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육,해,공군,종합-1

흥남철수작전 (50.12.05~12.24)

바래미나 2011. 4. 20. 00:48

흥남 철수작전은 서부전선의 미 제8군이 중공군에게 패하여 38도선으로 철수하고 있을 때, 동부전선의 미 제10군단(미 제3, 제7, 제1해병사단)과 국군 제1군단(수도, 제3사단)이 흥남에서 해상으로 철수하여 38도선 남방으로 병력을 재전개시킨 철수작전이다.

1950년 11월 27일 유엔군총사령부는 중공군의 위압적인 공세에 밀려 어쩔 수 없이 함경도지구의 전 유엔군에게 '작전상 후퇴'를 지시하게 되고 이튿날 28일, 맥아더 원수는 중공군과의 전쟁이 "유엔군사령부의 권한범위를 벗어나 국제연합과 세계제국의 정치수뇌급"에서 해결책을 제시해야 할 '전혀 새로운 전쟁'임을 공포하였다.

이즈음 트루먼 미 대통령은 중공군의 전면개입에 따른 최후의 대책으로 핵무기 사용을 언급하였으나 곧 영국수상 애틀리의 방미로 일단 없었던 것으로 무마하게 된다.

흥남 철수작전은 미 제1해병사단이 장진호 협곡에서 철수작전을 전개하여 중공 제9병단의 진출을 지연시키고 있는 동안 흥남 지역으로 집결한 국군과 유엔군 부대들이 함흥 외곽지대에 타원형의 저지진지를 구축하고 해병사단의 철수를 엄호하는 한편, 해상철수를 개시하여 12월 24일 마지막 철수부대가 승선할 때가지 근 20일 동안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 철수작전에서 국군 제1군단과 미 제10군단의 병력 105,000명과 17,000대의 차량, 91,000명의 피난민과 350,000톤의 화물을 안전하게 해상으로 철수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 작전의 결과로 국군과 유엔군은 전투력을 보존하여 다음 단계의 작전으로 전용이 가능하게 되었으며, 중공 제9병단은 장진호로부터 함흥 지역 외곽지대에 이르는 사이 연속적인 타격을 입게되어 5개월 후인 1951년 8월 중공군 제4차 춘계공세 때에 겨우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흥남 철수작전의 성공은 아군에게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 되었으며 사기에 큰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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