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 온달은 사마르칸트 왕족의 아들?
조선일보 | | 입력 2011.05.09 16:03
"바보로 유명한 고구려 온달(溫達·?~590) 장군은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에서 건너온 왕족의 아들일 가능성이 크다"라는 주장이 학계에서 제기됐다.
연세대학교 지배선(64·역사문화학) 교수는 자신의 최근 논문 '사마르칸트와 고구려 관계에 대하여'에서 "온달 장군은 서역인과 고구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다문화가정의 자녀로, 고구려 장군의 지위에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라며 "그를 국제적 인물로 다시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온달에 대한 새 해석이 담긴 이 논문은 5월 첫 주 발간 예정인 백산학보 제89호에 게재될 예정이다.
◆사마르칸트는 실크로드의 중심무대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 지역은 당시 '강국(康國)'이라 불렸던 큰 나라였습니다. 강국은 13세기 몽골제국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실크로드 대상길에 자리잡고 있어 교역 무대였죠. 이 지역은 아시아 대륙의 중앙에 위치해 사방으로 길이 열려 있고, 주변이 평탄해 이동이 유리했던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강국 사람들이 외국으로 교역을 나갈 때는 상인뿐 아니라 자체 호위무사, 책임자 등이 한 집단이 되어, 그 규모가 적게는 수백 명부터 많게는 수천 명에 달했습니다. 동서문명의 교통 루트가 된 실크로드를 개척하는 데 강국 사람들이 선봉 역할을 한 것입니다."
지 교수는 "이같은 지정학적 요인은 비즈니스를 강조했던 강국의 문화와 어울려 당시 고구려와의 국제 교류를 활발하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며 '통전(通典) 권(卷) 193 변방(邊防) 강거전(康居傳)'에 인용된 위절(韋節)의 '서번기(西蕃記)' 기록을 근거로 제시했다. 이 기록엔 당시 강국과 강국 사람들에 대해 "강국인은 모두 장사를 잘하며, 사내아이가 5세가 되면 문자를 익혔고, 장사를 가르쳐 이익을 많이 내는 것을 최고로 여겼다"고 돼 있다.
지 교수는 "당시 상황으로 볼 때, 강국 사람들이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해 머나먼 고구려로 가는 것은 그렇게 큰일이 아니었다"며 "온달의 아버지도 장사를 위해 고구려에 방문한 강국의 상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중앙아시아와 고구려 유민사를 연구하는 지 교수가 주목한 것은 온달과 관련된 각종 고서의 기록. 지난 10년 동안 중앙아시아에 관심을 갖고 연구를 하던 지 교수는 당나라 때 책인 통전(通典)을 비롯해 자치통감(資治通鑑)의 호삼성주(胡三省註), 위서(魏書)의 강국전(康國傳), 북사(北史)의 강국전(康國傳), 구당서(舊唐書)의 강국전(康國傳), 신당서(新唐書)의 강전(康傳), 전당문(全唐文)의 강국왕조륵가(康國王鳥勒伽) 등의 고서를 뒤졌다. 그는 고서에서 '사마르칸트 왕의 성은 온(溫)씨'라고 기록한 부분에 주목했다.◆"온달은 현대의 다문화가정 자녀"
"온달은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유일한 온씨입니다. 우리나라 온씨 계보의 시조이죠. 그런데 중국 정사(正史)인 구당서 권 198 강국전에 따르면 "한대(漢代) 강거(康居)라는 지역에 월씨(月氏)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이 나라에서 나온 온씨(溫氏) 성을 가진 사람이 강국의 왕이 됐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당시 강국과 고구려의 교역이 빈번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온달이 사마르칸트 왕족의 아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 45 온달전(溫達傳) 고구려평강왕시인야(高句麗平岡王時人也)조'에는 온달에 대해 이렇게 전하고 있다. "온달은 고구려 평원왕(平原王·559~590) 때 사람이다. 그의 얼굴은 멍청하게 생겨서 남의 웃음거리가 되었으나, 속마음은 순박하였다. 집이 몹시 가난해 항상 밥을 빌어 어머니를 봉양했다. 다 떨어진 옷과 해진 신으로 거리를 왕래하였으므로 그때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바보 온달이라고 하였다."
이 '바보'가 훗날 평강공주와 결혼해 고구려 장수가 되어, 북주(北周) 무제와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그의 이야기는, 그로부터 1500년이 지난 지금까지 각종 드라마나 연극 소재로 각색되고 있다. 지 교수는 "온달은 오늘날로 치면 다문화가정에서 태어난 이민족의 자녀로, 고구려 육군 지휘관 자리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며 "평강공주를 만나 정규 교육을 받은 뒤, 당시 강국이었던 고구려의 장군 지위에 올랐다"고 말했다.
◆사마르칸트, 아이가 5살 되면 장사 가르쳐
특이한 점은 삼국사기 온달전에는 온달의 어머니에 대한 언급만 있고 아버지에 대해서는 한 줄의 언급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지 교수는 이렇게 해석했다.
"고구려는 귀천이 분명한 사회입니다. 고구려인을 최고로 치고, 그 다음으로 말갈인을 쳤습니다. 가장 신분이 낮았던 계급은 이방인이었습니다. 온달이 바보로 불린 것은 실제로 지능이 낮은 바보가 아니라,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날로 말하면 일종의 왕따 취급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민족의 아들로, 다문화가정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바보'라 불리며 천민 취급을 당했던 것이죠."
지 교수는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의 기록을 인용해 강국 사람들의 기질을 설명했다. "강국 용사들은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정도로 용맹하여 전투할 때 그들의 앞에 나타날 적(敵)이 없었다. 또 강국인은 멀리 교역을 자주 나가 말타기를 잘할 뿐 아니라, 어려서부터 상술을 배우기 위해 타국으로 여행하였다. 그들은 고구려는 물론이고 신라와 백제까지 자기들의 상권으로 삼았다."
지 교수는 "강국인들은 외국과의 교역을 위해 어려서부터 글쓰기와 말타기를 배웠으며, 도적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용맹한 기질을 갖게 됐다"며 "이같은 강국인의 기질이 온달에게도 고스란히 이어졌다"고 말했다.
"온달은 북주 무제와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고, 후에 후주(後周) 무제가 요동을 공격했을 때도 선봉에 서서 반격했습니다. 후일 영양왕 때 신라가 한강 북쪽을 빼앗자 온달이 출정할 정도로 뛰어난 장수였습니다. 이는 온달이 강국의 용맹한 기질을 이어받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이며, 온달의 아버지가 멀리 고구려까지 와서 교역을 했던 강국인이라는 시각과 상통하는 것입니다."
연세대학교 지배선(64·역사문화학) 교수는 자신의 최근 논문 '사마르칸트와 고구려 관계에 대하여'에서 "온달 장군은 서역인과 고구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다문화가정의 자녀로, 고구려 장군의 지위에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라며 "그를 국제적 인물로 다시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온달에 대한 새 해석이 담긴 이 논문은 5월 첫 주 발간 예정인 백산학보 제89호에 게재될 예정이다.
◆사마르칸트는 실크로드의 중심무대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 지역은 당시 '강국(康國)'이라 불렸던 큰 나라였습니다. 강국은 13세기 몽골제국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실크로드 대상길에 자리잡고 있어 교역 무대였죠. 이 지역은 아시아 대륙의 중앙에 위치해 사방으로 길이 열려 있고, 주변이 평탄해 이동이 유리했던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강국 사람들이 외국으로 교역을 나갈 때는 상인뿐 아니라 자체 호위무사, 책임자 등이 한 집단이 되어, 그 규모가 적게는 수백 명부터 많게는 수천 명에 달했습니다. 동서문명의 교통 루트가 된 실크로드를 개척하는 데 강국 사람들이 선봉 역할을 한 것입니다."
지 교수는 "이같은 지정학적 요인은 비즈니스를 강조했던 강국의 문화와 어울려 당시 고구려와의 국제 교류를 활발하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며 '통전(通典) 권(卷) 193 변방(邊防) 강거전(康居傳)'에 인용된 위절(韋節)의 '서번기(西蕃記)' 기록을 근거로 제시했다. 이 기록엔 당시 강국과 강국 사람들에 대해 "강국인은 모두 장사를 잘하며, 사내아이가 5세가 되면 문자를 익혔고, 장사를 가르쳐 이익을 많이 내는 것을 최고로 여겼다"고 돼 있다.
지 교수는 "당시 상황으로 볼 때, 강국 사람들이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해 머나먼 고구려로 가는 것은 그렇게 큰일이 아니었다"며 "온달의 아버지도 장사를 위해 고구려에 방문한 강국의 상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중앙아시아와 고구려 유민사를 연구하는 지 교수가 주목한 것은 온달과 관련된 각종 고서의 기록. 지난 10년 동안 중앙아시아에 관심을 갖고 연구를 하던 지 교수는 당나라 때 책인 통전(通典)을 비롯해 자치통감(資治通鑑)의 호삼성주(胡三省註), 위서(魏書)의 강국전(康國傳), 북사(北史)의 강국전(康國傳), 구당서(舊唐書)의 강국전(康國傳), 신당서(新唐書)의 강전(康傳), 전당문(全唐文)의 강국왕조륵가(康國王鳥勒伽) 등의 고서를 뒤졌다. 그는 고서에서 '사마르칸트 왕의 성은 온(溫)씨'라고 기록한 부분에 주목했다.◆"온달은 현대의 다문화가정 자녀"
"온달은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유일한 온씨입니다. 우리나라 온씨 계보의 시조이죠. 그런데 중국 정사(正史)인 구당서 권 198 강국전에 따르면 "한대(漢代) 강거(康居)라는 지역에 월씨(月氏)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이 나라에서 나온 온씨(溫氏) 성을 가진 사람이 강국의 왕이 됐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당시 강국과 고구려의 교역이 빈번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온달이 사마르칸트 왕족의 아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 45 온달전(溫達傳) 고구려평강왕시인야(高句麗平岡王時人也)조'에는 온달에 대해 이렇게 전하고 있다. "온달은 고구려 평원왕(平原王·559~590) 때 사람이다. 그의 얼굴은 멍청하게 생겨서 남의 웃음거리가 되었으나, 속마음은 순박하였다. 집이 몹시 가난해 항상 밥을 빌어 어머니를 봉양했다. 다 떨어진 옷과 해진 신으로 거리를 왕래하였으므로 그때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바보 온달이라고 하였다."
이 '바보'가 훗날 평강공주와 결혼해 고구려 장수가 되어, 북주(北周) 무제와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그의 이야기는, 그로부터 1500년이 지난 지금까지 각종 드라마나 연극 소재로 각색되고 있다. 지 교수는 "온달은 오늘날로 치면 다문화가정에서 태어난 이민족의 자녀로, 고구려 육군 지휘관 자리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며 "평강공주를 만나 정규 교육을 받은 뒤, 당시 강국이었던 고구려의 장군 지위에 올랐다"고 말했다.
◆사마르칸트, 아이가 5살 되면 장사 가르쳐
특이한 점은 삼국사기 온달전에는 온달의 어머니에 대한 언급만 있고 아버지에 대해서는 한 줄의 언급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지 교수는 이렇게 해석했다.
"고구려는 귀천이 분명한 사회입니다. 고구려인을 최고로 치고, 그 다음으로 말갈인을 쳤습니다. 가장 신분이 낮았던 계급은 이방인이었습니다. 온달이 바보로 불린 것은 실제로 지능이 낮은 바보가 아니라,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날로 말하면 일종의 왕따 취급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민족의 아들로, 다문화가정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바보'라 불리며 천민 취급을 당했던 것이죠."
지 교수는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의 기록을 인용해 강국 사람들의 기질을 설명했다. "강국 용사들은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정도로 용맹하여 전투할 때 그들의 앞에 나타날 적(敵)이 없었다. 또 강국인은 멀리 교역을 자주 나가 말타기를 잘할 뿐 아니라, 어려서부터 상술을 배우기 위해 타국으로 여행하였다. 그들은 고구려는 물론이고 신라와 백제까지 자기들의 상권으로 삼았다."
지 교수는 "강국인들은 외국과의 교역을 위해 어려서부터 글쓰기와 말타기를 배웠으며, 도적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용맹한 기질을 갖게 됐다"며 "이같은 강국인의 기질이 온달에게도 고스란히 이어졌다"고 말했다.
"온달은 북주 무제와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고, 후에 후주(後周) 무제가 요동을 공격했을 때도 선봉에 서서 반격했습니다. 후일 영양왕 때 신라가 한강 북쪽을 빼앗자 온달이 출정할 정도로 뛰어난 장수였습니다. 이는 온달이 강국의 용맹한 기질을 이어받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이며, 온달의 아버지가 멀리 고구려까지 와서 교역을 했던 강국인이라는 시각과 상통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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