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부활제 서곡"은 "스페인 기상곡", "세헤라자드"와 함께 림스키-코르샤코프의 관현악의 걸작으로 작곡 연대도 앞의 것들과 거의 같은 무렵이며 그의 관현악법이 원숙한 시기에 속한다. 원제는 "일요일 서곡 찬란한 축일"이었으나, 러시아에서는 부활제를 "찬란한 축일"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러시아 부활제 서곡" 이라고 부르고 있다.
곡은 러시아 정교회의 성가집 "오비호드"(Obichod) 가운데의 몇 가지 가락을 바탕으로 했으며, 작곡자는 자서전에서 "수난의 토요일" 저녁 무렵의 음울하고 신비스러운 기분에서 부활절인 일요일 아침의 한껏 즐거운 안식의 기분으로 옮겨 가는 과정이라고 말하고 있다.
Nikolai Andreyevich Rimsky-Korsakov (1844~1908)
러시아의 작곡가 · 사회운동가. 노브고로드 출생. 유년시절부터 음악적 재질을 보였으나, 정식 음악교육은 받지 않고 1856년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졸업 후 해군사관이 되었다. 이 무렵 발라키레프와 사귐으로써 5인조의 한 멤버가 되었으며, 그때부터 작곡지도도 받았다. 71년 페테르부르크음악원 교수로 초빙되고 또 해군군악대의 지휘자로서 내외의 명곡을 편곡하는 한편 궁정성가대 지휘자도 지냈다.
81년 무소르크스키가 사망하여 5인조가 해산되자, 악보 출판업자인 벨라예프의 도움으로 "벨라예프그룹"을 결성, 후진인 글라즈노프, 리아도프 등을 지도하였다. 1905년 "피의 일요일" 사건이 계기가 된 혁명 소동 때는, 스트라이크를 일으킨 학생측에 서서 학원에의 권력 개입을 거절한 탓으로 페테르부르크의 교수직에서 쫓겨났으며, 그의 작품은 연주 금지 처분을 당했다. 그 후 복직이 되었으나 퇴직하고, 심장병으로 급서할 때까지 자택에서 작곡과 후진 양성에 힘썼다.
1874년 경에 러시아 민요 수집, 편곡에 열의를 나타내어 국민주의에 대한 접근을 나타내는 한편 실내악과 푸가를 포함하는 피아노곡의 작곡 등을 통해 전통적 수법을 소화하는 데애도 의욕울 보였다.
그의 작풍은 대체로 색채적이고 묘사적이며 명쾌하고 이해하기 쉬운 화성적인 표현에 차 있다. 관현악의 묘사성 등은 러시아의 오페라, 표제 교향시, 가곡 분야에 큰 영향을 끼치고, 라벨, 레스피기 등 근대 작곡가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제자인 스트라빈스키나 프로코키예프 등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주요 작품에는 《스페인 기상곡》, 《세헤라자데》와 같은 표제음악과, 《사드코》, 《백설공주》, 《금계(金鷄)》등의 오페라가 많으며, 이들의 소재로는 러시아의 민요와 권력에 대한 저항, 그리고 이교적인 세계를 다룬 것이 대부분이다. 이 밖에 합창곡 · 가곡 · 피아노곡 · 관현악곡 등도 많다. 저서에는 《러시아민요 100곡》, 《화성학 실습》, 《관현악법 원리》, 자서전인 《나의 음악 연지(年誌)》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