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대 비행하는 하늘의 요새, B-17 플라잉포트리스 (1944년 촬영) |
제2차 대전에서 독일이 패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연합군과의 물량대결에서 질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비록 한창 때 유럽 중심부를 지배하였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그것은 해군력이 약한 독일이 사방으로 포위당한 상황이기도 했다. 이처럼 고립된 환경에서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보유한 소련, 미국 그리고 엄청난 식민지로부터 물자를 조달받는 영국과의 끝없는 소모전을 감당할 방법이 독일에게는 없었다.
독일의 후방을 초토화
인구와 자원뿐만 아니라 산업 생산량에서 구조적으로 독일이 이들 국가들을 앞설 수 없었다. 거기에다가 연합군은 독일이 공격을 가할 수 없는 사정거리 밖에서 엄청난 전쟁 물자를 생산해 내었다. 하지만 독일은 본토나 점령지 내에 있었던 대부분의 전쟁 관련 시설이 연일 연합군의 공격에 맹타 당하였다. 당연히 갈수록 연합군과 독일군의 전력 격차는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독일의 후방을 초토화시켜 전쟁 수행 능력을 떨어뜨린 최고의 공신은 연합군의 중(重)폭격기들이었다. 개전 초에 독일은 최강의 공군을 보유하였지만 중폭격기 분야는 그렇지 못하였다. 반면 연합군은 B-17 플라잉 포트리스(Flying Fortress)처럼 적 후방까지 장거리 비행이 가능한 중폭격기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런 차이는 결국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1942년 B-17 생산공장의 모습 |
미 육군의 야심
군사적으로 미국은 마치 섬나라 같다. 우선 육상으로 국경을 마주하는 캐나다와 멕시코는 국력이나 군사력으로 감히 상대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미국을 침공하는 가상의 적이라면 거대한 대서양이나 태평양을 건너와야 하는데 이것부터가 넘기 힘든 커다란 장벽이다. 따라서 미국은 해군이 바다에서부터 적의 침입을 막아내면 국가의 안보를 충분히 지킬 수 있다.
이런 지리적 장점으로 말미암아 미국은 미서 전쟁(Spanish-American War) 이전까지 외교적 고립주의를 택하였다. 국력이 급성장한 20세기 이후에는 본토 안보에 대한 걱정 없이 오히려 밖으로 팽창하는 전략을 고수하여 세계의 패권을 거머쥐었다. 이를 뒷받침해 준 현실적 자신감은 20세기 들어 세계 최강의 반열에 올라 현재까지도 어떠한 도전도 허락하지 않는 강력한 해군이 되었다.
반면 육군은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치안 유지 정도에나 최적화된 수준이었다. 설령 육군이 미국 밖으로 나간다 하더라도 구조적으로 반드시 해군의 신세를 져야 했을 만큼 전통적인 국방 전략상 해군에 비해 목소리가 작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미 육군은 이런 현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고 나름대로 국방의 중추가 되고자 하였는데 이때 새로운 전쟁 수단인 비행기가 눈에 들어왔다.
B-17의 상부에 설치된 기관총 터렛. B-17은 G형 기준 13정의 M2중기관총을 장착했다. |
명분과 실리
비행기에 주목한 미 육군은 1907년 통신군단 예하에 항공사단을 창설하였고 이것은 이후 미 육군항공대(1947년에 공군으로 독립)로 발전하였다. 지상의 목표물을 공격하는 것이 공군의 궁극적 목표지만, 그전에 자유롭게 폭격이 가능하도록 혹은 반대로 적의 공격을 막기 위해 하늘을 먼저 장악하여야 하는데 그 임무는 전투기들이 담당하였다. 1차 대전 이후 열강들이 항공대나 공군을 육성하였는데 나라마다 지향하는 방식이 약간 차이가 있었다.
오랫동안 고립주의를 고수한 미국 입장에서는 본토 방어용 전투기 분야에 주력하는 것이 맞지만 오히려 공격 무기라 할 수 있는 폭격기 제작에 매진했다. 미국을 적이 공격한다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야 하므로 폭격기를 이용하여 먼 바다에서부터 요격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 이유였다. 사실 20세기 중반 이전에 미국까지 날아와 공격을 가할 만한 항공기도 없었다. 한마디로 해군과의 경쟁에서 뒤처지기 싫었던 미 육군의 자존심이었다.
이 때문에 2차 대전 발발 직전에 미 육군 항공대의 전투기들은 경쟁 열강들의 동종 기종에 비해 성능이 뒤졌던 것으로 평가되는 반면 폭격기들은 최고의 성능을 자랑하였다. 그 중에서도 1938년부터 본격 도입되기 시작한 B-17은 발군이었다. 엄밀히 말해 성능만 놓고 본다면 제2차 대전 당시에 활약한 폭격기 중에서 최고라고 할 수 없지만 인상적이었을 만큼 B-17이 최고의 활약을 보였던 점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1943년 8월, 슈바인푸르트 공습 당시의 B-17 |
새로운 전쟁의 수단
1934년, 미 육군항공대는 그 동안 주력 폭격기로 사용하던 B-10을 대체하기 위해 2,000파운드의 폭탄을 장착하고 시속 350~400km의 속도로 1,500~3,000km의 비행이 가능한 신형 폭격기의 개발을 각 항공기 제작사에 요청했다. 당시 업체들에게 요구한 핵심은 위험한 적진 깊숙한 곳까지 날아가 폭격을 할 수 있도록 자체 방어력도 충분하고 폭격의 정확도도 좋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장거리를 비행하면 당시 전투기로는 호위가 곤란하므로 웬만한 적의 요격도 막아낼 만큼 튼튼히 제작되어야 하고 더불어 자위를 위한 충분한 무장도 갖추어야 했다. 또한 여러 차례의 출격은 생존 확률을 떨어뜨리므로 최소 출격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도록 폭격의 정밀도도 좋아야 했다. 마침 미국에는 특급 비밀로 취급하던 노던 조준기(Norden Bombsight)가 있었다.
한마디로 B-17은 공격용 무기였다. 그 동안 군 일각에서 꾸준히 주장되던 적 후방의 핵심 시설을 타격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는 전략 폭격의 수단을 확보하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미 육군은 예산 칼자루를 쥐고 있는 의회를 설득하기 위해 표면적으로 새로운 폭격기는 적 함대를 막아내는 해안 요새 같은 방어용 무기라고 주장하였다. 별명인 ‘플라잉 포트리스’도 이와 관련이 많다.
차세대 중폭격기 후보로 보잉사가 제안한 모델 299 |
총 13기의 Y1B-17가 제작되어 각종 시험에 나섰다 | |
명분과 달랐던 실제 목적
1935년 보잉(Boing)사가 제출한 4발의 모델 299가 군이 제시한 모든 조건을 능가하는 좋은 성적을 보였고 Y1B-17이라는 이름으로 13기의 시험용 기체가 생산되었다. ‘4발의 중폭격기는 둔해서 전투기의 밥이 되기 적합하다’는 당시의 상식을 뒤엎을 만큼 속도도 빨랐고 방어력 및 자체 무장도 훌륭하였다. 하지만 너무 비싼 가격 때문에 발주가 늦어지다가 전운이 감돌던 1939년 B-17이라는 제식명을 부여 받고 양산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B-17은 전쟁사에 곧바로 이름을 올렸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을 급습하며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바로 그날 귀환하던 비무장의 B-17 편대가 적기의 공격이 난무하는 불타는 히컴(Hickam) 비행장에 착륙하다가 일부 피폭 당하기도 하였다. 이후 전쟁의 향방을 바꾼 미드웨이 해전에도 일본 항공모함을 공격하기 위해 B-17이 등장하였다. 그런데 그 동안 적 함대를 공격하기 위해 B-17을 개발하였다는 그럴듯한 주장과 달리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전쟁 전인 1938년 예산 확보를 위해 이탈리아의 여객선 렉스(Rex)를 가상 요격하는 시범을 선보이기도 하였지만 정작 실전에서는 고속으로 기동하는 적함을 고공 수평 폭격으로 타격할 수 없었다. 실제로 하늘에서 적함을 공격하는 수단은 급강하폭격기와 뇌격기들이었다. 결론적으로 B-17은 개발 과정 중에 해군의 반발을 불러 올 정도로 대 해상저지용 무기라고 선전하였지만 실제 목적은 그것이 아니었다는 뜻이었다.
비교적 초기 양산형인 B-17 E형 |
유럽의 하늘을 지배하다
B-17의 전설을 만든 진정한 무대는 유럽이었다. 영국으로 전개를 마친 미 육군항공대(USAAF) 소속의 B-17편대가 1943년 1월 빌헬름스하펜(Wilhelmshaven)의 공습을 시작으로 전쟁을 끝내기 위한 거대한 전략 폭격 작전을 시작했다. B-17보다 폭장량과 항속거리가 더 좋았던 B-24와 영국 공군의 랭커스터(Avro Lancaster)도 전쟁 말기 유럽 상공을 수놓았지만 그 중에서도 주역은 단연코 B-17이었다.
방어력이 취약한 B-24나 피격우려 때문에 야간에만 작전을 펼친 랭커스터와 달리 하늘을 가릴 듯 한 거대 편대를 이루어 작전을 펼친 B-17은 벌건 대낮에 독일 중심부의 주요 전략거점을 차근차근 짓밟아 전쟁을 연합군의 승리로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론적으로 13문의 M2로 중무장한 B-17이 밀집대형으로 비행하며 자위를 위한 화망을 구성하면 독일의 요격기가 침투하기는 불가능할 것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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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 B-17의 화망을 피해 공격하는 방법을 표시한 독일공군 교육자료<출처: (cc) Das Bundesarchiv> 2 Me-262의 요격으로 주익이 분리되어 추락하는 B-17 | |
영원히 기록될 전설
그러나 [멤피스 벨 Memphis Belle]이나 [정오의 출격 12 O'clock High](원래는 ‘12시 상공에 적기’라는 뜻)같은 영화에서 알 수 있듯이, 폭격 임무가 결코 수월한 것은 아니었다. 1943년 10월 14일에 있었던 슈바인푸르트(Schwinfurt) 공습에서 독일이 생산하던 베어링 생산 능력의 60퍼센트를 하루아침에 사라지게 만드는 전과를 기록하였지만 작전에 투입한 291기 중 60기가 격추되는 참혹한 대가를 얻어야 했다.
종전까지 독일의 필사적인 요격에 수많은 B-17과 승무원들이 불타 사라져 갔다. 중폭격기임에도 무려 13,000여기가 생산된 것도 대단하지만 그 중 30퍼센트가 넘는 5,000여기가 작전 중 추락이나 격추를 당하였다는 것은 B-17이 얼마나 위험한 임무에 투입되었는지 알려주는 결과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위험을 무릅쓰고 65만 톤의 폭탄을 쏟아 부어 독일의 전쟁 의지를 꺾어버린 B-17은 가히 항공 전사의 전설이라 할 것이다.
64회 작전에 투입되었음을 기록한 리버티 벨(Liberty Belle)의 노즈아트 <출처: (cc) Edjz at Wikipedia.org> |
제원(B-17G 기준) 길이: 22.66m/ 전폭: 31.62m/ 높이: 5.82m/ 최대이륙중량: 29,700kg/ 최대속도: 462km/h / 항속거리: 3,219km(2,700kg 폭장시) / 실용상승한도: 10.850m/ 무장: 12.7mm M2 중기관총 13문, 최대 폭장량 7,800kg
글 / 남도현[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자료제공 / 유용원의 군사세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