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들

나의 사랑, 빈센트! Van Gogh !

바래미나 2012. 3. 11. 05:32

하늘 새님의 나의 사랑, 빈센트! Van Gogh


 

 

 

 

 

 

 

Vincent Van Gogh

Dutch(Hollander) Painter     Post Impressionism

1853. 3.30 ~ 1890. 7. 27

 

 

 

 

 

La nuit etoilee, Arles <Starry Night over the Rhone>

Oil on canvas 1888. 9

92 x 72.5 cm

Musée d'Orsay Paris France

 

 

테오에게

 

 

“나는 지금 아를의 강변에 앉아 있네.

맑은 강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네.

 

별들은 알 수 없는 매혹으로 빛나고 있지만

저 맑음 속에 얼마나 많은 고통을 숨기고 있는 건지...

두 男女가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고 있다네.

이 강변에 앉을 때마다 목 밑까지 출렁이는 별빛의 흐름을 느낀다네.

나를 꿈꾸게 만든 것은 저 별빛이었을까....

별이 빛나는 밤에 캔버스는 초라한 돛단배처럼 어딘가로 나를 태워 갈 것 같기도 하네.

테오, 내가 계속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타라스콩에 가려면 기차를 타야 하듯이 별들의 세계로 가기 위해서는

 죽음의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네.

 

 

흔들리는 기차에서도 별은 빛나고 있었다네.

흔들리듯 가라앉듯 자꾸만 강물 쪽으로 무언가 빨려 들어가고 있네.

강변의 가로등, 고통스러운 것들은 저마다 빛을 뿜어내고 있다네.

심장처럼 파닥거리는 별빛을 자네에게 보여주고 싶네.

나는 노란색의 집으로 가서 숨죽여야 할 테지만....

별빛은 계속 빛날 테지만. 캔버스에서 별빛 터지는 소리가 들리네.

테오, 나의 영혼이 물감처럼 하늘로 번져갈 수 있을까?

트왈라잇 블루, 푸른 대기를 뚫고 별 하나가 또 나오고 있네... ”

-1888년 6월-

 

 

아를(Arles)에 도착해서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

 

 

 

 

 

Wheat Field with Cypresses

Oil on canvas 1889

93.4 x 73 cm

Metropolitan Museum of Art Manhattan New York USA

 

 

“사이프러스나무들은 항상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것을 소재로 '해바라기' 같은 그림을 그리고 싶다.

사이프러스 나무를 바라보다 보면 이제껏 그것을 다룬 그림이 없다는 사실이 놀라울 정도다.

사이프러스나무들은 푸른색을 배경으로, 아니 푸른색 속에서 봐야만 한다.”

-1889. 6.25-

 

 

사이프러스 나무는 고흐의 희망의 상징과도 같았다.

 

 

“네가 품고 있는 자연에 대한 애정을 잘 간직하렴.

그것만이 예술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란다.

화가는 자연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람이며

'자연을 볼 수 있게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는' 사람이지.“

-1874년 1월-

 

 

 

 

 

A Girl in White in the Woods

Oil on canvas 1882

Kroller-Muller Museum Netherlands

 

 

숲에서 습작한 다른 그림은, 마른 나뭇잎이 널려 있는 땅 위에 우뚝 솟은

커다란 초록의 너도밤나무

줄기와 흰옷을 입은 작은 소녀의 모습을 담고 있어.

이걸 그릴 때 아주 어려웠던 점은,

일정하지 않은 거리를 두고 있는 나무줄기 사이에 적절한 공간을 주면서,

원근법에 따라 변하는 줄기의 형태와 굵기를 그려내는 동시에 그림을 밝게 하는 일이었다.

한마디로 우리가 숲에서 숨쉬고, 걸어 다니고,

나무 냄새를 맡고 있는 느낌이 들도록 그리기가 어려웠다는 말이다.”

-1882. 8. 20-

 

 

반 고흐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던 초기의 그림이다.

 

“그 어떤 어려움도, 근심거리나 장애물도 없는 상태로 자신을 방치해서는 안돼.

너무 쉽게 살지 않도록 노력해야 해.

교양 있는 계층에 속해있고 훌륭한 지인들이 많고 또 가장 좋은 환경에서 살고 있다 해도

로빈슨 크루소 같은 자연인의 본성을 어느 정도 간직하고 있어야 해.

그것이 없다면 자신을 지탱해 줄 수 있는 뿌리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영혼의 불꽃이 꺼지지 않고 계속 타오를 수 있도록 해야 해.”

-1878년 4월 3일-

 

 

반 고흐는 25살의 젊은 나이임에도 삶에 대한 진지한 통찰과 끊임없는 노력이

언제나 그의 가슴 속에 불꽃처럼 살아있는 성실한 청년이었다.

 

 

 

 

 

Sower with Setting Sun (After Millet)

Oil on canvas June 1888

Rijksmuseum Kröller-Müller Otterlo Netherlands

 

 

베르나르에게

 

 

“ <씨 뿌리는 사람>의 스케치를 보내네.

흙은 온통 파헤쳐진 넓은 밭은 선명한 보랏빛을 띠고 있네.

잘 익은 보리밭은 양홍 빛을 띤 황토색이고 하늘은 황색 1호와 2호를 섞어 칠했는데,

흰색이 약간 섞인 황색1호 물감으로 색칠한 태양만큼이나 환하네.

그래서 그림 전체가 주로 노란색 계열이라네.

<씨 뿌리는 사람>의 상의는 파란색이고 바지는 흰색이네.”

-1888. 6. 18-

 

 

그가 존경하던 밀레의 모작이다.

 

 

“노력은 존중받을 가치가 있고, 절망에서 출발하지 않고도 성공에 이를 수 있다.

실패를 거듭한다 해도, 퇴보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해도,

일이 애초에 의도한 것과는 다르게 돌아간다 해도, 다시 기운을 내고 용기를 내야한다.”

 

 

 

 

 

Café Terrace at Night

Oil on canvas September 1888

Rijksmuseum Kröller-Müller Otterlo Netherlands

 

 

“이번 주에 그린 두 번째 그림은 바깥에서 바라본 어떤 카페의 정경이야.

푸른 밤, 카페 테라스의 커다란 가스등이 불을 밝히고 있는데

그 위로는 별이 빛나는 파란 하늘이 보여.

바로 이곳에서 밤을 그리는 것은 나를 매우 설레게 하지.

아름다운 파란색과 보라색, 초록색만을 사용했고

밤을 배경으로 빛나는 광장은 밝은 노란색으로 그렸단다.

특히 이 밤하늘에 별을 찍어 넣는 순간이 정말 즐거웠어.”

-1888. 9-

 

여동생에게 쓴 편지이다.

 

짙은 파란 색과 밝은 노란색의 강렬한 색책대비의 그림으로

반 고흐는 독자적인 색체 사용과 개성적인 형태를 통해 자신이 사랑했던 것들과

그의 격정적인 내면세계를 가장 적출하게 드러내는 것 같다.

찬란한 색채대비가 눈이 부신 설레임으로 닥아 온다.

 

 

 

 

 

Park with a Couple and a Blue Fir Tree

Oil on canvas October 1888

Private collection

 

 

“나는 늘 두 가지 생각 중 하나에 사로잡혀 있다.

하나는 물질적인 어려움에 대한 생각이고, 다른 하나는 색에 대한 탐구다.

색채를 통해서 무언가 보여줄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서로 보완해 주는 두 가지 색을 결합하여 연인의 사랑을 보여주는 일, 그 색을 혼합하거나 대조를 이루어서

마음의 신비로운 떨림을 표현하는 일,

얼굴을 어두운 배경에 대비되는 밝은 톤의 광채로 빛나게 해서 어떤 사상을 표현하는 일,

별을 그려서 희망을 표현하는 일, 석양을 통해 어떤 사람의 열정을 표현하는 일,

이런 건 결코 눈속임이라 할 수 없다. 실제로 존재하는 걸 표현하는 것이니까. 그렇지 않니?”

 

 

 

 

 

Amandelbloesem

Saint-Rémy

Oil on canvas 1890

73.5 x 92 cm

Van Gogh Museum Amsterdam

 

 

사랑하는 어머니께

 

 

“사실 전 태어난 조카(테오의 아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르기를 무척 원했답니다.

요즘 아버지 생각을 많이 하고 있거든요.

하지만 이미 제 이름을 땄다고 하니, 그 애를 위해 침실에 걸 수 있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하얀 아몬드 꽃이 만발한 커다란 나뭇가지 그림이랍니다.”

 

-1890. 2.15. 빈센트 올림-

 

 

‘빈센트’라는 같은 이름으로 인해 불우한 자기 삶을 닮을까 우려하는 마음이기에

어린 조카의 앞날을 막고 싶지 않았던 삼촌으로서,

사랑하는 조카를 위해 그린 그림으로 드물게 포근하고 따뜻하고 화사한 느낌이다.

 

테오의 부인 요한나는 단 5일밖에 만나지 못했던 아주버니를 존경하고,

그 존경심으로 첫째 아들의 이름을 <빈센트>라고 지으며

반 고흐에게 그 누구보다도 다정하게 존재하고 있다.

또한 그녀는 반 고흐의 그림을 가장 잘 이해한 여자이기도 했다.

 

 

반 고흐가 사망한 뒤, 이어서 결혼 한지 1년 반 밖에 살지 못하고 남편 테오도 사망했는데,

그 이듬해인 1901년 화가와 재혼하여 미국으로 이민 갔지만

고흐의 편지를 편집하고 번역하거나 그의 작품들을 관리하고 전시회를 개최하는 등,

오늘 날의 고흐가 있게 된 것은 전적으로 그녀의 덕이다.

고흐가 죽은 지 채 10년이 안 되어

그를 위대한 천재의 반열에 올려놓고 1925년 사망하였다.

그래서 이렇게 반 고흐의 작품은 우리 곁에 남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고흐의 이름을 딴 요한나의 아들이자 고흐의 조카이기도 한 빈센트 빌헤름 반 고흐는

빈센트 사후 빈센트의 천재성을 널리 입증하고 1978년 사망했다.

 

 

 

 

 

Noon Rest (After Millet)

Saint-Rémy

Oil on canvas January 1890

Musée d'Orsay Paris France

 

 

“바로 그거다. 밀레의 그림 ‘만종’ 너무나 훌륭하다. 그것은 詩다.”

-1874년 1월-

 

 

이 평화스러운 이미지의 작품은

고흐가 밀레의 그림을 모방한 다섯 점의 커다란 작품 중 하나다.

열심히 땀 흘려 쌓아올린 낟가리의 그림자 밑에서

휴식을 취하는 부부와 어우러진 햇살이 마냥 따사롭다.

남자는 신발을 벗어놓고 있는데 신발은 고흐에게 삶 전체에 걸친 진정하고

건강한 발전의 상징이며, 나란히 놓인 두개의 낫은 부부의 다정함을 그대로 보여 준다.

 

 

수많은 방향으로 퍼져나가는 붓질은 보통 격정을 암시하거나

후광의 효과를 만들 때 사용되었지만,

이 그림에서는 긴장된 삶으로부터의 자유를 표현하기 위해 눈부실 정도로 다채롭게 표현되었다.

건강한 노동...사랑..행복, 시적인 아름다움이 넘치는 대작이다.

 

 

“더 우월적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냐 하면…

살아가는 내내 노력과 일의 흔적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이다”

-1889. 5-

 

 

 

 

 

The Potato-Eaters

Oil on canvas 1885

Rijksmuseum Vincent van Gogh Amsterdam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등잔불 밑에서 감자를 먹는 이 사람들이

접시에 가져가는 바로 그 손으로 감자를 수확했다는 사실이다.

이 그림은 육체노동에 대해,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정직하게 음식을 벌었는가에 대해 말한다."

 

 

이것은 고흐의 그림 중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

고흐가 ‘회화’라고 인정한 첫 작품이기도 하다.

고흐는 이 그림을 “살아서 호흡하는 최고의 작품”이라고까지 묘사했다.

 

 

“우리들 문명화된 인간과는 전혀 다른 생활 방법이 있다는 인상을 주고 싶었다.

따라서 누구나 다 갑자기 이 그림을 좋아해주기 바란다든가

칭찬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나는 귀부인 같은 사람보다도 소박한 모습 그대로의 농민의 딸이 훨씬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먼지투성이이고 발기발기 기운 흔적 투성이인 푸른 치마를 입은 농민의 딸이…

이런 그림은 도시인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리라. …

농민의 생활을 그린다는 것은 진지한 일이다.

예술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인생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진실한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그림들 그리고자 하지 않는다면

 나는 나 자신을 책망하지 않을 수 없다.”

-1885년 4월 30일-

 

 

그는 가난한 삶과 등골이 휘는 노동을 가능한 한 사실적으로 묘사하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목적 때문에 어두운 암갈색과 흙색을 많이 사용했다.

 

 

명망 있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당시 유행하던 인도주의의 영향을 받아 목사의 길을 선택했다.

근엄한 성직자라기보다는 온 몸으로 하나가 되고 싶어 했던 고흐와의 괴리로

결국 부목사 직에서 파면된다.

항상 종교가 제도화되고 기득 세력이 될 때 생길 수 있는 그늘진 어둠을 받아들일 수 없는

그의 과격한 결벽성으로 결국 목사의 길을 포기했으나,

인도주의의 복음은 포기할 수 없어 벨기에 인근의 탄광촌에서 평신도 선교사의 삶을 시작한다.

그에게 있어 조용하고도 차분한 성서와의 삶을 살았기도 한 시기이기도 했다.

 

 

어느 문화권에서도 비슷하듯 언제나 생명의 위협 속에 지하 생활을 해야 하는 광부의 삶은

인생 막바지에서 선택되는 길인데,

그는 이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외적으로 보기에 비참하기 짝이 없는 이들의 삶에서

성서적인 생기와 감동을 받게 된다.

하느님만을 따르며 정직한 삶을 우직하게 살아가는 광부들의 삶에서

숭엄한 기품과 행복을 발견하고 이것을 작품으로 세상에 전하고자 한 것이다.

반 고흐는 이 작품을 통해 가난은 비참이요 인생의 실패로 여겨지는 세상 안에서

정직한 삶의 밝은 표현으로서의 가난의 긍정적인 모습과

건실한 삶을 살아가는 노동계급의 떳떳하고 당당한 삶을 그리고 있다.

등잔불아래 모여 앉은 풍경이 어떤 부자의 풍요로운 식탁 못지않게

따스한 인간미의 포근함을 느끼게 한다.

 

 

반 고흐는 이런 풍의 작품을 통해 행복한 가난의 메시지를 힘차게 외쳤으나

아무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이 빈 메아리가 되어 돌아올 뿐이었다.

 

 

 

 

 

Cottages with Thatched Roofs

Auvers-sur-Oise

Oil on canvas June 1890

Musée d'Orsay Paris France

 

 

“이곳은 진짜 시골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파리에서 충분히 떨어져 있단다.

물론 도비니의 풍경화에서 보는 시골과는 많이 다르지만 말이야.

그래도 더 나빠졌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초가든 새로 생긴 현대식 주거 지역이든

모두 밝은 햇빛으로 환하게 빛나고 또 꽃으로 가득 덮여 있거든.”

-1890년 5월-

 

 

생 레미 병원에서 나와 오베르 쉬르 우아즈(Auvers-sur-Oise)로 와서 초기에 쓴 편지로

잠시 정서적으로 안정을 되찾은 시기이다.

 

 

 

 

 

Iries

Oil on canvas 1890

92 x 73.5 cm

Rijksmuseum Vincent van Gogh Amsterdam the Netherlands

 

 

반 고흐가 1888년부터 몰두했던 주제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붓꽃이 불안한 영혼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해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해석했다.

생 레미 정신병원에 입원하면서부터 정원의 화단에 핀 붓꽃을 흥미롭게 관찰하였고

이를 관념적으로 추출하여 캔바스 위에 되살렸다.

 

 

‘이곳에 있는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한 편의 시라고 해도 좋을 것 같구나.”

"지금은 모든 일이 잘 진행되고 있단다.

끔찍했던 발작도 폭풍이 지나간 것처럼 사라졌고 말이야.

난 이곳에서 차분한 열정을 가지고 꾸준히 마지막 붓 터치를 다듬으며 지내고 있어.

녹색 배경에 장미가 있는 그림을 하나 그렸고

커다란 보라색 붓꽃 다발이 있는 그림을 두 점 그렸어.

바탕을 분홍색으로 칠한 그림은 녹색과 분홍색, 보라색의 조합으로

부드러운 조화를 느낄 수 있지.”

 

 

눈이 부실정도로 레몬 빛의 노란색 배경은

순수한 감청색과 양홍색이 섞인 보라색의 붓꽃을 한층 돋보이게 한다.

1987년 뉴욕에서 동시대 회화 중 최고가에 판매되어 센세이션을 일으킨 것으로 유명하다.

 

 

 

 

 

Autumn Landscape with Four Trees

Oil on canvas November 1885

Rijksmuseum Kröller-Müller Otterlo Netherlands

 

 

고흐가 테오에게 보내 편지 중 하나에 이런 말이 남아 있다.

 

 

‘아름다운 것에 가능한 한 많이 감탄하렴. 사람들은 아름다운

것에 충분히 감탄하지 못하고 있어.’

 

 

건강하지 못한 몸과 마음,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이처럼 진실과 정직과 아름다움을 쫒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또한 삶을 탐구하고자 수많은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스스로 부족하다고 여겼기에 다름 화가들의 그림을 관찰하고, 분석하며, 열심히 공부도 했다.

무엇보다 그는 두 발로 직접 걸으며 세상을 보았다.

세상을 걸으며 아름다운 풍경에 감동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보며 슬퍼했다.

그래서 그의 그림과 글에는 권위 의식도, 가식적이거나, 어떤 유파의 냄새도 없다.

이것이 반 고흐의 내면이다.

 

 

 

 

 

Harvest

Oil on canvas June 1888

73 x 92 cm

Vincent van Gogh Foundation Rijksmuseum Vincent van Gogh Amsterdam the Netherlands

 

 

고흐가 파리라는 대도시의 생활에 싫증을 느껴 1888년 2월

보다 밝은 태양을 찾아서 프랑스 아를로 이주한 후에 그린 그림이다.

아를로 이주한 뒤부터 죽을 때까지의 약 2년 반이야말로 고흐 예술의 참다운 개화기였다.

 

 

“산책을 자주 하고 자연을 사랑했으면 좋겠다. 그것이 예술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이다.

화가는 자연을 이해하고 사랑하여,

평범한 사람들이 자연을 더 잘 볼 수 있도록 가르쳐주는 사람이다.”

 

 

“나는 최고의 걸작이란 마음에서 우러나는 대로 자유롭게 그린 그림이라고 믿고 있지만

그래도 ‘자연에 대해서는 아무리 많이, 아무리 열심히 연구해도 충분하지 않다’

라는 말을 덧붙이지 않을 수 없구나.

가장 뛰어난 상상력은, 동시에 그러한 상상력을 가능하게 하는 과정은 말이야,

사람을 바보로 만들 만큼 솔직한 모습의 자연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란다.”

-1885년 10월-

 

 

 

 

 

A Pair of Shoes Paris 2nd half

Oil on canvas 1886

45 x 37.5 cm

Van Gogh Museum Amsterdam

 

 

노동자들이 신는 구두를 그린 이 그림은 100킬로미터도 넘는 먼 거리를 걸었던

고흐 자신의 경험이 반영되어 있는 작품이다.

반 고흐는 자신이 좋아했던 화가 쥘 부르통을 만나고 싶어 120킬로미터 가량을 걸어서

그의 집 앞까지 갔으나 용기가 나지 않아 문도 두드려 보지 못하고 돌아온 적이 있다.

이 그림에는 고되게 노력했으나 보람 없는, 삶의 비통함이 배어 있다.

 

 

“나는 가난할 테고, 그림을 계속 그릴 것이며, 한 사람의 인간, 자연인이 될 것이야.

자연에 등을 돌린 인간, 끊임없이 어떤 지위나 걱정하며 자연에서 멀리 떨어진 인간은

오! 결국 뭐가 희고 뭐가 검은지 분간조차 못하게 될 것이야.

이런 이들은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자신이 믿는 바가 무엇인지

확실히 아는 사람들과 정반대 편에 서 있어. ”

-1883년-

 

 

 

 

 

Olive Orchard

Saint-Rémy

Oil on canvas 1889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New York USA

 

 

“그림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하여야 잘 그릴 수 있을까?

그건 우리가 느끼는 것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사이에 서 있는

 보이지 않는 철벽을 뚫는 것과 같다”

 

 

인내심과 분명한 의지를 가지고 순간적으로 포착한 인상을

그림으로 표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했던 고흐다.

 

 

"흔들림 없이 감정과 완전히 일체를 이루는 붓놀림을 구사하는 것은

감정을 실어 음악을 연주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야."

-1888년 9월-

 

 

 

 

 

Sorrow

drawing 1882

 

 

“그녀도 나도 불행한 사람이지.

그래서 함께 지내면서 서로의 짐을 나누어지고 있다.

그게 바로 불행을 행복으로 바꿔주고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을 만하게 해 주는 힘이 아니겠니...?”

 

 

이 작품의 모델은 남자한테 버림받은 여자,

5세의 딸과 자신의 생계를 위해 창녀가 된 Clasina Maria Hoornik

일명 시앤이라는 3살 위의 여인이다.

고흐가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며 그녀를 돌보던 시절에 완성한 것이다.

단순하지만 힘찬 데생으로 묘사된 여인의 모습에서 가슴 저린 슬픔이

호소력 있게 전달되고 있다.

 

 

“그녀에게 특별한 것은 없다. 그저 평범한 여자거든.

그렇게 평범한 사람이 숭고하게 보인다.

평범한 여자를 사랑하고 또 그녀에게 사랑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인생이 아무리 어둡다 해도...”

-1882년 1월-

 

 

“너는 나에게 돈을 줄 수는 있어도 아내와 아이를 줄 수는 없다.”

 

고 테오에게 편지했듯이 시엔과의 동거는 고흐가

뭔가 결정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 즉 홀로서기의 시작이다.

부모의 반대로 결혼은 하지 못했지만

그녀의 아이를 사랑하며 그녀를 만날 때 임신 중이었던 그녀를 출산까지 도와줬고

그녀를 모델로 그리면서 행복했었을 고흐.

 

 

하지만....

그해, 시엔은 7월에 아들 윌렘을 낳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반 고흐의 아버지는 아들이 그녀와 아이들을 만나는 것을 막았다.

 

 

반 고흐는 약 3주간 성병으로 병원에 입원했고 그해 여름 처음으로 유화로 그림을 그렸다.

시엔과는 약 1년 넘게 같이 생활했지만 1883년 가을에 헤어졌다.

다른 곳으로 이사하려고 생각했으나, 시엔은 어려운 살림으로 인해

다시 창녀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시엔의 딸은 그녀의 어머니에게, 아들은 그녀의 남동생에게 각각 맡겨졌다.

후에 아들 윌렘이 12살이 되어 어머니 시엔을 방문했을 때, 시엔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윌렘의 아버지는 20년 전 만났던 화가이며 이름은 반 고흐다.”

 

 

 

 

 

The Starry Night

Saint-Rémy

Oil on canvas June 1889

73.7 x92.1 cm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NY USA

 

 

빈센트 반 고흐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것으로

그가 고갱과 다툰 뒤 자신의 귀를 자른 이후 생 레미의 요양원에 있을 때 그린 것이다.

고흐에게 밤하늘은 무한함을 표현하는 대상이었다.

 

 

“오늘 아침 나는 해가 한참 뜨기 전에 창문을 통해 아무것도 없고

아주 커 보이는 샛별 밖에 없는 시골을 보았다.”

 

 

그가 그린 밤하늘에서는 구름과 대기, 별빛과 달빛이 폭발하듯 눈부시다.

구름이 소용돌이치며 떠있고 달과 별은 그 빛으로 부옇게 무리 져서 광채를 더욱 발한다.

휘몰리듯 그려진 짙푸른 밤하늘은 굽이치는 두꺼운 붓놀림으로

전면에는 반 고흐가 좋아했던 거대한 사이프러스 나무가

반 고흐 자신의 인용인 “오래된 숲의 선들처럼 비틀린 선”처럼 하늘을 향해 불타오르며

잠자듯 교회가 있는 수평을 이룬 작은 마을은

‘깊은 시간’의 존재를 드러내며 평화롭게 고요하고...

살아있듯 꿈틀대는 화려한 소용돌이의 춤 같은 장대한 밤의 시는

자연의 경이로움에 대한 찬사가 그대로 담겨 있다.

 

 

“지도에서 도시나 마을을 가리키는 검은 점을 보면 꿈을 꾸게 되는 것처럼,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은 늘 나를 꿈꾸게 한다.

그럴 때 묻곤 하지.

왜 프랑스 지도 위에 표시된 검은 점에게 가듯 창공에서 반짝이는 저 별에게 갈 수 없는 것일까?”

-1888. 6-

 

 

 

 

 

Drawbridge with Carriage

Oil on canvas March 1888

Rijksmuseum Kröller-Mülle Otterlo Netherlands

 

 

반 고흐의 사랑

 

 

빈센트의 애정관은 어머니의 사랑을 대체하려는 무의식적인 열망이라 할 수 있다.

죽은 형에 대한 슬픔에 잠겨 빈센트를 외면한 어머니와

엄격하고 권위적인 목사였던 아버지와의 불화 속에서

이름까지 물려받은 ‘죽은 형의 대체된 아이’로 불운하게 태어난 고흐이기에

어머니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한 빈센트의 마음속에는

완벽한 사랑에 대한 강박과 안락한 가정에 대한 갈망이 자리 잡게 되었다.

어머니 사랑을 대신해 어머니와 비슷한 존재를 갈망하게 되고,

슬픔에 잠겨 있거나 고통 받는 여인들에게 이끌렸던 반 고흐의 사랑은

대체로 극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늘 사랑을 갈망했지만, 그는 사랑을 이루지 못했다.

사랑에 서툰 그의 일방적인 마음이 원인이 되기도 했고, 이루어 질 수 없는 상실,

변해버린 마음 등 늘 안정을 찾아, 사랑을 찾아 헤맸지만 이루지 못한다.

 

 

런던에서 아트 딜러 구필의 구필 앤 씨(Goupil & Cie) 화랑에서 화상으로 근무할 때,

하숙집 딸인 위젠(Eugenie Loyer)의 사랑도,

위젠이 다른 사람과의 약혼으로 거절당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시련이요 아픔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절망하며 자신을 고립하기 시작했다.

 

 

 

 

 

Haystack in Rainy Day

Oil on canvas 1890

Rijksmuseum Kröller-Müller Otterlo Netherlands

 

 

Kee와의 사랑

 

 

1881년 4월, 얼마 전 과부가 된 사촌 케이 보스 스트릭커(Kee Vos-Stricker)와

많은 시간을 함께 하였는데 그녀는 반 고흐보다 7살이 많았고, 8살 된 아들이 있었다.

예술가에게 따뜻하게 대해주는

반 고흐 어머니의 언니 요하네스 스트릭커(Johannes Stricker)의 딸이었다.

 

그녀에게 프러포즈했으나 그녀는

“아니, 절대로, 절대로 Nooit, nooit, nimmer”라는 말로 거절하였다고 한다.

이후 그녀를 만나기 위해 편지를 쓰고, 그녀의 아버지를 만났지만 모두 허사였다.

그녀를 죽은 남편의 추억에서 구해 가정을 이루겠다는 열망으로,

빈센트는 그녀의 의사에 관계없이 무모하다 싶을 정도의 애정을 퍼부었고,

그는 램프의 불에 왼손을 갖다 대고 손바닥을 지지면서까지

다시 그녀를 만나게 해달라고 필사적으로 매달리다가 정신을 잃고 말았다.

 

 

“위젠도, 케이(Kee)도, 아버지 도, 친척들도 모두 날 버리고

이제 하느님을 위해 내 몫은 그림만이 남았다.”

“십자가의 그리스도처럼 하느님께서는 왜 날 버리시는가? 신은 없다.”

-1882년 5월 14일-

 

 

고흐가 미쳤다는 소문이 돌았다.

 

 

 

 

 

Majolica Jar with Branches of Oleander

Oil on canvas August 1888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USA

 

 

마르호트와의 사랑

 

 

1884년 가을, 반 고흐보다 12살이나 많은 이웃집 딸인 마르호트 베게만(Margot Begemann)은

종종 그가 그림 그리는 곳을 따라다녔다. 그녀는 반 고흐를 사랑했다.

열정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녀에게 보답하기 위해 반 고흐는 결혼을 결심한다.

그러나 두 집안의 반대로 결혼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마르호트는 약물 과다복용으로 자살을 시도했다가 병원으로 옮겨져 겨우 목숨을 구하게 된다.

 

 

반 고흐가 사귄 여자 중 비교적 참한 여성이었던 마르호트는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하여 빈센트를 배신했음에도

반 고흐는 아이 아버지라는 부당한 비난을 받아야했다.

이 사건 이후로 1885년 3월에는 아버지가 심장 발작으로 죽었다.

그는 큰 상실감에 빠지게 된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주로 이루어지기 힘들거나 서로 어울리지 않는 연애를 계속하고 있다.

그리고 대체로 수치와 망신을 당한 채 끝나 버리고 말지.”

 

 

그 후에도 <감자먹는 사람들> 속의 인물 17살의 스틴,

탕부랭 식당 여주인 세카토리,

마지막 사랑인 가셰 박사의 딸 마르그리트까지.....

 

 

많은 사람과 사랑을 꿈꾸고, 부분적으로 기쁨을 느끼긴 했지만,

꾸준한 사랑을 얻지 못하고 사랑을 찾아 헤매는 고흐였다.

고흐는 사랑 없이는 살 수 없고, 사랑이 곧 예술의 원천이라 믿었다.

 

 

“여자는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는 한 늙지 않는다.”

1874년 7월 31일 런던에서, 테오에게

사랑을 꿈꾸는 그가 동생에게 쓴 편지 의 일부다.

 

 

"사랑이란 거미줄처럼 약하단다. 오직 성실함 위에서만 밧줄처럼 강해진다."

거리의 여인 시엔과의 이별 후 테오에게 전한 말이다.

 

 

자신의 안정을 찾을 수 있는 사랑을 갈망하며 모든 사랑에 헌신적이었지만,

그에게 제대로 된 사랑은 없었다.

자기의 상처와 같은 상처가 있는 사람을 사랑하거나,

오로지 짝사랑뿐인 그는 더욱 절망의 늪에 빠진다.

 

 

테오가 부인 요한나에게 보낸 편지 중

“형이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을 찾았더라면 이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을....”

하며 애통해 한 동생이다.

 

 

 

 

 

Peasant Man and Woman Planting Potatoes

Oil on canvas April 1885

Kunsthaus Zürich Zürich Switzerland

 

 

“밀레나 드 그루 같은 화가들이 "더럽다, 저속하다, 추악하다, 악취가 난다" 등등의

빈정거림에 귀를 기우리지 않고 꾸준히 작업하는 모범을 보였는데,

내가 그런 악평에 흔들린다면 치욕이 될 것이다.

농부를 그리려면 자신이 농부인 것처럼 그려야 한다.

농부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똑같이 느끼고 생각하며 그려야 할 것이다. ”

-1885. 4. 30-

 

 

“늙고 가난한 사람들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들을 묘사하기에 적합한 말을 찾을 수가 없다....,

인물 화가들과 거리를 산책하다가 한 사람에게 시선을 주고 있는데

그들은 "아, 저 지저분한 사람들 좀 봐" "저런 류의 인간들이란"하고 말하더구나.

그런 표현을 화가한테서 듣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지.

그래 그런 일이 나를 생각에 잠기게 한다. 그런 장면은 사람들이 가장 진지하고

가장 아름다운 것을 의도적으로 피하는 것이라 느껴졌다.”

 

 

 

 

 

 

Wheatfield with Lark

Oil on canvas 1887

54 x 65.5 cm

Rijksmuseum Vincent van Gogh Amsterdam

 

 

“봄이 되면 종달새는 울지 않을 수 없다.”

 

 

반 고흐가 밀밭을 그린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봄과 같은 온화한 느낌을 준다.

밀 줄기는 아직 푸르고 하늘은 은은한 색조를 띠고 있으며, 날아오르는 종달새는

희망과 같은 새로운 삶의 상징처럼 보인다.

부드러운 봄바람으로 일렁이는 봄날의 밀밭 풍경이 사뭇 따뜻하고 밝다.

 

 

 

 

 

Farmhouse in Provence

Arles

Oil on canvas 1888

The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USA

 

 

“겨울은 눈 속에 깊이 파묻히고, 가을은 낙 엽 속에 파묻히고,

여름은 뜨거운 보리 속에 파묻히고, 봄은 풀 속에 파묻히는 것이야말로 ‘좋은’ 것이야.

여름은 머리 위 하늘과 함께, 겨울은 난로 곁에서,

풀 베는 남자들이나 농가의 처녀들과 함께 있는 것은 정말 ‘좋은’ 것이야.

언제나 그랬고 앞으로도 계속 그러하리라고 느끼는 것은 좋은 것이야.”

-1885년 6월 중순-

 

 

 

 

 

Sower with Setting Sun (After Millet)

Burlap on canvas November 1888

73.5 x 93 cm

Foundation E.G. Bührle collection Zurich Switzerland

 

 

“저는 지혜롭게 일하는 순박한 농부야말로 진정한 문명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도시에서는 정말 뛰어난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만큼 고귀한 사람을 찾아보기가 힘들답니다.

아무래도 분별 있는 사람을 만날 기회는 도시보다 시골이 더 많은 것 같아요.

대도시에 가까이 살면 가까이 살수록 그만큼

사람들은 타락과 어리석음과 사악함의 구렁텅이 속으로 빠져드는 법이지요.”

-1883년 10월-

 

 

“진실에 도달하려면 열심히, 오랫동안 일해야 해. 그것이 바로 내가 원하는 것,

내가 정말 힘들게 얻어내려 하는 필생의 목표인 것이야. 하지만 너무 높은 곳은 바라보지 않겠어.

인물화나 풍경화에서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은,

감상적이고 우울한 것이 아니라 뿌리 깊은 고뇌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내가 어떻게 비칠까?

보잘것없는 사람, 괴벽스러운 사람, 비위에 맞지 않는 사람...,

사회적 지위도 없고 앞으로도 어떤 사회적 지위를 갖지도 못할,

한마디로 최하 중의 최하급 사람....

그래 좋다. 설령 그 말이 옳다 해도 언젠가는 내 작품을 통해 그런 기이한 사람,

그런 보잘것없는 사람의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를 보여주겠다.”

-1882. 7-

 

 

 

 

 

Green Wheat Field with Cypress

Saint Rémy

Oil on canvas June 1889

73.5 x 92.5 cm

Narodni Gallery Prague Czechia

 

 

“푸른 하늘 아래 노랗고 빨간 꽃들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단다.”

 

“처음으로 사용한 부드러운 기법으로 인해 '밀밭'은

마이어 샤피로의 말처럼 '살아 숨쉬는 작품'이 되었다.

부드러운 기법이란 비단 가늘고 부드러운 붓놀림뿐 아니라,

검은색, 녹색, 빨간색 반점으로 미묘하게 강조된 금색을 말한다.”

 

 

맑은 공기, 태양 그리고 봄바람이 가득 스며들어 있다.

 

 

 

 

 

Reaper

1889 Oil on canvas

73 x92 cm

Van Gogh Museum Amsterdam, Netherlands

 

 

고흐는 그림 그리는 일을 언제나 ‘일한다, 작업한다, 노동한다.’고 표현했다.

이는 그림을 바라보는 고흐만의 태도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가 노동자나 농민과 다르지 않게 살았음을 뜻한다.

인간으로서 지극히 당연한 생존에의 본능,

변화에의 본능을 그림에 쏟아 부으며 위대한 유산을 남기곤 간 고흐이다.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이 무력한 단계를 반드시 거쳐야 해.

탐구를 계속해 나가다보면 스스로 이런 열정의 흔적과 시행착오를 발견하게 돼.

그것은 사람들이 바라는 평온함과 거리가 멀지.

평온하게 살고 싶다면 이런 삶은 버겁게 느껴질 것이야.

이 탐구는 소화불량을 일으키기도 하고, 때로 동요, 불안, 과도한 흥분상태에 빠지게 해.

또 마치 여름 폭풍우를 맞는 것처럼 숨도 막혀.”

-1883년 2월 8일-

 

 

그림그리기를 시작한 때의 이 초기 편지에서 보듯

그는 언제나 삶 앞에 열정과 진지한 탐구로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예술이라는 단어를 이보다 더 잘 정의한 말은 아직 듣지 못했구나.

'예술은 자연에 인간을 더한 것이다.'

자연, 현실, 진실,... 하지만 실상 중요한 것은 예술가가 자연 안에서

찾아내는 개념이나 특징이겠지.

거기에 적당한 표현을 찾아 주고, 원래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예술가의 일일거야.

예술가는 감정과 해석, 개성을 끄집어내고 표현하며, 분출시키고,

뒤섞으며, 해방시키고, 빛나게 한다.”

-1879년 6월-

 

 

“자연에 완전히 흡수된 상태에서, 자신의 능력을 모두 발휘해

그 감정을 다른 사람들도 느낄 수 있게 작품으로 표현하는 것이야말로 예술가의 사명이란다.”

-1882년 7-

 

 

“나는 자연을 연구한단다.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이성을 잃지 않기 위해서지.

하지만 내 그림의 색이 실제 대상의 색과 같은지는 크게 염두에 두지 않고 있어.

캔버스 위에서 아름답게 보이기만 한다면, 자연에서처럼

그렇게 아름답게 보이기만 한다면 말이야.”

-1885년 10월-

 

 

 

 

 

Vincent's House in Arles The Yellow House

Oil on canvas 1888.9.

72.0 x 91.5 cm

Vincent van Gogh Foundation Rijksmuseum Vincent van Gogh Amsterdam the Netherlands

 

 

“푸른 하늘 아래 노랗고 빨간 꽃들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어.

이곳의 맑은 공기에는 북쪽의 공기와는 다른, 좀 더 행복하고 사랑스러운 느낌이 감도는구나.

마치 네가 가지고 있는 몽티셀리의 꽃 그림을 보는 것과 같은 울림이야.

나는 이곳에서 꽃을 그리지 않았던 자신을 원망했단다.

아, 들판에는 사랑스럽고 큼지막한 프로방스 장미가 있고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가 자라고 있어.

이곳에 있는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한 편의 시라고 해도 좋을 것 가구나.

햇볕은 끊임없이 내리쬐고, 그런데도 식물들은 싱싱한 초록빛을 잃지 않고 있단다.”

-1888년 9월-

 

 

고흐가 아를의 ‘노란 집’으로 옮겨와서의 편지이다.

작업하기에 좋게 햇빛이 잘 들었던 집으로

 

 

 

 

 

찬란한 노란색을 얻기 위해 여름 내내 취해 있었다는 고흐.

고갱과의 생활을 위해 프라스 라마르틴이라는 집의 한쪽에 세를 들어

 

 

“외벽은 노란색으로 칠하고 초록색 덧문이 달린 창으로는

아카시아 나무 등 푸른 나무로 가득한 공원이 보이고

내부는 완전 흰색으로 칠했는데 바닥은 붉은 타일을 깔았지요.

무엇보다 멋진 건 푸른 하늘! 그 아래의 아름다운 집으로

여기서 정말 내가 평안 속에 살면서 작품구상도 하고... 그림도 그릴 것입니다.”

 

 

고갱에게 보낸 편지로서 매우 흡족해 하던 집이다.

그리고 고갱의 방을 장식하기 위해 유명한 '해바라기' 연작을 이 집에서 그렸다.

또한 고흐는 이 집을 화가들이 교제 장소로도 쓰면 좋겠다고 생각해 집 안팎을 꾸몄다.

그리하여 그의 정성이 깃든 이 집은 고흐의 마음의 평화를 찾는 상징의 집이 되었고

1888년 5월부터 1889년 4월까지 살았던 곳이다.

 

 

“코발트 색의 하늘, 태양의 숨결 속에 자리 잡은 집이나 그 가까운 곳... 이 모티브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기필코 나는 그것을 쓸 만한 것을 해보이겠습니다.”

 

 

 

 

 

Twelve Sunflowers in a Vase

Oil on canvas August 1888

Bayerische Staatsgemäldesammlungen Neue Pinakothek Munich Germary

 

 

“고갱과 함께 우리들의 작업실에서 살게 된다고 생각하니 무척 기쁘다.

그래서 작업실을 멋지게 장식하고 싶어.

오직 커다란 해바라기로만 말이다. 열두 점 정도의 그림을 그려야 해.

그 그림을 모두 모아놓으면 파란색과 노란색의 심포니를 이루겠지.

매일 아침 해가 뜨자마자 그림을 그리고 있어.

꽃은 빨리 시들어버리는데다, 단번에 전체를 그려야 하기 때문이야.”

 

 

고흐는 고갱을 맞을 기쁨으로 1888년 여름에 몰두했던 '진노랑의 색조'에 대해 말하고 있다.

거의 노란색으로만 그린 해바라기 연작 다섯 점이 바로 그 색조를 강력히 보여준다.

위 그림에서 보듯이 그 효과는 대단하다.

<네 송이의 해바리기>와는 달리 고흐는 해바라기를 이루는 기본적인 색들만을 사용했는데

이 그림을 전반적으로 지배하는 색은 노란색이다.

고흐는 노란색의 여러 가지 채도를 이용하여 그림을 그렸다.

 

 

“황금이라도 녹여 버릴 것 같은 열기, 해바라기의 그 느낌을 다시 얻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겠지.

온통 거기에만 집중해서 한 인간의 모든 것을 쏟아 부었을 때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해.”

-1889년 1월-

 

 

 

 

 

Landscape with House and Laborer

<Paysage avec une maison et un laboureur>

Oil on canvas 1889

33 x 41.4 cm

Collection of Otto Krebs Holzdorf

 

Now in the Hermitage St. Petersburg Russia

 

1881년부터 생을 마감한 1890년 까지 약 900점의 유화와 1100여 점 이상의

스케치와 드로잉등 총 2000여 점의 작품을 남겼을 뿐 아니라

빈센트 반 고흐가 생전에 남긴 편지는 모두 827통이다.

그중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가 668통으로

황야의 외딴 영혼으로 살다 간 37년의 짧은 생애 동안 남긴 그림과 편지들이다.

 

 

처절하기 그지없는 사랑과 광기의 나날로 가득 찬 삶을 치열하게 살아온 반 고흐.

그 수많은 편지에서는, ‘창조적 광기’의 신화와는 아주 동떨어진 모습의 반 고흐를 볼 수 있다.

편지는 대부분 뜨거운 태양 아래서 또는 태풍 속에서 그림을 그린 뒤,

집에 돌아와 녹초가 된 상태에서 밤 늦게 까지 쓴 것으로

다른 사람에게 미처 보여 주지 못한 진실한 내면, 정신적 고뇌,

예술에 대한 열정 등 내면의 독백은 하나하나가 촘촘하게 잘 짜진 진솔한 문학작품 같다.

평생을 통해 끊임없는 대화를 나눈 빈센트와 테오,

그 중 대부분은 말 그대로 동생이면서 친구이고,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후원자요

영혼의 동반자이자 피난처였던 동생 테오에게 보낸 것이다.

 

 

 

 

 

Two Cypresses

Saint-Rémy

Oil on canvas June 1889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USA

 

 

1889년 고흐는 반복적으로 발작을 일으키면서

그 해 5월 생 레미(Aaint Remy) 정신병원에 자발적으로 찾아가 입원했다.

하지만 그림에 대한 열정을 멈출 수 없었던 그는

그곳에서 감시원을 동행한 채로 야외에서 그림을 그렸다.

반 고흐가 생 레미에서 발견한 중요한

모티브는 병원에서 바라보이는 밀밭과 싸이프러스 나무였다.

밭이나 산을 배경으로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싸이프러스 나무는

그에게 있어서 마음의 번민에 위안을 주는 희망의 상징과도 같았다.

그는 이 모티브로 여러 작품을 남겼는데 싸이프러스 나무와 함께 격렬하게

소용돌이치는 듯한 붓터치를 이용한 표현은 이 시기 작품의 특징을 이룬다.

 

 

반고흐는 비평가 알베라 오리에(Albert Aurier)에게

이 모티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기도 했다.

 

 

“싸이프러스 나무는 시골 풍경의 전형입니다. 해바라기에 필적할 만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와는 전혀 반대되는 이미지로 나에게 영감을 주는 소재이지요.”

 

 

실제로 해바라기가 아를에 머물던 시기의 그가 느꼈던 심적 상태를 상징하는 것이었다면,

싸이프러스는 생 레미 시기의 그의 심리를 대변하는 매개체이다.

 

이 작품 속에서는 산도, 하늘도, 대지도, 모든 요소들이

살아서 꿈틀대는 사이프러스 나무에 맞추어 호흡하고 요동치는 것처럼 보인다.

불타오르는 듯한 격렬한 붓질로 그려진 나무와 무성하게 갈린 들판의 풀, 휘몰아치는 하늘 등

각각의 요소가 나름대로의 강렬함을 띄고 있으면서도

반 고흐의 억제된 색조 표현을 통하여 지극히 조용한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

고흐역시 이 작품을 매우 아꼈으며 ‘내가 그린 가장 명석한 작품’이라며 스스로 평가하기도 했다.

 

 

 

 

 

The All-Knight Café at Arles

Oil on canvas September 1888

Yale University Art Gallery New Haven CT USA

 

고흐와 고갱이 자주 가서 압상트를 즐기던 카페 드 라 가르 (Cafe de la Gare)이다.

 

 

카페는 사람들이 자신을 파괴할 수 있고 미칠 수도 있으며,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해.

'밤의 카페'를 통해 그런 느낌을 표현하고 싶었어.

부드러운 분홍색을 핏빛 혹은 와인 빛 도는 붉은색과 대비해서,

평범한 선술집이 갖는 창백한 유황빛의 음울한 힘과

용광로 같은 ‘인간의 끔찍한 열정’을 표현하고 싶어 지옥 같은 분위기를 부각하려 했지.”

-1888. 9. 8-

 

 

의도적으로 피와 같은 붉은 색과 어두운 노란 색, 당구대의 초록색‘등을 대조적으로 사용했다.

‘색채는 열렬한 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라는 주관적인 그의 견해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L'Arlésienne Madame Ginoux with Books

Oil on canvas November 1888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USA

 

 

고흐는 늘 고뇌하였다. 그림을 잘 그리고 싶어서,

살아가고 물감을 살 돈이 없어서, 동생에게 짐이 되는 죄스러움을 갚을 길이 없어서...

그래서 그의 영혼은 늘 가난했고 늘 주눅이 들어 있었다.

 

고흐는 자신이 늘 동생에게 신세져야 한다는 사실을 미안해했다.

언젠가 좋은 값에 그림이 팔려 테오에게 진 빚을 다 돌려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편지에 그에 대한 미안한 마음의 표현은 늘 빠지지 않았다.

편지에서 고흐는 동생에게 미안한 마음을 ‘내 영혼을 줄게’라는 표현으로 전했다.

고흐의 그림은 고흐의 영혼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러나 테오는 형을 존경했고, 늘 걱정했고, 형의 그림을 사랑했다.

그를 도울 수 있는 것에 감사했고, 여유롭진 않았지만 돈에 연연해하지 않았다.

 

 

“내 영혼을 줄게.“

“형과 나는 몸은 둘이지만 한사람이야. 형은 정신이고, 나는 육체라구.”

 

 

한편의 드라마 같은 짧은 인생을 살다 간 그의 형제들의 고통과 번민에

연민의 정을 느끼게 한다.

 

 

 

 

 

 

The All-Knight Café at Arles (Portrait of Madame Ginoux)

1890

Paul Gauguin 作

 

 

고흐와 고갱은 지누 부인(드 라가르 카페 주인)을 모델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이 그림으로 그들의 우정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고흐는 탁자에 몇 권의 책이 펼쳐진 우아한 지누 부인을 그리지만,

고갱은 싸구려 술 압생트 병과 술잔이 놓여있고 뒤에는 고흐가 아버지처럼 좋아하고 따르는

우체부 룰랭이 창녀들을 희롱하는 모습을 그렸다.

술에 취해 탁자에 쓰러져 있는 사람은 종종 그림을 같이 그리는 고흐의 친구라고 한다.

 

 

 

 

 

Self-Portrait with Bandaged Ear

Oil on canvas January 1889

60 x 49 cm

Courtauld Institute Galleries London UK

 

 

고흐는 자해 사건 이후 귀에 붕대를 감은 자신의 모습을 두 점의 자화상에 담았다.

그 중 하나인 이 그림은 다른 것에 비해 더 미묘하고 성찰적인 느낌이다.

발병 후 2주가 지나 그린 이 그림은 차분하고도 기품 있는 고흐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

강한 빛 아래서 자신과 침착하게 대면하고 있는 고흐는 그가 아직 훌륭하게 살아 있음을 주장하는 듯하다.

이 이미지는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자신감을 나타내는 것이다.

 

 

 

"화가이기 때문에 겪은 발작이었기를 바란다. 하루하루 내 머리는 평온을 회복하고 있다."

테오에게 이렇게 썼지만

실은 그의 불운의 삶이 시작되고 있었다.

 

 

-고흐가 귀를 잘랐던 사건-

 

 

고흐가 무척이나 좋아했던 고갱이기에

비용을 절감하고 작품 구상의 의논생대로도 좋을 것 같아

당시 같이 춥고 배고팠던 고갱에게 함께 기거하기를 고흐의 여러 번의 요청 끝에

드디어 10월 고갱이 아를에 도착했다.

가난했지만 마흔 살 고갱과 서른다섯 고흐는 희망에 가득 차 있었고 서로를 아껴주었다.

몽펠리에로 파브르 미술관에서 쿠르베, 들라크루아의 소장품을 함께 감상하기도 하고

야외로 그림을 그리러 나가기도 했다.

하지만 화기애애한 생활은 성격적인 충돌로 오래가지 못했다.

서로를 지배하고픈 욕망과 자신의 예술성을 라이벌에게 과시하고픈 욕망,

고흐의 격한 분출 등... 예술에 관해 의견이 달랐던 그들은 격렬하게 논쟁하기 시작했고,

반 고흐는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는 고갱이 그를 버릴 것만 같은 공포감에 점점 휩싸였다.

 

1888년 12월 23일 실의의 빠진 반 고흐는 날카롭게 고갱과 대립했다.

패닉에 빠진 반 고흐는 호텔을 떠나 창녀촌으로 달아났고,

왼쪽 귀를 잘라 휴지에 감싼 다음 레이첼(Rachel)이라는 창녀에게 건네주면서

“이 오브제를 잘 보관하라”고 부탁까지 했다.

한 편, 고갱은 그길로 아를을 떠났고 다시는 반 고흐를 보지 않았다.

‘노란 집’에서 같이 지낸지 약 두 달 만이었다.

 

동생 테오가 고갱의 연락을 받고 병원에 입원한 형을 방문했다.

1889년 1월, 화가 폴 시냑이 방문해

반 고흐가 다시 ‘노란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지만

잦은 환각과 발작, 망상으로 병원과 집을 번갈아 다녀야 했다.

30명의 마을 사람들은 반 고흐를 ‘빨간 머리의 정신병자’라고 부르면서

탄원서를 제출했고 경찰은 그의 집을 폐쇄했다.

 

그 사건 이후 반 고흐는 반복되는 극심한 정신 착란으로

1889년 4월 스스로 생 레미(Saint-Remy) 지방에 있는 정신병원으로 찾아가 입원하게 된다.

 

 

37년간의 짧은 삶 속에 힘겹던 그를 지탱해주던 두 축이었던 고갱과 테오.

177통의 편지에서 고갱의 이름이 605번이나 언급될 정도로 고갱을 존경하고 사랑했던 고흐였다.

동료 예술가로서 존경하고 마음이 맞는 구세주이자

스승이며 형과 같은 친구라고 생각했던 고갱과의 불화는

고흐를 거의 회복이 불가능한 고통의 깊은 수렁에 빠트렸으며

자기 귀를 자르는 극단적인 사건으로 비화했다.

 

이것이 그의 삶에 있어서 최초의 발작이었다.

그의 짧은 인생의 참담한 비극이 시작된 것이다.

 

 

 

 

 

생 레미 정신병원의 병실

1889. 4

 

 

“이곳으로 오길 잘한 것 같다. 동물원 같은 곳에 갇힌 미친 사람들의 생활을 직접 보노라면,

막연한 불안이나 공포가 사라진다.

그러면서 정신병도 다른 질병과 같은 병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1889-

 

 

1889년 4월말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고흐는 프로방스의 생 레미에 있는 정신병원에 찾아가 스스로 입원하여

1년 남짓 병원의 빗장이 쳐진 독방에서 격리된 생활을 하며

감사자와의 동행 하에 야외에서 그림을 그린다.

 

 

빈센트 형에게

 

 

“형이 생 레미에 무사히 잘 도착했다니, 그리고 아를에서보다 더 편 안한 느낌이라니 정말 기뻐.

하지만 형이 그곳에 너무 오래 머물지는 않길 원해.

주변에 그렇게 많은 정신이상자들이 있는 게 그리 유쾌하진 않을 테니까. 내가 원하는 건 형의 생활을 돌봐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서

한편으로 형을 자유롭게 해주는 곳을 찾는 거야.”

-1889. 5. 22 테오-

 

 

 

 

 

Old Man in Sorrow

Oil on canvas 1890.5.

Rijksmuseum Kröller-Müller Otterlo Netherlands

 

 

“이곳 환경이 나를 말할 수 없을 만큼 짓누르기 시작했어.

이런, 어느새 참고 지낸 지도 일 년이 다됐구나. 신선한 공기가 필요해.

여긴 너무나 지루하고 슬픈 곳이란다. … 비록 마음에서 우러나와 따뜻하게 보살펴 준다 해도

다른 사람의 감시를 받으며 산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버리는 삶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 것 같구나.

자유를 희생하고 스스로를 사회에서 격리시키고

그리고 아무런 방해 없이 작품에 몰두하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는 상태야. 이곳에서 시간을 너무 낭비했다.”

-1890년 5월-

 

 

생 레미의 정신병원에서 감금되어 있을 때 비참한 심정으로 쓴 편지다.

테오에게 부탁하여 1890년 5월 고흐는 생 레미의 병원에서 나와

가셰 박사가 있는 오베르 쉬르 우아즈(Auvers-sur-Oise)로 떠난다.

 

 

 

 

 

Street in Auvers-sur-Oise

Oil on canvas 1890

73 x 92 cm

Museun of Finnsh Art Ateneum

 

 

“오베르는 무척 아름답단다. 그중에서도 요즘에는 보기 드문 오래 된 초가가 그렇지. …

거기에는 정말로 심오한 아름다움이 있어.

이런 곳이야말로 진정한 시골이라 할 수 있을 거야. 매우 특색 있고 회화적이거든.”

-1890년 5월-

 

 

병원에서 퇴원하고 오베르 쉬르 우아즈로 와서 느낀

새롭고 경이로운 풍경에 대한 편지다.

 

 

“그림에 대해 좌절하지 않는 정열이 있고

자연의 색에 대한 자신만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면 말일세.

수많은 난관이 닥치더라도 예술가는 이곳에서 버틸 수가 있다네.

난 좀 더 오래 머물 생각이야.”

 

 

“자연은 처음에는 언제나 화가의 접근에 저항을 하지.

하지만 자연을 정말로 진지하게 생각하는 화가라면

그 정도의 저항에 쉽게 물러서지는 않을 거야.

오히려 그런 저항이야말로 승리를 거머쥐기 위한 동기부여가 되지 않겠니?

그리고 자연과 진정한 화가는 그 근본에서 서로 일치하는 것이란다.

확실히 자연은 '손에 잡히지 않는' 대상이지만 그래도 화가는 자연을 움켜쥐어야 해.

그것도 아주 단단히 말이야. 그렇게 한바탕 씨름을 하고 나면

이제 자연도 조금 유순해지면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거란다.”

 

 

 

 

 

Four Cut Sunflowers

Oil on canvas August-September 1887

Rijksmuseum Kröller-Müller Otterlo Netherlands

 

고흐의 상징이자 태양의 상징, 태양과 노란 색에 미쳐버린 화가 반 고흐.

1888년 동생 테오(Theodorus van gogh 1857-1890)에 보낸 편지의 내용 중

 

 

"자냉(Goerges Jeannine)에게 작약이 있고 쿠스트(Ernest Quost)에게 접시꽃이 있다면

나에게는 해바라기가 있다."

 

 

그가 얼마큼 이 꽃에 매료되어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는 1888년부터 아를(Arles)의 작업실에서 해바라기 연작을 그리기 시작했고

이 연작은 훗날 그에게 ‘태양의 화가’라는 호칭을 안겨 주었다.

1888년에 제작된 <해바라기>는 생명력이 넘치며

마치 태양을 쫒아 절규하는 듯한 노란색으로 표현 되었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로 향한 자신의 봉사와 고통이 부족하다고 울던 고흐가

몇 년 만에 파리에서 가장 시끄럽고 난잡한 술집에 앉아

신을 저주하는 사람들과 밤새도록 어울리던 시기로 압생트에 과하게 취한 시기이기도 하다.

압상트에 취하듯 노란 색에 미쳐있었다.

 

 

 

 

 

The House in Auvers-sur-Oise

Oil on canvas 1890

72 x 60.5 cm

Boston Museum of Fine Arts USA

 

 

“저는 계속 고독하게 살아갈 것 같습니다.

가장 사랑했던 사람들도 망원경을 통해 희미하게 바라보는 수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격렬한 색채, 맹렬한 붓질과 몇 번씩 덧바른 물감, 소용돌이,

고통과 불안, 외로움 등 빈센트의 내면의 고뇌에 찬 삶의 통찰을 나타내는 이 모든 것이

그의 그림을 통하여 가슴 뭉클한 정신적, 심리적 메시지를 전한다.

 

 

“그래, 나의 그림, 그것을 위해 나는 나의 목숨을 걸었고 이성까지도 반쯤 파묻었다.”

 

다시 정신적 고통으로 힘들어진 때이다.

 

 

 

 

 

Irises

Sait-Rémy

Oil on canvas May 1889

J.Paul Getty Museum Malibu CA USA

 

 

생 레미의 정신병원에 입원했을 때의 그림이다.

해바라기, 아이리스, 히아신스, 체리블로섬, 아카시아, 들장미, 아네모네… 등

수많은 꽃들을 모델로 삼았던 고흐는 자연과의 끊임없는 씨름 후에,

태양을 의지해서 자라나는 꽃들과 자연을 연인처럼 사랑했다.

 

 

고흐는 표면적으론 삶에 대해 부정으로 일관하는 사람 같았지만,

사실 그 속엔 누구보다도 삶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있는 진지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Portrait of Dr. Gachet Seated at a Table Auvers-sur-Oise

Oil on canvas June 1890

67 x 56 cm

Collection Ryoei Saito Tokyo Japan

 

 

정신병의 전문 의사였던 가셰 박사는 아마츄어 화가이기도 하면서

폴 세잔을 비롯한 많은 화가들의 친구이자 후원자였다.

피사로의 추천으로 반 고호를 돌보게 되었는데 나중엔

반 고흐를 이해하는 좋은 친구가 되었던 인물이다.

 

 

“이제 가셰 박사를 빼고는 나를 지켜 주는 것이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구나.

그만은 계속 내 친구이리라 생각한단다. 그의 집에 갈 때는 그림이 그렇게 나쁘지 않아.

앞으로도 매주 일요일이나 월요일에는 박사가 나를 불러 줄 것 같구나.”

-1890년 6월-

 

 

또한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었던 가셰 박사는 흥분하기 쉬운 성격이었다.

그래서 역설적이지만 고흐는 이따금 둘 중 누가 더 심하게

우울증과 신경쇠약에 걸려서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인지 생각하기도 해서

테오에게 “가세박사는 나보다 더 아픈 것 같애....”라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가셰 박사를 모델로 그는 한 심약하고 선량한 사람의 인상으로 뛰어난 초상화를 남겼다.

 

이 <Dr. Gachet 의 초상화>는 그의 유명한 그림 중의 하나다.

그 이유는 빈센트 생애 마지막 즈음에 그렸고,

그 주제가 오늘날까지 Controversy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How competent was doctor Gachet?

What did Vincent mean When he wrote to Theo?

" First of all, he is sicker than I am. I think, or Shall we say just as much? "

 

 

또한 가셰 박사의 딸 마르그리트는 고흐의 마지막 사랑이기도 하다.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아름다운 풍광에 매혹되어 작업에 매진하고

정서적 안정을 찾아가던 고흐는

자신의 주치의의자 친구로서 신뢰했던 가셰 박사에게 거절당하자

또다시 광기에 사로잡히고 만다.

예술가로서 고흐를 높이 샀던 가셰 박사였지만 자기 딸 마르그리트가

정신이 온전하지 못하고 생활 능력이 없는 고흐와

가까워지는 것을 그대로 둘 수 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딸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의사 가셰와 심하게 다툰 후,

가셰의 집과 자기 숙소 사이에 있는 밀밭에서 권총으로 자해하고

그 이틀 뒤 그의 불행했던 삶을 마감한다.

 

 

이 작품은 1990년 5월 미국의 미술품 경매회사 크리스티에서

경매 시작 3분 만에 8,250만달러(한화792억원)에 낙찰됐다.

구매자는 일본의 제지업자 료에이 사이또로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을 통해 고흐는 세계적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Sunset at Willow

-1888. 8-

 

 

“어쩌면 지금 형을 보면 못 알아보실 지도 모르겠네요.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 저보다도 다른 사람들이 더 놀라곤 한답니다.

위가 너무 안 좋아서 위를 거의 못쓰게 되면서는 큰 수술을 받았어요.

의사 말로는 이제 완전히 나았다고 하네요. 형의 그림은 굉장한 속도로 발전하고 있답니다.

조금씩 이름이 알려지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지요.

아직 돈을 받고 그림을 팔지는 않지만 다른 화가의 그림과 맞바꾸는 일은 종종 있어요.

그런 식으로 괜찮은 작품들도 꽤 모았는데, 물론 모두 상당히 가치 있는 작품이랍니다.

한 미술상은 형의 그림을 네 점이나 가져갔는데 내년에는

 형의 전시회를 열어 주겠다고 약속했어요.

요즘은 주로 꽃 그림을 그리고 있답니다. 한 작품 한 작품 할 때마다

좀더 생기 넘치는 색상을 표현해 보려 하고 있지요.

예전보다 훨씬 더 활기차졌고

이곳 사람들 역시 형을 좋아해요. 매일 유명한 화가의 작업실을 방문하기도 하고

그 사람들이 형을 찾아오기도 한답니다. 어떤 사람은

그림의 소재가 될 꽃을 매주 보내주기까지 해요.

그런 사람들이 계속 있는 한 이제 형에게도 힘든 시절은 다 지나갔다고 할 수 있겠지요.

앞으로는 혼자 힘으로 헤쳐 나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흐를 걱정하는 어머니를 안심시키기 위해 쓴 테오의 글-

 

 

 

 

 

Road with Man Walking, Carrige, Cypress, Star and Crescend Moon

Auvers-sur-Oise

Oil on canvas May 1890

Rijksmuseum Kröller-Müller Otterlo Netherlands

 

 

 

“최근에는 옆으로 별 하나가 보이는 사이프러스나무 그림을 그리고 있네.

눈에 뜨일락 말락 이제 겨우 조금 차오른 초생 달이 어두운 땅에서 솟아난 듯 떠 있는 밤하늘,

그 군청색 하늘 위로 구름이 흘러가고, 그 사이로 과장된 광채로 반짝이는 별 하나가 떠 있지.

분홍색과 초록의 부드러운 반짝임이야.

아래쪽에는 키 큰 노란색 갈대들이 늘어선 길이 보이고 갈대 뒤에는

 파란색의 나지막한 산이 있지.

오래된 시골 여관에서는 창으로 오렌지 색 불빛이 새어나오고,

키가 무척 큰 사이프러스나무가 꼿꼿하게 서 있네.

길에는 하얀 말이 묶여 있는 노란색 마차가 서 있고, 갈 길이 저물어 서성거리는 나그네의 모습도 보인다네.

아주 낭만적이고 프로방스 냄새가 많이 나는 풍경이지.”

-1890. 6-

 

 

고흐는 프로방스의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서 그린 마지막 작품 중의 하나인 이 그림을

유명한 비평가 알베르 오리에르에게 선물로 주었다.

알베르는 [르 메르퀴르 드 프랑스] 지에 고흐에 관한 최초의 진지한 기사를 써서

그에게 많은 용기를 주었다.

 

 

"그는 위대한 화가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미술과 팔레트, 자신의 성격에 스스로 황홀해지는,

상상과 환상 속에 사는 광신적인 신봉가이다."

 

 

반 고흐의 전 생애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인 단 한 번의 논평이었다.

 

 

 

 

 

Wheat Field under Clouded Sky

Oil on canvas 1890

100.5 x 50 cm

Vincent van Gogh, Amsterdam, the Netherlands

 

 

“건강을 위하여 뜰에서 제작을 하고, 꽃이 피는 것을 보기도 하는 것은 정말 좋은 일입니다.

바다와 같은 넓은 언덕을 향하여 펼쳐져 가는 보리밭의 그림에 지금 열중하고 있습니다.”

최후의 3점의 대작의 하나로, 이것도 어두운 폭풍 속에 있는 밀밭이다.

 

 

“저는 완전히 이 밀밭의 대작에 소모당하고 있습니다”

라고 그는 어머니에게 써 보내고 있었다.

그가 자살을 시도한 것은 그로부터 며칠 후였다.

이 작품은 색채 면에서 '까마귀가 있는 밀밭'만큼 불길해 보이지 않지만,

무서운 공백감은 불길 이상의 종언의 예고와도 같은 작품이다.

 

 

 

 

 

Red Vineyards of Arles

Oil on canvas 1888

The Pushkin Museum of Fine Art Moscow Russia

 

 

1888년 2월 반 고흐는 무절제 했던 파리의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프로방스(Provence)거쳐 아를로 떠났다.

맑은 하늘아래 그의 영혼과 예술 사이에 또 다른 교감이 시작되고

그곳의 따뜻한 태양아래에서 내면의 빛을 되찾게 되었다.

이 작품은 1888년 폴 고갱과 함께 생활하며 아를의 야외에서 그린 작품이다.

 

 

‘비가 내린 뒤 석양이 땅을 보라색으로 바꾸고

포도 잎을 와인처럼 붉게 물들일 때 그린 것이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는 테오에게 감사의 마음으로 선물한 그림이다.

실제로 이 작품은 그가 생전에 그린 1500여 점의 그림 중에서

테오가 단 400프랑에 팔았던 유일한 작품이다.

 

테오는 이 작품을 1890년에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20인 전에 출품했는데,

그 때 반 고흐와 친분을 쌓고 있었던 시인 외젠 보흐의 누이이자

벨기에 인상주의 여류화가인 안나 보흐가 구입했다.

이후 이작품은 한 러시아 사업가를 통해 러시아 정부가 소유하게 되었으며

현재는 모스크바의 푸슈킨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Wheatfield with Crows

Oil on canvas July 1890

50.5 x 103 cm

Van Gogh Museum Amsterdam Netherlands

 

 

고흐가 자살하기 전 그린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진 그림이다.

그의 가장 유명한 그림 중 하나로 죽음의 공포와 그에 반한 삶의 의지를 그린 것이다.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와서는 새로운 시도로

가로로 긴 캔바스에 그려 밀밭의 광활함을 강조했다.

같은 시기, 같은 장소에서 그렸으나

Wheat Field under Clouded Sky 그림의 평온함과는 상반된 심리상태를 보인다.

고흐의 그림은 항상 자신의 내면을 적극적으로 표출하는 세상을 향한 소통의 매개체였다.

다만 세상으로부터 적절한 응답을 못 들었을 뿐...

 

 

“그것은 폭풍의 하늘에 휘감긴 밀밭의 전경을 그린 것으로

나는 깊은 슬픔과 극도의 고독을 표현하려고 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는 전경의 세 갈래의 갈림길은

자살 직전 그의 절망감을 강하게 상징하는 듯하다.

, 대지가 폭풍 속에서 바다처럼 사납게 일렁이는 여기에선

요동치듯 거칠고 절박한 붓질로 그려진 어둡고 낮은 하늘과 불길한 까마귀 떼,

불안한 화면을 통하여 그는 영혼의 혼란과 고독, 슬픔을 절규하고 있다.

 

 

“앞날의 예감도 어둡다. 나는 미래를 행복한 빛 속에서 보는 것은 전혀 되지 않는다.”

끝없는 절망감은 그를 못견디게 했다.

 

 

 

 

네덜란드라는 나라는 산이 드문 나라이다.

어디를 바라보나 까마득한 지평선 끝까지 파란 논밭이 이어져 있다.

군데군데 집과 풍차와 숲이 흩어져 있고, 강물이 언제나 은빛으로 반짝이고 있다.

그런 지평선 끝에 빨갛게 타는 저녁 해가 하늘을 온통 핏빛으로 물들이고

 조용히 가라앉으려는 순간이었다.

 

 

“야, 저것 좀 봐라! 얼마나 아름다우냐?”

풀밭에서 공차기를 하며 놀고 있던 대 여섯 명의 어린이 중 한 아이가 외쳤다.

“어쩌면 저녁 해가 저렇게 빨갈까?”

 

공기가 맑은 탓인지 오늘따라 저녁 해가 유난히도 아름답게 보였다.

 어린이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말했다.

 

 

“정말 아름답구나!”

“피보다 더 빨갛지?”

 

 

그러자 아까부터 숨을 죽이고 뚫어지게 저녁 해를 바라보고 있던 한 아이가,

“틀려, 저건 빨강 빛이 아니고 노랑 빛이야.”하고 나섰다.

 

“뭐? 노랑 빛깔이라고? 네 눈엔 저게 노랗게 보이니?”

여러 아이들은 놀란 얼굴로 그 아이를 쳐다보면서 물었다.

 

 

“보이는 게 다 뭐냐? 정말 빛깔이 노랑인데...”

“뭐라고? 저건 누가보든지 빨강빛깔이야. 그렇지 얘들아?”

“응, 그렇고말고. 저건 빨강이야.”

 

어린이들은 모두 빨강 빛깔이라고 말했다.

 

 

“네 눈이 좀 이상한 모양이구나.”

“이상한 건 내가 아니고 너희들이야. 그래서 너희들은 정말 빛깔을 보지 못하고 있어.”

 

저녁 해를 노랑빛깔이라고 우겨대는 그 어린이는 꼼짝도 하지 않고 서서

저녁놀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어린이가 바로 뒷날 세계적으로 유명한 화가가 된 빈센트 반 고흐였다.

 

 

 

 

 

 

 

 

 

 

 

 

 

 

 

 

 

 

 

 

 

반 고흐는 네델란드의 어느 가난하고 엄격한 목사의 집에서 칠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불행했던 인생은, 자기가 태어나기 일 년 전에 죽었던 형으로 부터 시작한다.

자신보다 1년 전에 태어난 형이 사망한 뒤 태어난 고흐는

어머니로부터 대체된 아이라는 느낌을 매번 받아야 했다.

사망한 형의 이름까지 물려받은 고흐는 일요일마다 자신의 이름이 적힌 묘지를 봐야했고,

어머니에게 죽은 형의 존재를 뛰어넘는 사랑을 바랬지만, 형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진지하고 조용하고 생각이 깊었던 반 고흐는 성격이 점점 어두워졌다.

 

가난으로 인해 열다섯 살 되던 해에 학교를 그만 두고

목사이던 아버지를 따라 성직자가 되기 위해 노력했지만

제도화된 종교 사회에서의 이면의 그늘을 받아들일 수 없어

목사의 길을 포기하게 되었다.

 

그 후 삼촌의 도움으로 구필 앤 씨(Goupil & Cie)에 일자리를 얻어

아트 딜러로 런던에서 일을 한 적도 있다.

그의 종교적 열성은 계속되어 신학공부를 위해 평 선교사로

잠간 동안 석탄 광산마을에서 광부들과 기숙하며 선교활동을 하기도 한다.

 

브뤼셀에 있는 로열 아카데미 오브 아트에서 그림공부를 하면서

그림만이 구원의 길이라 생각하여

그림을 통해 하느님에게 봉사하기를 원했고, 하느님에게 인도하는 화가가 되기를 바랐다.

선생의 지도도 없이 독학과 독습으로 땅을 일구는 농부처럼 그림을 그려 나간다.

적은 돈, 적은 힘일지라도 온통 독서와 그림에 쏟아 붓는다.

 

 

“끓어오르는 내면의 불길, 어떻게 분출해야 할지도 모르면서

나는 억지로 그 불길을 다잡고 있다.”

 

 

첫 주요 작품이 그 유명한 <Potato-Eaters 감자 먹는 사람들>이다.

그때부터 동생 테오의 재정적 도움을 받으며 서신왕래와 함께 본격적인 화가의 길로 들어선다.

열성적으로 많은 그림들을 그리기 시작 하지만 지속되는 가난함과

미래에 대한 어두운 현실은 결국 그에게 우울증이라는 정신장애를 가져다주었다.

 

 

1986년 파리로 옮겨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시작하면서 인상파의 아름다운 색채와

화려한 일본 미술을 접하게 되고 그것이 그의 화려하고 밝은 색채를 쓰는 계기가 되었다.

고갱, 쇠라, 피사로 등..인상파 작가들과 전시도 하면서 활발한 교류도 하지만

무절제한 파리생활에 지친 고흐는

1888년 2월 그동안 그린 200여점의 작품을 가지고 남프랑스의 아를로 떠난다.

 

아를에서의 활기찬 밝은 햇살과 풍경은 과한 음주와 흡연으로 쇠약해진 그를

흥분시키며 색깔은 점점 강열하고 밝아졌다.

 

고흐는 ‘노란 집’에 세 들어 고갱을 기다리며 유명한 ‘해바라기’를 연작으로 그린다.

고갱과 같이 지내며 예술에 관한 견해차이로 격렬하게 논쟁이 시작되어

마침내 귀를 자르는 사건이 발생했다. 고갱은 같이 기거한지 두 달 만에 떠났고

그 충격으로 환각과 망상에 시달리다가 생 레미(Saint-Remy) 지방에 있는

정신병원으로 스스로 찾아가 입원을 했다.

 

1년 남짓 정신병원에 고립 되어 있으면서 그의 작품은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을 포함해

소용돌이치는 특징으로 강렬한 색과 결합되어 감정을 더욱 격렬하게 표현한다.

더욱 열정적으로 꿈틀거리는 듯한 선은 별의 광채를 한층 두드러지게 하고

사이프러스와 올리브 나무의 이미지을 떠오르게 한 곳이다.

 

1890년 5월, 반 고흐는 정신병원을 떠나 파리 근교의 오베르(Auvers-sur-Oise)의

닥터 가셰(Paul Gachet) 가까이 옮겼다.

 

그곳에서 가셰 박사의 깊은 이해로 마음의 안정을 갖는 듯 했으나 얼마가지 못했다.

 

비록 그가 전 인생에 걸쳐 정신적인 병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그의 마지막 몇 년 동안 이러한 고통은 더욱 심각해져갔다.

능력의 절정에서 예술가의 좌절이 더해진 결과 그 당시 그의 심리 상태는 점점 더 악화되었고,

오베르로 온지 두 달 만에 반 고흐는 37세인 1890년 7월27일에

밀밭으로 가득한 들로 뛰쳐나가 가슴에 리볼버를 당겼다.

'아지랑이 가물거리는 오후,

마을 위로 누런 밀밭의 대기가 한방의 총소리로 흩어질 때 아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 사나이는 서른일곱 살의 빈센트 반 고흐였다.

 

그러나 그는 죽지 않았고 얼마나 치명적인 상태인지 알지 못한 채 라부 여인숙으로 돌아와

이틀 뒤 동생 테오가 바라보는 가운데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많이 아프고 짧았던 비운의 삶, 그는 그렇게 갔다!

 

 

“인생의 고통이란 살아있는 그 자체다.”

“La tristesse durera toujours(고통은 영원하다, The sadness will last forever)”

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불멸의 화가이자 현대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화가.

렘브란트 이후 가장 위대한 네덜란드 화가로 인정받고 있으며

인상주의, 야수파, 추상주의, 표현주의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고흐다.

 

 

불꽃같은 정열과 격렬한 필치로 눈부신 색채를 표현했으며,

서양 미술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빈센트 반 고흐.

불과 1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제작된 그의 작품들은

강렬한 색채, 거친 붓놀림, 뚜렷한 윤곽을 지닌 형태를 통하여

그를 자살까지 몰고 간 아픈 영혼의 고통을 인상 깊게 전달하고 있다.

 

 

서른일곱 해의 짧은 생을 살면서 지독한 가난에 시달리며 늘 고독했던 그는

노동자와 농민 등 하층민의 모습과 자연의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소박한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고,

영혼을 담아 그림을 완성했던 그는 그림을 통해서만 말을 할 수 있는 고독한 사람이었다.

종교적인 신념, 인간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했던 고흐의 삶은 현실과 타협하지 않은 채,

고독과 가난 속에서 온전히 예술을 위해 바쳐졌다.

 

 

“예술은, 사람의 영혼에서 솟아나오는 것”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창조하고 행동하는 것”

 

 

완전히 자신을 던져버린 채 작업을 했다. 영혼을 다해 그림을 그린 것이다.

바로 빈센트 반 고흐의 고뇌와 열정의 강열한 랩소디이다.

그러나 정작 살아 있는 동안에는 인정받지 못하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후에야

그의 작품들은 불후의 명작이 되었고, 삶은 신화로 남았다.

 

 

 

 

 

 

 

  

한 인간의 고뇌와 슬픔이 내 마음을 이렇게 울린 적은 없는 것 같다.

내가 고흐가 되어 울다가, 가슴이 답답하다가... 우울하다가,

희망을 가져보다가 또 절망하다가....

마치 내가 그의 처연한 인생 여정을 함께 밟아온 것처럼 마음이 같이 치달았다.

온통 고흐 생각으로 가득 차서 그의 아름답고 슬픈 영혼 속으로

빨려들 듯 휘말려 들어갔다.

 

 

어질고 연약한 그가 예술의 열정으로 얼마나 눈물겹게 그림을 사랑하였는지,

세상과 사람과 사물을 얼마나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는지....

그가 얼마나 자기 삶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 애썼는지...

그러나 얼마나 아팠는지....

자신조차 넘치고 제어하지 못하는 감정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파괴되고

또한 그의 넘치는 감정 때문에

깊은 외로움에서 고통스러워하는 하는 예술가로서의 숙명.

감당할 수없이 넘치는 감정으로 인해 사람과의 관계에 극심한 절망과 외로움을 느낀 나머지

그의 삶은 더 고독해지고 더 어려워지고 더 우울해 졌다.

 

 

너무나 순수하고 연약하여 부서지기 쉬운 영혼을 가졌던 반 고흐.

그러기에 존재에 대한 격한 사랑을 견뎌낼 수 없었던 사람,

그렇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하늘의 운행과 바람의 숨결과 별의 노래를

온몸으로 느끼고 또 그려낼 수 있었던 화가.

바로 그런 진실함이 우리에게 어떤 설명할 수 없는 엄숙함으로,

처연함으로 다가오는 그.

그의 작품이 지닌 진정한 가치는

반 고흐는 누구보다도 자신의 영혼에, 삶의 이치에, 하늘의 부름에 진실했던 작가가 아니었을까.

 

 

아침에 눈을 뜨면... 가만히 생각하면... 뻐근하게 저려오던 순간들이

곧장 내 아픔이었다.

고흐가 내 안에서 아프게 울었다.

 

또 다시 나는 생각한다.

 

 

그동안 미처 깨닫지 못했던,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고흐의 모습에 대해 새로운 깨달음을 느낀다.

‘광기의 화가’ ‘고독한 존재’였던 화가라고 흔히 생각하는 고흐가

실은 그림과 편지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그 어느 누구보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는 진실을 우린 알아야 하지 않을까.

미치광이 같은 광기어린 예술가가 아닌,

누구보다 미술을 사랑하고 아름다운 인생을 산 예술가인 고흐의 삶과 작품,

비록 고독에 몸부림치며 좌절과 불안이 그의 짧았던 삶을 지배한 것 같지만

그의 내면에서 고이 숨 쉬던 그만의 모습을 나는 본 것만 같다,

주어진 삶 앞에 진지하게 탐구하며 지극히 성실했던 참다운 자세,

순수했기에 적당한 타협을 싫어했던 고지식함,

순수했기에 거침없던 자기감정의 표출....

남다른 그의 과열된 열정 등...

세상이 쉽게 말하는 소위 능하지 못해서, 괴팍한 외골수여서....

그래서 주변과 부딪치며 상처를 받아야 했던 그.

순수했기에 상처마저도 남다르게 크게 받았을 고흐 아닐까!

이러한 모습들이 객관적인 시각의 평범한 타인들의 눈에는 과연 어떻게 비쳐졌을까,

그의 뜨겁고 순수했던 여린 감성을 과연 누가 알아 줬을까!

다시 생각하게 된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꽃을 사랑하고

푸르고 너른 하늘 밑 끝없이 이어지는 평화로운 밀밭,

높은 하늘을 향해 끝없이 솟아있는 늘 푸른 사이프러스,

수없이 반짝이는 별 밭들, 해바라기....편지 쓸 때의 그 아름답고 따뜻하던 정이어린 마음....

‘광기의 화가’라는 반 고흐,

그의 안에서 고이 숨 쉬고 있는... 바로 자연인의 아름다운 맑은 영혼이었다.

 

 

 

끝없는 나락으로 추락하던 좌절과 기댈 데 없던 고독, 순간 엄습하던 우울, 불안을

오로지 붓 한 자루에 매달려서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흔들리던 그의 맑은 영혼을 꿈틀대는 붓질로 쏟아내던 고흐!

영혼이 아플수록 붓질은 더 꿈틀대며 휘몰리었고

더욱 더 강렬한 색채로 눈이 부신 작품들을 탄생 시켰다.

그건 살아서 꿈틀대는 그의 아픈 영혼의 외침이었다.

고통으로 부서지는 영혼의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매달리듯 흔들리는 영혼을 열정적으로 쏟아 낼 때만은 그래도 환희의 순간이었고

붓 자루에 물감을 듬뿍 묻힐 때만은 행복했던 고흐.

오직 그림만이 그의 위안이요, 영혼의 안식이고 구원이고 사랑이었다.

고흐가 고흐로....‘진정한 나’ 고흐로 돌아오는 순간이었다.

 

 

‘그림을 그리면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나를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하드라도 아린 이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써도 써도 끝이 없다.

푸른 하늘 우러르면 이 아픈 마음 달래질까!

하늘은 저토록 푸르른데....!

 

 

 

 

         2012. 3. 11. 편집 하늘 새

 

고갱과 뗄려야 뗄 수 없는 고흐, 같은 시대의 절친했던 동료....

내가 좋아서..그래서 또 이어졌다.

‘정열의 화가’로...강열하고 열정으로 꿈틀대는 붓질의 그림에만 몰입 된 채

피상적이고 건성으로만 알았던 고흐였는데

고흐의 흔적을 따라 쫒으며 깊이 헤집고 들어갈수록

점점 내 가슴에 부딪치며 이입되던 아픔에 나도 모르게 눈시울을 붉히곤 했다.

한 줄을 읽고는 눈물짓고 한 줄을 쓰고는... 또 울었다.

짧았지만... 방황하던 맑고 순수한 외로운 한 영혼의 대 서사시에....!

 

 

그는 아프게 세상을 떠났고

그리고 까마득한 큰 세월이 흐른 오늘날이다.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빈센트이지만 그래도 내 울고픈 마음의 위로라도 할 양으로

아니, 그의 아픈 영혼을 어루만져 줄 양으로

이제는 맑은 눈빛으로 환하게 웃고 있을 고흐로 생각해 보고 싶다.

 

 

어쩌면 그의 영혼은

푸른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이었다가,

희망처럼 끝없이 솟아오르는 사이프러스로,

때로는 눈부신 태양 같은 해바라기로 피였다가....

끝없이 이어지는 푸른 들의 밀밭을 부드럽게 일렁이며 스치는 바람이 되어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듯 그렇게 떠 돌 것 만 같다.

 

 

오늘도 푸른 하늘 밑

어딘가의 밀밭에서 부드러운 바람으로 스치겠지.

 

 

어느 누가 그를 품어 안고 사랑하지 않으랴!

 

 

벅차도록 길고 긴 여정 같던 고흐와 함께한 많은 아팠던 시간들,

그래서 많이 힘들었던 시간들이었다.

그래도 지금 난 이렇게 모두가 감사하다.

내가 이 엄청난 걸 해 냈다는 것이....

그런데 왜 또 눈물이 나는지...!

 

 

 

 

 

 

 

고흐가 사망한 그 이 후는...

 

 

 

1889년 4월 17일 네덜란드에서 조한나와 결혼한 테오는,

고흐가 사망한 다음 달인 1890. 8-9 화가이자 고흐의 친구였던 베르나르의 도움으로

파리에 있는 테오의 아파트에서 유작전을 개최하였다.

 

 

그런데 테오 역시 10월에 정신병 발작으로 네덜란드로 이송되었고

형이 사망한지 6개월 후인 1891년 1월 25일 테오도 요독증과 정신병으로 사망하게 된다.

23년 뒤인 1914년 네덜란드의 우트레히트에서 이장하여

고흐가 뭍혀있는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합장하여 안치하였다.

불우했던 반 고흐 형제들의 짧았던 삶은 이렇게 마감되었다.

 

“그림 그리기는 내게 일종의 구원이다.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비참했을 거야.”

 

 

테오는 물론, 막내 동생 코로, 여동생 빌, 어머니와 두 삼촌 등이

정신 질환이나 우울증을 앓거나 요양원 신세를 진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고흐는 유전적으로 정신 질환에 노출될 확률이 높았다.

불행하고 가슴 아팠던 그의 삶은 아마도 그렇게 시작 되었던 것 같다.

 

 

고흐가 자살하기 전 마지막까지 살았던 라부 여관은

현재 고흐 박물관으로 바뀌어 있다고 한다.

 

 

1962년 빈센트 반 고흐 재단이 창설되었다.

 

율리아나 여왕에 의해 반 고흐 재단이 설립 된지 13년 만인 1973년 6월2일

암스테르담에 그를 기념 하는 미술관이 설립되었다.

그전까지는 바로 옆에 위치한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슈테데릭 미술관)에서

그의 작품들을 전시해 왔다.

 

그의 생전 작품 유화 8백70여점, 드로잉 1천 2백여점 중에서

유화 2백여 점, 드로잉 5백50점이 메트로폴리탄 등 세계 각지에 분산되어 있으나

이곳처럼 각 시대별로 고루 수집되어 있는 곳은 없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