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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트파이어(Spitfire)

바래미나 2015. 8. 24. 03:37

영국의 영원한 자부심, 스피트파이어(Spitfire)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영국을 수호한 스피트파이어는 영국인들에게 불멸의 전투기로 여겨진다. <출처 (cc) Bryan Fury75 at fr.wikipedia>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영국을 수호한 스피트파이어는 영국인들에게 불멸의 전투기로 여겨진다. <출처 (cc) Bryan Fury75 at fr.wikipedia>

1940년 5월 20일이 되었을 때 영국은 절망적이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아르덴 삼림지대를 거쳐 후방으로 치고 들어 온 독일군에 의해 순식간 배후가 절단 당한 연합군은 됭케르크 해안가로 밀려 나갔다. 30만의 대규모 원정군을 프랑스에 파견하였던 영국은 이들이 고스란히 전멸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상황이 몹시 나빴지만 가용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즉시 구출 작전을 시작하였다.


그나마 독일에 비해 전력이 앞서 있던 전통의 영국 해군이 선봉에 섰다. 이들이 바다를 장악하는 동안 어선을 비롯하여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선박이 영국 해협을 건너 프랑스 해안가로 몰려갔다. 만일 이 상황이 20년 전의 제1차 대전 당시였다면 탈출 작전을 펼치는데 그다지 어려움은 없었을 것이다. 해안가에 교두보를 만들어 독일군의 진격을 막아내면서 순차적으로 배를 타고 빠져나오면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달랐다. 하늘에서 맹폭을 가해대는 독일 공군이 탈출로를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었다. 독일의 폭격기들은 해협을 가득 메운 선박들과 해안가에 몰려든 영국군을 공격하였다. 설령 철수 병력을 싣고 출발하였어도 배의 속도로 독일 공군의 사정권을 벗어나기는 매우 어려웠다. 독일은 세계 최강으로 평가 받는 강력한 공군력을 앞세워 연전연승을 하던 중이었다.


바로 그때 영국 본토에서 날아온 일군의 전투기들이 독일 공군을 요격하기 시작하였다. 수적으로는 절대 열세였지만 이들의 격렬한 방해로 말미암아 수많은 철수 선박들이 위험 지대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이후 이 전투기들은 곧바로 이어질 영국 본토 항공전을 비롯하여 제2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꾸준히 하늘을 지켰다. 지금도 영국의 자부심으로 남아있는 불멸의 스피트파이어(Spitfire)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끝이 뾰족한 유선형의 날개 구조 덕분에 흔히 가장 아름다운 전투기로도 불린다.
끝이 뾰족한 유선형의 날개 구조 덕분에 흔히 가장 아름다운 전투기로도 불린다.

혼이 담긴 개발 과정


지난 전쟁에서 단지 보조적인 역할만 담당하던 공군은 1930년대가 되자 전쟁의 향방을 가를 만한 거대 전력으로 변화되었다. 그럴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발달된 기술력을 발판으로 하늘에서 지상을 공격할 수 있는 고성능의 폭격기들이 속속 등장하였기 때문이었다. 예전에는 손으로 작은 폭탄을 어림잡아 던지는 정도였지만 이제는 일정 지역을 제압하거나 급강하 폭격으로 목표물을 정확히 타격하는 수준까지 발달하였다.


그런데 이들이 마음 놓고 작전을 펼치려면 먼저 하늘을 장악하여야 하고 이 임무는 전투기들이 담당하고 있었다. 당연히 전투기들도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는데 핵심은 속도였다. 당시 공대공 전투는 이른바 독파이팅이라 불리는 꼬리 물기 근접전 방식으로 벌어졌다. 따라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려면 무엇보다 속도가 빨라야 했다. 물론 선회력, 상승력도 중요하지만 일단 속도가 빠르면 우위를 잡을 가능성이 훨씬 많았다.


열강들은 이러한 트렌드에 걸 맞는 전투기 개발 경쟁에 뛰어들었고 영국도 마찬가지였다. 1931년, 영국 항공성은 최고 시속 400km로 비행할 수 있는 신예기 도입 계획을 공표하였고 이에 많은 제작사들이 개발 경쟁에 참여하였다. 독일의 재군비 선언 이후 유럽에 서서히 전운이 감돌기 시작하던 1936년, 신예기 도입 사업에서 마지막까지 남은 경쟁작은 슈퍼마린(Supermarine)의 K5054와 호커(Hawker)의 K5083이었다.


암으로 투병 중이었음에도 독일 공군의 팽창이 위협적임을 직감하고 스피트파이어의 제작에 열과 성을 다한 레지날드 미첼.
암으로 투병 중이었음에도 독일 공군의 팽창이 위협적임을 직감하고 스피트파이어의 제작에 열과 성을 다한 레지날드 미첼.

슈퍼마린은 차세대 전투기는 고속 비행 시 발생하는 비행 충격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도록 기체를 금속제로 제작되어야 한다고 판단했지만 아직 영국에서 이 분야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고심 끝에 알루미늄 시트를 이용한 응력외피(Stressed skin; 외피도 하중을 담당하는 구조) 방식으로 동체를 설계하였다. 또한 기동력 향상을 위해 날개를 끝이 뾰족한 유선형으로 제작하였는데 시제기 실험 결과 상당히 효과가 좋음이 입증되었다.


이는 최고의 전투기를 만들겠다는 레지날드 미첼(Reginald Mitchell)의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슈퍼마린의 엔지니어이었던 그는 1934년 암 수술 후 독일에서 요양을 하던 중 독일 공군의 팽창을 직접 목격하였고 이것은 영국에게 커다란 위협이 될 것이라 확신하였다. 그래서 그는 혁신적인 새로운 형태의 전투기가 아니면 하늘에서 우위를 달성하기 어렵다고 보고 병으로 삶이 꺼져가던 그 순간까지 제작에 열과 성을 다하였다.


탄생과 동시에 벌어진 전쟁

여러 신기술을 적용한 덕분에 성능은 K5054가 복엽기 기체의 골격을 이어받은 K5083보다 뛰어났지만 제작이 어려워 양산이 쉽지 않았다. 당장 독일에 맞설 수 있는 고성능의 전투기도 필요하지만 수적 열세도 보충해야 했던 영국은 고심 끝에 두 기종을 모두 채택하기로 결정하였다. K5083은 허리케인(Hurricane)이라 명명되어 1937년부터 제식화되었고 K5054는 스피트파이어라는 이름으로 그 이듬해부터 일선에 배치되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스피트파이어가 이룬 최초의 격추 기록은 허리케인을 상대로 이루어졌다. 영국이 독일에 선전 포고한 직후인 1939년 9월 6일, 제74비행대대 소속의 스피트파이어 편대가 켄트 주 상공을 비행 중이던 제56비행대대 소속의 허리케인 전투기 2기를 적기로 오인하여 격추시켰고 이 과정에서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커다란 문제를 야기하여 이후 피아식별장치(IFF)를 개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1938년 최초 배치 된 제19비행대대 소속의 스피트파이어 Mk1. 처음에는 2피치의 목재 프로펠러를 장착하였지만 곧바로 3피치 프로펠러로 교체되면서 강하 능력이 향상되었다.
1938년 최초 배치 된 제19비행대대 소속의 스피트파이어 Mk1. 처음에는 2피치의 목재 프로펠러를 장착하였지만 곧바로 3피치 프로펠러로 교체되면서 강하 능력이 향상되었다.

이런 비극적 사건도 있었지만 스피트파이어가 항공전사의 신화가 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아직 전선은 고요했지만 당시 영국은 육군과 공군으로 구성 된 대규모 대륙 원정군을 프랑스에 파견한 상태였다. 그런데 생산량이 부족하였던 스피트파이어는 공군 사령관 휴 다우딩(Hugh Dowding)이 유사시 본토 방어에 투입되어야 한다면 프랑스에 전개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는 우선 순위의 문제였지 결코 싸우지 않겠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1939년 10월 16일, 포스 만(Firth of Forth)에 정박 중이던 영국 함정을 급습한 독일의 Ju 88 폭격기 편대를 요격하면서 최초의 실전이 벌어졌지만 굳이 스피트파이어가 아니어도 둔중한 폭격기를 요격하는 것은 결과가 뻔하므로 그다지 의미를 둘 만한 전과는 아니었다.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한 직후인 1940년 5월 13일, 영국 지상군을 보호하기 위해 본토에서 출격한 스피트파이어들이 네덜란드 상공에서 독일 공군의 전투기들과 처음으로 교전을 벌였다.


하지만 이때 등장한 스피트파이어의 수량도 적었고 일방적으로 연합군이 밀려나던 중이다 보니 독일은 라이벌의 능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독일이 스피트파이어의 존재를 몰랐던 것은 아니었지만 자국 전투기에 대한 자부심과 신뢰가 워낙 커서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처음 언급한 것처럼 됭케르크 일대에서 대규모로 칼을 섞게 되면서 독일은 스피트파이어가 결코 만만치 않은 상대임을 깨닫게 되었다.


1940년 초반 지상에서 기관포 조준 테스트 중인 모습. 당시 스피트파이어는 전력 보존을 위해 프랑스에 파견되지 않고 본토에만 배치된 영국의 최신 무기였다.
1940년 초반 지상에서 기관포 조준 테스트 중인 모습. 당시 스피트파이어는 전력 보존을 위해 프랑스에 파견되지 않고 본토에만 배치된 영국의 최신 무기였다.

주역이 된 전투기


이미 속도에 관해서는 두 기종 모두 당대 최고의 수준이었기에 우위를 담보할 수 없었다. 급강하 능력에서는 Bf 109가, 선회 능력에서는 스피트파이어가 조금 앞선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이 또한 공중전 향방을 확실하게 가를 정도의 차이는 아니었다. 화력 또한 모두 상대방에 치명상을 안길 정도로 준수하였다. 결국 최고 성능의 양자가 하늘에서 맞붙었을 경우 승패는 전적으로 조종사의 능력에 의해 갈렸다.


1940년 7월 10일부터 넉 달 동안 이어진 영국 본토 항공전(The Battle of Britain)은 스피트파이어가 신화가 된 시공간이었다. 공군끼리만 벌였던 사상 최초의 전쟁은 거대했지만 전투 패턴이 처음부터 끝까지 한 가지 양상으로 정형화되다시피 하였다. 스피트파이어가 호위 임무를 벌이던 Bf 109를 유인하여 맞상대하는 동안 허리케인이 독일의 폭격기들을 요격하는 방식이었다. 이때를 기점으로 스피트파이어와 Bf 109는 항공전사 최고의 라이벌로 자리 매김 하게 되었다.



 

영국 본토 항공전 당시 런던 하늘을 수놓은 엄청난 비행운. 이러한 격렬했던 공중전의 흔적을 남기며 영국을 지켜낸 주역이 바로 스피트파이어였다.
영국 본토 항공전 당시 런던 하늘을 수놓은 엄청난 비행운. 이러한 격렬했던 공중전의 흔적을 남기며 영국을 지켜낸 주역이 바로 스피트파이어였다.

이 거대한 영국 본토 항공전은 영국이 독일의 집요한 공격을 물리친 수비 전이어서 구조적으로 전투기가 전면에 나서야 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전투기가 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은 유일무이한 사례가 되었다. 단지 하늘에서 적과 싸운 조종사들의 총 숫자는 육군의 1개 사단 병력에도 미치지 못하였지만 이들은 유럽을 제패한 독일의 팽창을 극적으로 좌절시켰다. 그래서 스피트파이어의 위대함은 그 어떤 전투기들보다 크다.


사실 공군의 궁극적인 목표는 지상의 목표물을 타격하는 것이므로 전쟁에 영향을 끼친 전과의 대부분은 폭격기와 관련이 많다. 반면 전투기는 공대공 전투를 목적으로 하다 보니 상당히 현란하게 싸움을 벌이지만 정작 전쟁에 흔적을 남기기는 어렵다. 물론 전투기들의 노고가 있었기에 대지상 공격 작전이 펼쳐지는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조연 역할만 담당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스피트파이어는 전쟁의 당당한 주역이 되었다.


1942년 초계 비행을 중인 영국 공군 제222비행대대 소속의 스피트파이어
1942년 초계 비행을 중인 영국 공군 제222비행대대 소속의 스피트파이어

돋보이는 위대함


이후 스피트파이어는 북아프리카 전선, 태평양 전선 등에서 영국군이나 영연방군이 있는 곳이면 항상 같이하며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고 추축국과 맞서는 많은 나라에도 대량 공급되었다. 전쟁 후반기에 미국의 P-47, P-51, 소련의 Yak-9, La-5 같은 전투기들이 등장하기 전까지 유럽 하늘에서 스피트파이어는 자타가 공인하는 연합군 최고의 전투기였다. 따라서 가장 많이 생산된 연합국 전투기의 타이틀을 차지하였던 것은 너무 당연하였다.


1943년 북아프리카 튀니지에 배치 된 캐나다 공군 제417비행대대 소속의 스피트파이어
1943년 북아프리카 튀니지에 배치 된 캐나다 공군 제417비행대대 소속의 스피트파이어

스피트파이어가 10년 후에 개발된 전투기들과도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던 것은 끊임없는 개량 덕분이었다. 그래서 변형이 상당히 많은 기종으로도 유명한데, 크게 탑재 엔진으로 분류하지만 같은 엔진을 사용했어도 다양한 세부 모델이 존재한다. 또한 항공모함 함재기로 활약한 씨파이어(Seafire)처럼 해군의 주력기이기도 했는데, 당시 미국과 일본이 각각 공군기와 해군기를 달리 운용하였던 점을 고려한다면 특이한 사례라 할 수도 있다.


제2차 대전은 그 거대한 규모에 걸맞게 엄청난 종류의 무기가 등장하였다. 그래서 새로운 무기가 등장하면 이전 무기는 2선으로 물러나거나 도태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기기 위해 당연한 수순이었고 이는 전투기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변신을 거듭하여 전쟁 내내 계속 주인공으로 머물렀고 전후 제트시대에 들어와서도 한동안 주력기로 활약하였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스피트파이어의 위대함은 돋보인다고 할 수 있다.



항공모함 함재기로 사용된 씨파이어. 총 2,334기가 생산되어 1950년대 중반까지 현역에서 활동하였다.
항공모함 함재기로 사용된 씨파이어. 총 2,334기가 생산되어 1950년대 중반까지 현역에서 활동하였다.
1943년 소련에 공급하기 위해 이란의 아바단에 도착한 스피트파이어.
1943년 소련에 공급하기 위해 이란의 아바단에 도착한 스피트파이어.
강력한 그리폰 엔진을 장착한 후기형 스피트파이어 Mk19
강력한 그리폰 엔진을 장착한 후기형 스피트파이어 Mk19
1943년 런던 인근에서 편대 비행중인 모습. 노르망디 상륙전이라 단순 훈련 모습으로 추측된다.
1943년 런던 인근에서 편대 비행중인 모습. 노르망디 상륙전이라 단순 훈련 모습으로 추측된다.

제원(Mk V)


전장 : 9.12m / 전폭 : 11.23m / 전고 : 3.86m / 최대이륙중량 : 3,039kg / 최고속도 : 595km/h / 전투행동반경 : 760km / 상승한도 : 11,125m / 무장 : 20mm 히스파노 기관포 2문, M2 브라우닝 기관총 4문


글  남도현 | 군사 저술가[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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