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오페라 <진주 조개잡이> 중에 나오는 아리아,

바래미나 2013. 12. 3. 14:50

 

 

 

너무나도 유명한 오페라 <카르멘>의 작곡가 조르쥬 비제(Georges Bizet, 1838-1875)의

또 다른 오페라, <진주 조개잡이 Les Pecheurs du Perles> 중에 나오는

아리아, Nadir Romance, Romanza di Nadir, "귀에 남은 그대 음성 Je crois entendre encore"....

며칠전 음악정원에서 헤라님의 이 음악에 대한 글을 이메일로 보내온 것을 읽었습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너무나 좋아하던 아리아입니다.

오페라 <진주 조개잡이>의 내용도 잘 몰랐고 

이 노래, 가사말도 모르고 아는 것이라고는 "귀에 남은 그대 음성"이라는 제목 뿐이었지만

그냥 이대로 멜로디만으로도 너무나 좋아서 그저 좋아했던 아리아입니다.

 

 

 

 

올리신님의 글에 이 오페라의 내용이 있었습니다.

브라만교 승려의 상징적인 보호를 받는다는 세일론 섬의 진주조개잡이들 중에서

나디르와 조개잡이 대장 주르가는 어릴적 친구인 순결한 여사제 레일라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조개잡이들이 바다에 나가서 조개를 잡는 동안 바위 위에서

그들의 안전을 위한 기도를 해야 하는 신성한 임무를 가지고 기도를 하는 여사제 레일라...

그녀를 사랑한다는 것은 금기된 것이기에 그들은 다시는 레일라를 찾지 않기로 맹세했지만

사랑이 그렇게 마음대로 쉽게 포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1막에서 사랑을 억제 하지 못한 나디르가

레일라에서 환희의 로망스를 불렀다고 합니다.

야자수 아래 숨어서 투명한 별빛아래 긴 베일을 살짝 열고 있는

신비한 그녀를 본 것같다고, 훈훈한 저녁 바람에, 마치 산비둘기 노래처럼

부드럽고 낭랑한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것같다고, 황홀한 밤이었고,

매혹적인 추억이었다고, 광적인 취기였고, 달콤한 꿈이었다고...

 

이런 멋진 노래를 부르다니...어찌 이렇게 매혹적인 노래에,

이토록 애절한 사랑의 고백에 넘어가지 않을 여자가 있을 것인가,

기도하는 동안에 순결을 지켜야 하는 여사제 레일라일지라도

나디르의 사랑의 고백에 그만... 사랑을 맹세하였다고 합니다.

 

진주조개잡이 대장 주르가도 레일라를 사랑했기에 질투가 일었지만

들의 사랑이 마을 사람들에게 들켜버려서 화형당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자

화형 당할 처지에 있는 그 두 사람을 살려주고

자기가 대신 동네사람들의 칼에 맞아 죽는다는 이야기라고 합니다.

 

오페라, < 진주 조개잡이>에 대한 내용을 읽고 나니

"너는 나를 인(印)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圖章)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陰府)같이 잔혹(殘酷)하여 불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氣勢)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아가서 8장 6절)라는 성경구절이 생각나네요.

 

사랑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

 

 

 

그러나 "귀에 남은 그대 음성"... 이 아리아를 들으니

이 아리아를 즐겨 부르던 사랑하는 큰언니가 생각납니다.

제가 클래식 음악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사실은 모두 큰언니 덕분이었습니다.

 

언니는 시골에서 7남매 장녀로 태어나서 초중학교 다닐 때 웅변을 아주 잘 했다고 합니다.

한국동란 후, 그 시대에는 반공에 대한 웅변을 학교에서 많이 시켰던 것같습니다.

그래서 시골에서 읍장으로 출마를 하신 적이 있는 친정아버지의 선거 유세 담당자들이

선거운동을 할 때 중학생인 언니를 데리고 가서 자동차로 시내를 돌면서

언니가 마이크로 아버지의 선거유세를 했다는 것은 우리 집안의 전설이지요.

1950년대 중학생 딸이 아버지 "xxx 씨를 읍장으로!"를 외쳤다고 하니

당시의 모습을 지금 생각하면...ㅎㅎ

 

 

 

시골에 계시던 부모님이지만 특히 어머니는 교육열이 강하셔서

큰언니를 가까운 도시, 전주로 고등학교를 보내셨고 큰오빠는 중학교부터 보내셨다고 합니다.

언니와 오빠가 서울로 대학에 진학하게 되니까 둘째 언니, 둘째 오빠 그리고 저와 동생들은

전주로 가지 않고 서울로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1950년대, 그 당시에 시골에서 전주나 서울에 학교를 보내는 것은

지금의 외국유학이나 다름없는 일이었을 것같습니다.

언니랑 오빠는 전주에서 학교 다닐 때는 하숙을 했고 언니가 대학에 다닐 때는

기숙사에서 지냈던 것으로 기억되지만 큰 오빠가 서울로 올라오면서 부터 

어머니는 작은 집을 마련하여 일하는 아줌마까지 두고 저희들을 서울에서 공부시키셨으니까요. 

지금도 시골에 사시는 분들은 여전히 그렇게 하실 것이고

이제는 외국으로 까지 보내고 있으니 한국의 부모님들의 교육에 대한 열정은

그 어느 나라도 따라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큰언니는 고등학교 음악선생님의 영향으로 당시부터 오페라, 교향곡 등

클래식 음악에 일찍 눈이 떠서 클래식음악에 심취했고 세계적인 오케스트라 지휘자들,

그 많은 오페라의 아리아들, 교향곡들과 세계적인 연주자들의 이름을 줄줄 외우셨고

음악회에 다니시는 것을 몹시 즐겨하셨습니다. 

언니의 일생에 걸쳐서 음악선생님의 영향이 가장 크고 멋지고 아름다운 것으로 여겨집니다.

 

지금은 70이 훨씬 넘은 연세이고 대장암 수술 후 항암치료 후유증으로 좋아하시던 여행도 못하시지만

예술의 전당이나 세종회관에서 하는 컨서트는 아직도 가끔 다니신다고 합니다.

언니의 목소리는 낮고 조금은 허스키해서 아리아를 부르기에 맞지 않을 것같지만

원어로 아리아를 부르던 음성은 달콤하고 부드러웠습니다. 

오페라 아리아 뿐만 아니라 이태리 가곡들도 얼마나 좋아하셨는지...

"카타리, 카타리" 하면서 "무정한 마음"을 즐겨 부르시던 언니의 음성이

지금도 귓가에 생생합니다.

 

 

 

 

언니의 세대만 해도 시골에 사시던 아버님께서 여자를 무슨 대학교육을 시키느냐고

잠시 반대하셨지만 어머니의 권유로 언니는 이화여대 법과대학에 진학을 하셨지요.

물론 언니 덕분에 그 뒤 딸들의 대학진학은 당연한 것이 되었구요.

당시 1950년대 후반? 이화여대 전교생이 4천명 정도였다고 하니까 세월이 참으로 많이 흘렀네요.

캠퍼스에서 찍은 플레어 스커트의 원피스를 입은 언니의 흑백 사진을 보면 얼마나 아름다운지...

우리 세대와는 다른, 낭만이 넘치는 시절을 지내셨던 것같습니다.

 

여성으로 당시에 법과 대학에 진학한 것은 순전히 웅변을 잘 하셨던 까닭이라고 하는데

졸업을 하고 언니는 고시공부를 하시려고 했지만 부모님의 권유로 엄격한 가정의 형부와 중매로 만나

결혼을 하시게 되어 언니의 꿈과 소망과 낭만은 가정이라는 굴레에 깊이 묻혀 버리고 말았지요.

음악이나 미술, 예술에 대한 열정 뿐만 아니라 독서를 무척 많이 하신 문학소녀였던 언니는

가정이라는 굴레에서 잠시 날개 잃은 천사로, 대화의 상대가 없음으로 인하여

허허로운 가슴을 안고서도, 두 아들을 훌륭하게 키우면서 남편의 '돕는 배필' 역활도 잘 감당하셨지요.

 

 

 

그러나 문학에의 꿈을 저버릴 수 없었던지 아들들이 대학에 진학한 후

수필문학을 공부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고 50대에 주부작가로 등단하셨습니다.

동호인들과 책을 출간하시기도 하면서 유럽 여행등, 외국 여행도 많이 하셨는데

외국어에 대한 열정도 대단해서 일본어는 물론, 영어, 불어까지 학원에 다니면서 배우시는 등,

그래서 일본에서는 일본말로, 심지어는 블란서에서는 불어를 구사해서 가이드를 놀라게 하였다고 했습니다. 

미국에 오셨을 때도 영어를 어찌나 잘 하시는지

우리들은 그저 따라 다니면서 언니로 하여금 영어를 쓰시도록 하였지요.ㅎㅎ

 

언니는 제가 국민학교 6학년 때 시집을 가셨고 시집살이를 하셨기 때문에 자주 만날 기회가 없다가

대학에 다니면서 당시 형부의 근무지를 따라 군산, 장항, 등에서 사시던 언니집에

방학 때면 자주 갔던 기억이 납니다. 

 

7형제의 맏딸로 동생들에 대한 사랑은 그 누구도 따를 수가 없었고

부모님께서 다 돌아가신 후에는 지금까지 동생들에게 어머니 역활을 하고 계십니다.

지금도 음악이나 문학, 그림에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밤이 지세도록 책을 읽으시며

음악을 들으시는 언니의 영향을 우리 형제들 모두가 알게 모르게 받고 있었던 것같습니다.

그러기에 제가 유럽여행을 하기 시작하자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언니는 제 포스팅을 보시면서 너는 어쩌면 그렇게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나 시들을

그렇게 포스팅에 올리니? 라고 하시는데, 사실은 그것이 모두 언니의 영향인 까닭이지요.

 

 

 

 

오늘 이 아리아를 유투브에서 찾아서 온종일 들으면서 언니 생각에 마음이 아립니다.

언니는 3년전 대장암을 발견하여 수술한 후에 12번의 항암치료 후유증으로

발(바닥)이 너무나 아프셔서...아직도 외출이 어렵다고...

전번 포스팅에서 말씀드렸듯이 나이들어간다는 것이 너무나 슬프고 안타깝기만 합니다.

언니의 친구들 조차도 너는 X도 버리기 아깝다고 하신다는 언니...

그래도 아직은 건강을 완전히 잃지 않았으니 감사하고 또 감사할 뿐입니다.

 

제 포스팅의 왕팬인 언니...

제 포스팅을 보는 즐거움으로 사신다는 언니...

제가 블로깅을 멈출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용기를 잃지 마시라고 미국의 시인, 롱펠로우의 시

"인생찬가"를 언니에게 보내고 싶습니다.

죽음도 때로는 유익한 것일 수도 있지만

생명...살아있다는 것.....이것이 축복이지요.

언니, 오래 오래 건강하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인생찬가                                                                                 A Psalm of Life

              

       -핸리 왜즈워스 롱펠로-                                                              -Henry Wadsworth Longfellow-

 

슬픈 가락으로 내게 말하지 말라,                                                 Tell me not, in mournful numbers,

인생은 단지 허망한 꿈일 뿐이라고!                                              Life is but an empty dream!....

삶은 환상이 아니다!  삶은 진지한 것이다!                                     Life is real!  Life is earnest!                           

무덤이 삶의 목적지는 아니지 않은가.                                           And the grrave is not its goal....                             

아무리 행복해 보인들 '미래'를 믿지 말라.                                     Trust no future, howe'ver pleasant!

죽은 '과거'는 죽은 이들이나 파묻게 하라!                                     Let the dead Past bury its dead!

행동하라, 살아 있는 현재 속에서 행동하라!                                   Act,-----act in the living present!.....

그러니 이제 우리 일어나 무엇이든 하자.                                       Let us, then, be up and doing,

그 어떤 운명과도 맞설 용기를 가지고                                           With a heart for any fate;

언제나 성취하고 언제나 추구하며                                                Still achieving, still pursuing,

일하고 기다리는 법을 배우자.                                                     Learn to labor and to wait.   

 

Henry Wadworth Longfellow(1807-1882), 미국의 시인,

18년간 하버드 대학 교수로 있었으며 당시 큰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

특히 유럽 각국의 민요를 번안, 번역하여 미국에 소개한 공적이 크다. 

단테의 <신고> 번역에 붙인 소네트 <신곡>이 최대 걸작으로 평가된다.  

(장영희의 영미시산책 <축복>에서 발췌했습니다.)      

 

 

    

 

올려진 사진들은 2011년 이태리 여행때 찍었던 베니스에 있는 라 페니체 극장과

그 주변의 모습입니다.  자칫 빛을 보지 못할 뻔한 사진들이네요.

라 페니체(La Fenice) 극장은 이태리 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가장 유명한 오페라 극장인데

많은 오페라의 초연을 공연한 곳으로 유명합니다.

 

 

 

 

오페라 <진주 조개잡이> 중에 나오는 아리아,

"귀에 남은 그대 음성"입니다.

이렇에 아름다운 노래를 보내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