)F4F의 뒤를 이은 미군 F6F. F4U와 함께 A6M을 제압한 미 해군의 주력기이다.
(좌)전쟁 초기 A6M의 상대역이었던 미 해군의 F4F. 교전 경험이 축적되면서 어느정도 A6M에 대응할 수 있었으나 전반적으로 기동성이 뒤졌다.<br>
(우)F4F의 뒤를 이은 미군 F6F. F4U와 함께 A6M을 제압한 미 해군의 주력기이다.

처음 A6M을 대면한 미군 조종사들은 동체에 그려진 커다란 붉은색 일장기를 빗대어 미트볼(Meatball)이라고 낮추어 불렀지만 곧바로 공포를 느껴야 했다. 재수 좋게 꼬리를 물었어도 빠른 속도로 빠져 나간 후 급속한 기동력으로 자신의 배후로 치고 들어오는 A6M에 의해서 속절없이 피격되기 일쑤였다. 그렇게 A6M의 신화가 시작되면서 이후 최고의 전투기 중 하나로 대접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정작 A6M은 태평양 전쟁 발발 6개월 만에 최고의 자리에서 내려왔다. 기체의 성능 차이에 더해, 중일전쟁에서 경험을 쌓은 일본 조종사들에 비해 미국 조종사들이 경험이 부족하였던 점이 처음에 미국이 애를 많이 먹었던 이유였다. 그러나 계속 실전을 치르면서 미국은 타치위브(Thach Weave) 전술 등 새로운 전투 기법을 고안하여 어느 정도 대응에 나섰다. 게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F6F나 F4U가 새롭게 등장하자 순식간에 상황이 바뀌었다. 미국의 신예기들이 A6M을 압도하였던 것이다.


 

제2차 대전 당시 각국의 ‘진검’이었던 Bf 109, 스피트화이어, P-51등은 전쟁 말기까지 계속 업그레이드되면서 최고를 자부하였던 것과 비한다면 이처럼 A6M의 몰락은 너무나 빨랐다. 구조적으로 성능을 향상시키는데 한계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미국 국적 마크를 달고 있는 노획 A6M. 미군 당국은 각종 실험을 통해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미국 국적 마크를 달고 있는 노획 A6M. 미군 당국은 각종 실험을 통해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과연 전설이었나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불과 6개월간의 전과만가지고 A6M이 아직까지 최고 성능의 전투기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것은 뭔가 잘못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데뷔가 뇌리에 남을 정도로 인상적이었고 이를 두고두고 자랑으로 삼으려는 일본의 선전 때문에 그런 것이라 할 수도 있다. 물론 전쟁 초기에 있었던 A6M의 뛰어난 성과를 깡그리 무시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여기에 또 하나의 착시현상이 있다.


 

태평양전쟁이 미국과 일본의 대결이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전쟁 내내 A6M이 상대하였던 대부분은 미국의 전투기들이었다. 그런데 A6M의 데뷔 당시에 미국은 전투기 분야에 있어 그다지 강국이 아니었다. 거대한 대양으로 동떨어져 있었기에 전투기 개발에 상대적으로 소홀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복엽기에서 단엽기로 넘어가던 과도기에 제작되어 전쟁 발발 당시에 주력기로 사용한 F4F, P-40은 된 경쟁국 전투기에 비해 성능이 뒤졌다.


 

 

 
1943년 솔로몬 제도에 위치한 문다 비행장에서 격파 된 A6M3

1943년 솔로몬 제도에 위치한 문다 비행장에서 격파 된 A6M3

그에 비해 A6M은 나름대로 최신의 전투기였다. 1970년 제작된 영화 ‘도라 도라 도라’에서 A6M을 몰고 항공모함 아까기에 착함한 함대 작전참모 겐다(源田實)를 친구인 항공대장 후지타(淵田美津雄)가 맞이하면서 이야기를 나눈다.


 


후지타 “이것이 바로 0식 전투기란 말인가?”
겐다 “그렇다네! 메셔슈미트나 스피트화이어보다 좋은 전투기라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일본 또한 동시기에 등장한 Bf 109나 스피트화이어를 비교 대상으로 삼았을 뿐, 장차 전쟁을 벌여야 할 미국의 전투기는 굳이 비교할 가치도 없는 저성능의 전투기로 보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은 A6M을 Bf 109나 스피트화이어 수준이라고 여겼지만 정작 객관적으로 이들과 비교하기는 곤란한 수준이었다. 만일 A6M이 처음부터 이 정도로 뛰어난 전투기들과 주먹을 섞었다면 분명히 다른 평가가 나왔을 것이다.


 

 

 
구레(吳) 해사박물관에 전시 중인 A6M3. 최근 일본 사회의 우경화와 더불어 새롭게 각광받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출처 (cc) 衛兵隊衛士 at Wikimedia.org>
구레(吳) 해사박물관에 전시 중인 A6M3. 최근 일본 사회의 우경화와 더불어 새롭게 각광받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출처 (cc) 衛兵隊衛士 at Wikimedia.org>

A6M은 애당초 많은 부분을 생략한 체 만들어졌기에 업그레이드로 성능을 향상시키기는 애초 불가능하였다. 좋은 전투기였지만 그렇다고 신화로 언급될 만큼 뛰어나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개전 초 단 6개월의 전과만 보고 신화의 대열에 올려놓는 것은 뭔가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A6M의 신화는 처음의 전과가 증폭되면서 지금까지 그런 것이라고 막연히 알려진 왜곡된 전설일 뿐이다.


 

 

제원(0식 21형)


 

전장 : 9.06m / 전폭 : 12.00m / 전고 : 3.05m / 최대이륙중량 : 2,410kg / 최고속도 : 533km/h / 전투행동반경 : 3,105km / 상승한도 : 10,000m / 무장 : 7.7mm 97식 기관총 2문, 20mm 99식 기관포 2문, 60kg 폭탄 2발, 250kg 폭탄 1발( 가미카제 공격 시)


 

 

글  남도현 | 군사 저술가[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