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mm 포의 대활약 -국군 1사단의 운산 포위 탈출 작전
1사단과 같이 평양으로 북진하는 90mm 포
그는 즉시 국군 1사단이 배속되었던 미 1군단 사령관 밀번 장군에게
철수 의견 상신을 하고 야간 즉시 철수를 허락받았다.
국군 1사단장 백선엽 장군과 미 1 군단장 밀번 장군
그날 밤 후방 영변의 1사단 사령부에서 백 선엽 장군은 불안 속에
1사단의 철수가 잘 진행되기만을 기도했다.
단지 북쪽 1 사단 쪽에서 밤새도록 들려오는 포성을 들으며 철수 작전이
중단없이 진행되고 있음을 알고 다소 안심을 했을 따름이다.
한편 미 1군단 사령부에서 철수 명령을 받은 1사단은 촌각을 다투어야 하는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밤을 도와 전 사단이 철수를 개시하였다.
헤닉 대령의 고사포 포병단 그룹은 1만 5천발의 포탄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백 선엽 사단장이 철수를 건의하러 가면서 부탁했던대로 적절한
사격 계획을 세워 1사단이 철수 작전을 개시하기 전부터 주변 산악에서
칼을 갈고 있던 중공군들을 이 잡듯한 지역 사격으로 두들기기 시작했다.
헤닉 대령은 눈 한번 붙이지 않고 온 밤을 지새며 포사격을 직접 지휘했다.
표적 선정과 각 포대의 사격까지 직접 현장을 뛰어 다니며 격려하고 지도했다.
거리의 멀고 가까움, 표적의 크기와 성격에 따라 목표를 지정받은
90mm 고사포와 155mm곡사포, 그리고 4.2 박격포의 포탄들의 불줄기를 표적에 들씌웠다.
90mm는 고사포는 표적에 따라 융통성있게 조준경으로 포착한
적군을 직사로 포격하거나 일반 곡사포와 같이 곡사를 해서 중공군에게 타격을 주었다.
한국 전쟁중에 포격을 하는 90mm 포. 베지 않은 벼가 있는 것을 보니 늦은 가을인듯
일반 곡사포와 달리 째지는 듯이 날카롭게 울리는 90mm 고사포의 포성은 중공군에게 상당한 공포심을 주었을 것이다. 한국군 1사단에게는 헤닉 대령의 고사포 포병단 그룹뿐만 아니라
미 6전차대대의 대대장 그루던 중령이 지휘하는 50여대의 최신형 M46 전차까지 배속되어
있었다. 1개대대의 전차들까지 포사격에 동참했다.
엄청난 포병의 지원과 미 전차대의 엄호가 국군 1사단의 철수를 도왔다.
중공군은 그날 밤 한국군 1 사단도 포위하고 공격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가
상상을 초월한 대 포격에 단념하고 불벼락 속에서 살아남기에 급급했다.
같은 해 12월초, 송시륜이 지휘하는 중공군 9병단은
장진호 포위망을 뚫고 흥남으로 철수한 미 해병 1사단 섬멸에
미련을 못 버리고 함흥 평야까지 쫓아 왔었다.
미군은 항구를 떠나면서 남은 포탄을 모두 소진시키기 위해
주야를 가리지 않고 여분의 포탄을 모두 뒤 쫓아온 중공군 측에 퍼부었다.
이 어마어마한 포격에 간 떨어지게 놀란 송 시륜의 중공군은 미 해병이 증원 군을 받아서
반격하는 줄 오해하고 추격을 중단한채 허겁지겁 호를 파고 대피했었던 전사가 이날 밤
불벼락을 맞은 중공군의 행동을 추측케 한다.
한국전 참전 중공군
이날 밤 미군이 무자비한 포격으로 소비했던 포탄은 무려 1만 3천발이나 되었다.
헤닉 대령은 1사단의 철수가 다 완료된 후에야 포병들을 철수시켰고 마지막으로 포병
사령부도 철수시켰다.
[미측 기록은 철수가 이틀간 이루어진 것으로 되어있다.]
어마어마한 화력의 지원 아래 국군 1사단의 3개 연대는 무사히 죽음의
골짜기를 벗어나 운산 10킬로 후방에 있는 입석-영변으로 모두 안전하게 철수 할 수 있었다.
한국 전쟁중의 155mm 포사격.운산 탈출 때 10 고사포 포병 그룹이 발사하던
포들중 155mm 포가 18문이 있었다.
포병 화력의 덕을 입어 철수하였던 1사단은 운이 좋았다.
며칠 전 바로 옆 산줄기 넘어 1사단 우익에서 중공군의 잠복 기습에
크게 패하고 철수했던 한국군 2군단[6,7,8사단]이 비워 둔 공간을 채우려
진격해 들어갔던 미 1기병사단의 8연대는 중공군의 포위망에 걸려 섬멸적 타격을 입었다.
이 연대에도 1사단과 같은 신속한 철수 명령이 내렸지만 집중적인
10고사포 포병 그룹의 사격에 국군 1 사단에 손을 못 대게 된 중공군이
공격 방향을 바꾸어 미 연대 공격에 집중했기 때문에 포위망을 탈출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특히 최선봉의 3대대는 겹겹으로 포위당해 1기병 단장 게이 소장이
눈물을 머금고 구원을 포기했던 비운의 전멸 대대가 되었다.
900명 대대원중 700명의 대대원이 전사했거나 실종되었다.
3대대 실종자 상당수가 포로가 되었다.
중공군은 대다수가 부상자였던 미군 포로들을 북한군에게 넘겨주었고
북한군은 수백 명의 이들 포로들을 청천강 지류 구룡강변의
모래 사장에 끌고가 모두 학살해버렸다.
[학살된 미군은 약 300명으로 추산된다.]
노련한 헤닉 대령이 불안한 전세를 읽고 철수를 강력 건의 한 것이
6.25 전쟁 발발 초기 임진강 전선에서 사수하라는 말도 안 되는 명령 때문에
시간을 끌다가 1사단이 붕괴당한 쓰라린 경험을 했던 백 선엽 장군의 신속한
결단을 하게 했고 고사 포병단 그룹의 이은 활약이 1사단을 구조해 냈던 것이다.
8군 휘하에서 한국군 사단들 중에 별 피해 없이 건제를 유지하고
탈출했던 사단은 1 사단이 유일하다 이 공로로 헤닉 대령은 미 정부로부터
은성 무공 훈장을 수여받고 나중에 장군으로 진급하여 근무하다가 은퇴했다.
고사포 포병 여단은 전선 교착후 1사단과 작별하고 중부전선에 배치되어
높은 고각 사격이 가능했던 90mm 고사포는 보통의 곡사화기들이 다루기
힘든 높은 고지의 적을 포를 높이 올려 쏘는 직사 사격이나 곡사 사격으로
강타하며 보병사단을 지원했다.
M2 고사포는 6·25전쟁 뒤 국군에게 제공되기도 했지만 곧 현역에서 은퇴했다.
유도탄이 도래한 신시대는 그런 대형 대공 무기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았다.
6.25전쟁에서 미 90mm 고사포의 지상 목표 포격 실적을 독일 88mm 고사포에
비교해보면 그렇게 화려하거나 거창하지는 않다.
그러나 90mm 고사포는 한국 제일의 정예 사단을 적의 포위에서 구출해낸
공적을 세우고 현역에서 은퇴하기 전의 마지막 무대를 알차게 장식했다고 하겠다.
전쟁 기념관의 M 2 고사포. 한국 수호의 한 공로자인데 자기를 몰라보는
관람객들의 무심한 눈길을 서운하게 생각하는 듯이 보인다.
이 포는 서울 용산 전쟁 기념관에 가보면 볼 수가 있다.
별다른 설명도 없어 아무런 특징 없는 무기로 여긴 관람객들이 지나쳐
버리곤 하지만 이 글을 읽으신 분들은 국군 1사단을 중공군이 만든 죽음의
함정에서 구출했다는 이 고사포가 가진 역사의 향기를 맡아 보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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