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의 밤
( 홍화문 ) 8 월의 마지막 수요일 오후, 다른 날보다 일찍 들어온 막내 녀석이 "엄마...! 아빠랑 오늘 저녁에 데이트 좀 하고 오실래요?" 하고 묻는다. "왜? 어디 좋은 데 있대니?" "네에 엄마...얼마전에 창경궁 야간개장을 한다길래 제가 인터넷으로 입장권을 예매했었거든요." 하면서 자신의 신분증과 하얀 봉투 하나를 건네준다. "이게 뭐니?" "이 신분증은 창경궁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받으실 때 쓰시고요.. 이 봉투는 아빠랑 엄마 데이트 자금이니까.. 창경궁 구경하신 후에 대학로에서 맛있는 것 많이 사드시고 오시라구요~" "그으래 고맙다. 우리 아들...미리 귀띰이라도 해주었음 모처럼 아빠와의 데이트에 꽃단장을 하고 가는건데...이거 참 시간이 너무 빠듯하니 이걸 어쩐다니..."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 되지 않으니까..대충 준비하고 빨리 가세나. 우리 막둥이 마음이 너무 이쁘지 않는가..." 티브이를 보고 있던 남편도 기분좋은 표정으로 한 마디 거들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생각지도 못했던 창경궁의 야경을, 늦둥이 아들 덕분에 8 월이 끝나가는 해거름에 보러가게 된 것이다. 지하철 4 호선을 타고 혜화역에서 내려 창경궁에 도착했을 때는 밤 8 시가 다된 시간이었고 매표소엔 기나긴 줄이 늘어 서 있었지만 채 십 분도 걸리지 않아 입장권을 받아들고 우리 부부는 이내 창경궁의 야경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의 날렵한 모습은 밤에 더욱 눈길을 끈다. 앞에서나 옆에서 혹은 뒤에서 봐도 기품있는 그 모습은 단번에 인간의 눈과 가슴을 매혹해 버리고 마는데 홍화문을 지나 보물로 지정된 옥천교를 걷는 동안, 장대석과 판석을 끼워넣은 바닥과 아름다운 돌난간 또한 예사롭지 않았다.
( 옥천교 ) 신하들이 궁궐의 정전(왕이 나와서 조회를 하던 궁전)에 들어갈 때에는 정전의 정문과 궁궐 대문 사이를 흐르는 금천을 건너야 했다. 옥천교는 바로 이 금천 위에 놓인 다리로서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과 명정전의 대문인 명정문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성종 14 년(1483)에 건립된 것이라고 한다.
( 명정문 ) 옥천교를 건너면 곧 명정문이 나타나는데 이 명정문은 명정전의 동서 중심축 선상에 놓이지 않고 남쪽으로 약 1.2m 벗어나 있고, 이 점이 바로 명정문의 특징이라고 한다. 또한 일반적인 궁궐의 정전과 그 문이 남향을 하고 있는데 반해, 창경궁의 정전인 명정전과 명정문은 동향을 하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고 할 수 있겠다. 건물의 짜임이 순박하고 알차서 조선 중기의 문을 대표할 만하고 짜임새가 조선 전기 건축양식의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어 궁궐 중문건축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한다. 1963 년 1 월 21 일 보물 제385 호로 지정되었으며 정전 주위는 회랑으로 둘러싸여 있다.
( 회랑 ) 명정문을 지나면 좌우로 긴 회랑이 나타나는데 이 회랑은 건립 당시의 것으로 명전전과 함께 현존 궁전건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라고 한다. * 회랑 - 사원이나 궁전건축에서 주요부분을 둘러싼 지붕이 있는 긴 복도로, 궁 안의 전각과 전각 사이에 있는 마당을 구획하거나 신성한 지역을 둘러싸기 위하여 설치하였는데, 행사가 있을 때는 좌석이나 통로로도 사용된다.
( 명정전 ) 명정전은 사면의 문이 꽃창살로 장식돼 있다. 내부 구조와 설치물들이 소박하면서도 품위가 느껴진다. 창호 아랫부분을 전벽돌로 쌓아올려 특이한 양식이며 조선 왕조의 정전 중 가장 오래 된 전각이다. 명정전은 창경궁의 정전으로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거나 국가의 큰 행사를 치루던 장소로 사용하였으며, 외국 사신을 맞이하던 장소로도 이용하였다고 한다. 조선 성종 15 년(1484)에 지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광해군 8 년 (1616)에 다시 지었다.
( 용상 ) 내부 바닥에는 벽돌을 깔았고 왕이 앉는 의자 뒤로 해와 달, 5 개의 봉우리가 그려진 일월오악도 병풍을 설치하였다. 건물 계단 앞에는 신하들의 신분을 나타내는 24 개의 품계석이 놓여 있다.
저 멀리 남산타워의 불빛이 보인다. 실제로는 깊은 어둠이 내린 캄캄한 하늘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사진에선 대낮처럼 밝고 푸른 하늘이 내다보여 깜짝 놀랐다. 역시 카메라 앵글은, 인간의 눈이 인지하지 못하는 것들까지 더 깊이 더 세심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다시한 번 실감했다.
전각의 지붕 위에 올라가 있는 저 어처구니는, 흙으로 만든 인형, 즉 토우라고 불리워 졌던 것이다. 처음엔 흙이 무너지지 않도록 지붕을 보호하기 위함이었으나 나중에는 궁궐의 위엄과 건물을 보호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조선시대부터 전각의 지붕 위에 사용하였다. 어처구니 올리는 일을 하는 사람을 '잡상장'이라고 불렀는데 대부분 양반가와 서민들의 집을 짓다보니, 궁궐 건물을 지을 때만 올려야 하는 어처구니를 깜박 잊고 올리지 않을 때가 종종 있었다고 한다. 이 어이없는 실수를 사람들은 '어처구니없다'라고 사용하기 시작했고 그 말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전각의 지붕과 지붕 사이로 바라다 보이는 어처구니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하늘의 모습이 그지없이 아름답고 신비스럽기만 하다.
( 빈양문 ) 숭문당 북쪽에 연접되어 있는 빈양문은 외전과 내전을 연결하는 통로이자 문으로서 명정전의 뒷면 중앙 어칸 앞으로 설치된 복도를 따라가다 이 문을 나서면 바로 내전으로 들어서게 되어 북쪽으로 함인정, 경춘전, 환경전이 눈에 들어온다. 이 문은<궁궐지>에 간단한 규모가 기록되어 있고 1986 년 중건공사 때 발굴 조사를 토대로 재건하였다
( 문정전 ) 임금이 평상시에 거처하던 편전(便殿)으로 사용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명정전과 함께 중건되었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임을 당했던 휘녕전(徽寧殿)이 문정전의 옛이름이라고 한다.
( 함인정 ) 이곳에는 원래 성종 15 년에 지은 인양전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뒤 인조 11 년(1633)에 인경궁의 함인당을 옮겨 지어 함인정이라 한 것이다. 이곳은 특히 영조가 문무과거에서 장원급제한 사람들을 접견하는 곳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 경춘전 ) 경춘전은 대비의 침전이다. 성종 14 년에 건립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광해군 8 년에 재건하였으나, 순조 30 년에 불탄 것을 순조 34 년 (1834 년)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렀다. 이 경춘전은 왕비의 산실청으로 정조와 헌종이 탄생한 곳이다. 정조는 자신이 태어난 곳을 기념해 경춘전 내부에 탄생전(誕生殿) 이라고 친히 쓴 현판을 걸었다고 한다. <궁궐지>에는 정조가 태어나기 전날 밤, 혜경궁 홍씨가 꿈에 용 한 마리가 경춘전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나라에 큰 경사가 생길 징조라 하여 동쪽 벽면에 꿈에 본 용을 손수 그려놓았다는 일화가 실려 있다. * 궁궐지 - 조선시대 궁궐의 각 전각의 명칭, 위치, 연혁 등을 적은 책. 장서각도서.
( 환경전 ) 왕과 왕비의 침전으로 성종 15 년 (1484 년) 창경궁을 창건할 때 건립되었다. 임진왜란 때 화재로 전소되어 광해군 8 년 (1616 년)에 재건하였으나 인조 2 년 (1624 년) 이괄의 난 때 다시 소실되어 중건했다. 허지만 순조 3 년(1830 년), 창경궁에 큰불이 나 순조 33 년(1833 년) 또 다시 복원하였다.
( 춘당지와 대온실 가는 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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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당지 )
* 춘당지 - 창경궁 후원에 있는 연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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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온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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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의 원래 이름은 수강궁이다.
세종이 즉위하면서 상왕인 아버지 태종을 모시기 위하여 지은
곳이며 그 후 성종 14 년(1483 년) 세 대비 (할머니인 정희왕후,
작은어머니인 명의대비와 어머니인 인수대비)를 모시기 위하여
수상궁을 새로 중건하고 이름을 창경궁으로 바꾸었다.
창경궁은 숙종이 인현왕후를 저주한 장희빈을 처형한 곳이며
영조가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 일 등 크고
작은 궁중 비극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순종 즉위 후 창경궁은 일제에 의하여 크게 훼손되었다.
1909 년(순종 3) 일제는 궁 안의 전각들을 헐어버리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였고, 궁원을 일본식으로 변모
시켰으며, 강제로 한일합병조약이 이루어진 이후인
1911 년에는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격하시켰다.
또 창경궁과 종묘를 잇는 산맥을 절단하여 도로를 설치하였으며,
궁 안에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벚꽃을 수천 그루나 심어놓고
1924 년부터 밤 벚꽃놀이를 시작하였다.
1963 년 1 월에 사적 제123 호로 지정되었고,
1983 년에는 동물원과 식물원을 서울대공원으로 옮기고
창경궁이란 이름도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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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녀석 덕분에 팔자에 없는 창경궁 야경을 구경하고 오면서
내 나이 서른 여덟에 막내를 낳고 이 녀석을 언제 키우나
걱정했었던 그 나날들이 마치 어제의 일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아들 덕분에 삼십 하고도 오년만에 다시 만난 창경궁...
춘당지 옆 오솔길을 거닐면서 나는 내내 미안했다.
나라 잃은 슬픔만도 버거웠을텐데 수많은 전각과 나무, 작은
풀꽃들까지 몽땅 빼앗긴채
상처뿐인 그 가슴에 적국의 벚꽃과 동물들까지 끌어 안아야 했던
창경궁의 절망이 가슴 미어지도록 아프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창경궁 밤벚꽃놀이가 유행처럼 번지던 그 때
나는 왜 단 한 번도 창경궁의 슬픔을 헤아려 본적이 없었을까?
창경궁이 창경원으로 명찰 바꿔 달면서 선대의 숱한 영혼들께서
피눈물 흘렸으리라는 그 사실을 나는 왜 그저 간과하고만 있었던
것일까...
역사에 대해,
나라 잃은 슬픔에 대해,
늘 방관자였던 나...
창경궁의 야경을 만나면서 그런 내 자신이 새삼 뼈아프게
부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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