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김수환 추기경

[스크랩] 우리 안의 그 사람 김수환 추기경

바래미나 2010. 9. 22. 01:04

 

 

 

 

 

 김수환(金壽煥) 스테파노 추기경은 1922년 음력 윤5월 8일(양력 7월 2일) 대구 남산동 독실한 구교우 집안에서 5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조부 김보현(金甫鉉) 요한은 1868년 무진박해 때 충남 연산에서 체포돼 서울에서 순교했다. 조모(강말손)도 함께 체포됐으나 임신 중이어서 석방됐는데 감옥에서 풀려나 낳은 아기가 김수환 추기경의 부친 김영석(金永錫) 요셉이다. 천주교로 인해 몰락한 집안에서 유복자로 태어난 아버지는 옹기장수로 전전하면서 가난하게 살았다. 어머니 서중하(徐仲夏) 마르티나 역시 배우자의 믿음만 보고 가난한 집으로 시집 와서 거의 평생토록 옹기와 포목 행상으로 살림을 꾸렸다.

 마음씨 착한 전형적인 충청도 양반이었던 아버지는 소년 수환이 아직 어린 나이인 초등학교 1학년 때 선종하셨다. 성품이 곧고 거짓이나 불의와는 일체 타협할 줄 모르는 분이었던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밖에 나가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소리를 들어서는 안 된다”며 더 엄하게 자식들을 키웠다.

3살 차이가 나는 형 김동한(金東漢) 신부와 어머니는 유년 시절의 전부나 다름없었다. 형이 초등학교 4학년을 마치고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초등부 5, 6학년 과정)에 갈 때까지 서로 떨어져 본 적이 없을 정도로 형제이자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두 형제가 군위 보통학교에 다니던 어느 날 어머니는 “너희 둘은 이다음에 커서 신부가 되거라”는 말씀을 꺼냈다.
“형과 내가 군위 보통학교에 다닐 때 한번은 어머니가 당신 친정이 있는 대구에 다녀오셨다. 짐작컨대
어머니는 거기 계시는 동안 성당에서 사제 서품의 장엄한 예식을 보고 오신 것 같다. 그때 어머니는
감명을 깊이 받으신 모양으로, 돌아오자마자 우리 둘에게 ‘너희는 이 다음에 신부가 되라'고 이르셨다.
형은 그 이듬해 대구에 있는 신학교 예비과로 옮겼고, 2년 후 나도 가게 되었는데 형은 기쁘게 갔으나
나는 그렇지를 않았다. 어머니의 명을 따라 갔을 뿐이다”
(「샘이 깊은 물」1984 ).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5년제 소신학교(小神學敎)인 동성상업학교(지금의 동성고등학교) 을조(乙組)에 입학했다.
[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 시절(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 ]
 동성학교 시절 민족혼을 일깨우는 선생님의 말씀을 들을 때면 울분이 치솟았다. 그래서 ‘황국 신민으로서 그 소감을
쓰라’는 시험 문제에 “나는 황국 신민이 아님. 따라서 소감이 없음”이라고 썼다가 교장실에 불려가 크게 야단을 맞았다.

이 일로 학교에서 쫓겨나는 줄 알았는데 일본으로 유학을 다녀오라는 대구대교구장의 명령을 받게 된다. 동성상업학교 졸업 후 1941년 4월 도쿄 조치(上智)대학으로 유학길에 오른다.

유학중 제2차 세계대전으로 중단했던 학업을 1947년 9월 혜화동 성신대학 (지금의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 복학해
마치고 1951년 9월 15일 대구 계산동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됐다.

 

 

 “과연 한평생을 착한 목자로 살 수 있을까? 장점보다 단점이 많은 내가 오히려 하느님 앞에 죄인으로 남을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은가. 그렇다면 내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성찰하고 고백해야 할 것은 ‘하느님 저는 죄인이오니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말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결국 시편 51편에서 찾아낸 ‘하느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구절을 상본에 써넣었다.…
 13살 나이에 어머니한테 등 떠밀려 소신학교에 들어가 30살에 사제가 되었다. 18년 동안 하느님의 부르심에
회의를 여러 번 느꼈고, 신학교를 떠나고 싶은 마음에 꾀병을 내어 한 학기 건너뛰기도 했다. 그러나 하느님은 조금도 변함없이 나를 한 길로 이끄셨다. 그 큰 섭리와 은혜에 엎드려 감사드렸다. 특히 어머니의 기도를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그 해 69세이셨던 어머니는 ‘자식이 신부가 되는 게 소원’이었던 당신의 꿈이 이루어지는
가슴 벅찬 순간을 맨 앞자리 마룻바닥에 꿇어앉은 채 지켜보고 계셨다. 그날 막내아들이 신부가 된 것을 보고 기뻐하시는 어머니의 주름진 얼굴에서 기도와 눈물로 얼룩진 인고의 세월을 읽을 수 있었다.”
(평화방송 평화신문,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 사제서품식 후 어머니와 함께(1951. 9. 15) ]
 사제 수품 후 곧바로 안동성당(지금의 안동교구 목성동 주교좌성당) 주임신부, 1953년 4월 대구대교구장 비서,
1955년 6월 김천성당(지금의 대구대교구 황금동성당)주임 겸 성의중고등학교 교장을 지냈다. 일선 본당신부 생활은
안동성당과 김천성당을 합쳐 3년이 채 안되지만 김 추기경은 이때를 ‘꿈처럼 아름다웠던 시절’로 회상하곤 했다.

 

 

  1956년에는 독일 뮌스터대학 유학길에 올라 은사이신 요셉 회프너 추기경을 만나게 된다. 김 추기경은 회프너 추기경에게 ‘그리스도 사회학’을 배웠는데, 그리스도 사상에 기초한 인간관과 국가관 등을 정립하는 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무렵 광부와 간호사로 일자리를 찾아 독일에 건너온 한국 노동자들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기도 했다.

한편 유학시절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의 소식을 접하면서, 가톨릭교회가 문을 활짝 열어 새바람을 맞아들이고 쇄신을 통해 시대 변화에 적응하려는 모습을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는다. 공의회를 통해 자성하고 변화하는 교회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교회가 사회에 대해 자각해야 한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체험은 그의 사상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훗날 주교와 추기경으로 소임을 수행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귀국 후 1964년 6월 가톨릭시보사(지금의 가톨릭신문) 사장으로 취임했다. 당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가 한창 무르익던 시기로, 그는 다른 어떤 사제보다 먼저 시시각각으로 들어오는 공의회 관련 외신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세상을 위한 교회’가 되려면 종교 매체도 세상 사람들과 소통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던 그는 사회적 사건과
흐름을 신앙적 눈으로 조망하는 주제의 사설(社說)을 지면에 자주 실었다. 이 무렵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근본정신인 ‘변화와 쇄신’이라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한국 교회는 어떻게 변해야 하고 무엇을 쇄신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
아브람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났다.”
(창세기 12장 1-4절).
 성무일도(聖務日禱)를 드리며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부분을 묵상하던 1966년 3월 초순 어느 날이었다.
김수환 신부는 부산교구에서 분리, 새 교구로 설립된 마산교구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됐다는 소식을 듣는다. 44세의 젊은 나이였다.

 주교 서품식과 교구장 착좌식(着座式)은 1966년 5월 31일 완월동 성지여중고 교정에 열렸다. 김수환 주교가 사목표어로 택한 말씀은 ‘여러분과 또한 많은 이들을 위하여(PRO VOBIS ET PRO MULTIS)’였다.
이 문구를 훗날 서울대교구장에 착좌할 때도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라고 해석을 조금 고쳐서 그대로 사용했다.
주교수서품식·교구장 착좌식장에 입장하고 있다.
왼쪽부터 서정길 대주교, 김수환 주교, 최재선 주교, 노기남 대주교(1966. 5. 31)
  “예수님은 성체성사를 세우시면서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당신의 몸과 피를 내어 주신다고 말씀하셨다.
신앙인의 삶이란 게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처럼 세상 사람들을 위해 나 자신을 온전히 내놓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어떤 사람을 하찮은 존재로 무시할 때 ‘저 사람은 우리 밥이야!’라는 표현을 쓴다. 주님은 그 정도로 당신을 낮추고 비우면서까지 우리 밥이 되어 주셨다. 나 역시 예수님처럼 모든 것을 바쳐서 모든 이에게 밥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정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표어대로 살지 못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평화방송·평화신문,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초대 마산교구장으로 교구의 기초를 닦으면서 한시도 떠나지 않은 생각은 ‘어떻게 하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대로 살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김수환 주교는 1968년 2월 9일 한국 교회에서는 처음으로 대 사회적 발언을 한다. 노동자들의 인간 존엄성을 되찾기 위해 나선 것이다. 가톨릭노동청년회(JOC; Jeunesse Ouvriere Chretienne)의 총재주교였던 그는 합법적 노동조합을 탄압하고 노동자를 불법 해고한 ‘강화 심도직물 사건’에 맞서 ‘사회 정의와 노동자 권익 옹호를 위한 주교단 공동 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 발표 이후 정부가 사태 수습에 나서 6일 후 해고자들이 전원 복직되는 것으로 사태는 일단락됐지만 이후로도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생존권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절규는 끊이지 않았다. 그때마다 김 추기경은 그들을 큰 품으로 끌어안았다.

 김 추기경은 근대화의 과정에서 파생된 한국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점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인간의 기본권과 사회 정의가 지켜져야만 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1968년 4월 어느 날, 김수환 주교는 그의 표현대로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식을 듣는다. 대주교로 승품되어 서울대교구장직을 맡게 됐다는 소식이었다. 은퇴한 노기남 대주교에 이어 제12대 서울대교구장에 임명된 것이다.

 마산교구의 초대교구장으로 주교직에 오른 지 2년밖에 안 된, 주교단에서도 제일 막내였기에 그의 머릿속에 맴돈 말은 ‘왜 하필 내가?’라는 반문뿐이었다. 더군다나 당시 서울대교구는 해결해야할 여러 가지 문제들이 실타래처럼 엉켜있는 상황이었다.

 1968년 5월 29일 명동대성당에서 엄숙히 거행된 교구장 착좌식에서 김수환 대주교는 이렇게 말했다.
  “서울대교구장으로 착좌하는 짐이 얼마나 무거우며 또한 그것이 우리 교회를 위해 어떤 뜻이 있는가를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저의 힘만으로는 이 자리에 앉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이 자리에 착좌할 수 있는 것은 저를 이 자리로 불러주신 하느님의 인도를 믿는 신앙심과 신자 여러분의 기도와 협력 때문입니다. … 또한 제가 모든 이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칠 때에 교회가 하느님의 장막이 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생활로써 증거해달라’는 우리사회의 요구를 명심합시다”
(명동대성당, 교구장 착좌식 1968. 5. 29).
 그리고 이듬해인 1969년 3월 교황 바오로 6세가 발표한 새 추기경 명단에 김수환 대주교의 이름이 올랐다. 한국 최초의 추기경이 탄생한 것이다.

추기경 서임식은 1969년 4월 28일 로마 베드로 대성당에서 열렸다. 당시 김 추기경의 나이는 47세로, 전 세계 추기경 134명 가운데 최연소였다. 교황을 보필하고 교황 선거권과 피선출권을 갖는 고위 성직자라는, 자리의 높고 낮음을 떠나 한국 교회가 세계 교회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크다는 반증이었기에 한국 천주교회 2세기만의 큰 경사였다.
[ 교황 바오로 6세에게 추기경 반지를 받고 있다(로마 베드로 대성당, 1969. 4) ]
 김수환 추기경은 이후 30년 동안 서울대교구장으로 재임하면서 두 차례에 걸쳐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을 역임했고, 주교회의 산하 여러 분과 위원장과 전국 단체들의 총재를 맡았으며, 1975년 6월 1일부터 평양교구장 서리를 겸했다.

 또 1970년에는 아시아 천주교 주교회의 구성 준비 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967년 이후에는 한국 대표로서 여섯 차례에 걸쳐 세계 주교 대의원 회의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김수환 추기경은 1998년 5월 29일 서울대교구장과 평양교구장 서리직을 사임한다. 서울대교구장을 맡은 지 30년, 목자 생활 47년 만이었다.
 “1998년 서울대교구장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최선을 다해 일했다. 다른 사람들이 점수를 매긴다면 겨우 낙제점을 면할 정도겠지만 내 나름대로는 십자가를 지고 걷는 심정으로 살아왔다. 힘들고 지쳐서 그 십자가를 내려놓고 싶을 때도 많았다. 특히 1970년대와 1980년대 사회 격동기의 한가운데 있을 때, 그로 인해 교회 안에서조차 압력과 비난이 쏟아질 때는 한 사제로서, 또 한 인간으로서 감수해야 하는 고통이 어떠했는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그럴 때마다 나를 사랑해 주시는 분들의 기도와 격려가 큰 힘이 되었다. 내가 주님께서 주신 십자가를 벗어 던지지 않고 끌고라도 갈 수 있었던 힘은 많은 이들의 기도에서 나왔다고 생각한다”
(평화방송·평화신문,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김수환 추기경이 교구장 생활을 한 30년 동안 교회는 발전을 거듭했다. 서울대교구장으로 착좌할 당시인 1968년 말
서울대교구의 규모는 본당 48개, 공소 63개, 신자 14만 명이었다. 30년 후인 1998년 말에는 본당 203개, 공소 6개,
신자 125만 명으로 크게 성장했다.

 아울러 김수환 추기경은 선교사 없이 신앙이 전파된 한국 천주교회의 형성과 발전이 세계 천주교회 속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을 전세계에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1984년 5월 6일에는 한국을 처음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모시고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 기념과 103위 시성식을 여의도 광장에서 개최했다. 순교의 피로 전해져 내려온 한국 교회의 신앙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제44차 세계 성체대회 장엄미사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평화의 인사를 나누고 있다(여의도 광장, 1989. 10. 8)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9년에도 한 번 더 방한해 제44차 세계 성체대회를 주례했다. 세계 성체대회를 계기로
1988년에 시작한 ‘한마음한몸운동’은 성체성사의 깊은 뜻을 삶으로 실천하자는 운동으로 지금까지 많은 결실을 맺었다. 현재 국내외 원조사업과 백혈병 어린이돕기, 골수·제대혈기증, 장기기증, 국내입양운동 등의 사업을 꾸준히 펼치고
있다.

 

 김 추기경은 북한 교회와 동포를 항상 기억하려고 노력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서울대교구의 관할 구역이 휴전선을 넘어서 황해도까지 이어진다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었다. 미사 마침예식에서 주교는 오른손으로 세 번 십자표시를 하면서 신자들에게 강복하는데 김 추기경은 언제나 그 마지막 세 번째 십자표시를 마음에 품고 있는 북녘 형제들을 생각하면서 그었다고 한다.

 통일에 대비하고 앞으로의 북한 선교를 위한 실질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1995년 ‘민족화해위원회’를 설립하게 된다. 같은 해 3월 7일 명동대성당에서 시작된 ‘민족화해미사’는 지금도 매주 화요일 오후 7시에 봉헌되고 있다.
[ ‘굶주리는 북녘동포를 생각하는 옥수수죽 만찬’(1997. 4. 12) ]
[ 민족화합의 대미사 후 도라산 역 전망대에서(2003. 6. 22) ]

 

  “이 세상 누구도 존중받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것이 제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주목한 이유입니다. 그들을 위한 ‘우선적 사랑’에서 더 나아가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사랑’으로 가야 합니다.”
  그 믿음 때문에 추기경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그를 만나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시간을 베풀었다. 그를 만나고 싶어
하는 이들은 많았지만, 추기경이 우선순위를 둔 이들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었다. ‘교회는 가난한 이들의 눈물을 닦아 주어야 한다’는 믿음에서였다. 서울대교구장의 바쁜 일정 가운데도 해마다 성탄 전야에는 소외된 이들을 찾아가
성탄 미사를 함께 드리기도 했다.
양평동 철거민촌 ‘복음자리’ 성탄성야미사 후(1977. 12. 24)
 1970년대 민주화운동의 편에 선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지학순 주교가 구속되기까지 한 1974년 민청학련 사건, 1978년 동일방직노조 사건 등 김 추기경은 성탄·사순 메시지나 강연, 시국담화문 등을 통해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짚어내는 일에 앞장서기 시작했다. 70-80년대를 지나는 동안 김 추기경은 우리사회 민주화 운동의 버팀목이자 잣대였다.
 “정의를 위해 싸우는 것은 결국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그것은 인간을 위하고, 인간다운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인간다운 삶이 유린되는 사회와 개인을 구원하여 사랑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사랑하기 위한 싸움에서 미움만이 남아있는 경우가 없지 않은지 우리는 반성해야 합니다. 때문에 불의를 보고 분노하며 자신의 개인적 안락과 미래까지도 포기하면서 정의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싸우는 이들도 이 민족을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한다면, 이 민족 사회가 결코 미움과 대립의 사회가 되지 않고 사랑의 사회가 되기를 원한다면, 그분들도 먼저 하느님과 화해해야 합니다”
(정의와 평화를 구하는 9일 기도 메시지, 1986. 3. 9)
지학순 주교의 ‘유신헌법 무효’ 양심선언 현장에 함께 한 김수환 추기경(1974. 7. 23)
  교회의 지도자이자, 사회의 큰 어른으로 격동의 시대를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고독한 일이였다. 정부 압력은 물론 교회 안에서 쏟아지는 비판까지도 홀로 감수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1970-1980년대 격동기를 헤쳐 나오는 동안 진보니, 좌경이니 하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다. 정치적 의도나
목적을 두고 한 일은 더더욱 없다. 가난한 사람들, 고통받는 사람들, 그래서 약자라고 불리는 사람들 편에 서서
그들의 존엄성을 지켜 주려고 했을 따름이다. 그것이 가난하고 병들고 죄지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사시다가 마침내 목숨까지 십자가 제단에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라고 믿었다”
(평화방송·평화신문,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평생을 두고 김수환 추기경의 생각을 지배하는 큰 주제는 ‘인간’이었다. 인간을 위해 자신의 삶과 전 존재를 바치는
모범을 보여준 스승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고자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했다.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짙은 안개 속 같은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절대 중심을 잃지 않고, 바른 항해길을 인도하기 위해서 그가 짊어져야 했던 십자가는 너무나 막중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1987년 6·10 민주항쟁 때도 명동성당 공권력 투입이라는 일촉즉발의 위기를 그런 믿음 하나로 막았다.
 “성당 안으로 경찰이 들어오면 맨 앞에 내가 있을 것이고, 그 뒤에 신부들, 수녀들이 있을 것이오.
우리를 다 넘어뜨리고 난 후에야 학생들이 있을 것이오.”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김 추기경의 관심은 도시빈민· 탈북주민?·국인 노동자?·매매 여성·미혼모·무주택자 등 매우
다양한 소외 계층으로까지 확산됐다.
[ 1979. 4. 24 영등포 교도소 미사 ]
 “우리 자신이 변해야 세상이 변합니다. 우리들 하나하나가 진실한 인간, 정의의 인간, 사랑의 인간이 되어야
세상이 진리와 정의와 사랑으로 가득 찬 세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묵은 내가 죽고, 새로운 나, 그리스도를 닮은 새 인간이 내 안에서 나고, 자라고, 성숙해지는 것입니다.”(영등포 교도소 미사 강론, 1980. 4. 24)
[ 사형수들을 위한 미사강론 ]
 “언제 어떻게 죽느냐? 하는 차이는 있어도 결국 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는 여러분이나 저나 이 자리에
있는 누구나 세상사람 모두 같습니다. 그러기에 사형수라는 처지가 결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결정적인 것은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얻느냐? 얻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주님은 바로 우리 인간이 죽음의 운명을 쓰고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우리는 위해 오셨고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구원하셨습니다.”
(서울구치소 사형수들을 위한 미사강론, 1999. 7. 2.)
[ 1983. 1 미얀마 아웅산 참변 희생 100일 추모 미사 ]
 “미얀마의 수도 랭군에서 여러분의 사랑하는 이들이 폭사할 때 하느님도 함께 폭사하셨습니다. 그 기막힌
죽음의 쓴 잔을 하느님도 함께 마셨습니다. 그분들과 함께 계시다가 죽음의 순간에는 물러서고 마는 그런
하느님을 우리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당신 아들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릴 때 함께 매달리셨던 것처럼 그렇게 하느님은 여러분의 사랑하는 분들의 죽음과 고통 속에서도 역시 함께 계셨습니다.”
(아웅산 참변 희생자 100일 기일 미사강론, 1984. 1. 15)
[ 1985. 8. 27~29 사북 탄광에서의 현장 체험 ]
 추기경은 가난한 사람 속에 현존하는 하느님을 만나는 현장 생활 체험, 즉 아시아 사회 주교 연수회(BISA)의 일환으로 사북 탄광을 찾았다. “피상적으로 듣고 보았던 현실보다 현장의 어려움은 너무 심각했습니다.…교회의 제반 여건이 그들과 무관하지 않으면서도 그들과 거리가 멀어진 삶을 살고 있어 현장 생활 체험이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번 기회는 우리 주교 자신들에게 커다란 반성의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현재 교회 공동체가 진정한 공동체인가 자문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주교는 물론 성직자?평신도들에게까지 현장 생활 체험이 확산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가톨릭신문, 1985. 9. 15 인터뷰)
[ 1989. 2. 19 ‘막달레나의 집’ 방문 ]
 “추기경님은 막달레나의 집 식구들이게 행복하고 건강하라는 덕담과 함께 오천원씩 세뱃돈을 주었다. 누구에게든 똑같이 오천 원씩 주었다. 그러자 식구 한 명이 문제 제기를 했다. ‘추기경님, 이건 좀 불공평해요. 애들도 오천 원, 어른은 좀 더 주셔야죠.’ 추기경님은 눈이 안보일 정도로 껄껄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나한테는 자네들이 다 어린아이라네.’”(《막달레나, 막달래나?》에서)

 추기경은 매춘 여성들의 인권을 보호하고 사회 복귀를 도와주고 있는 ‘막달레나의 집’을 처음으로 방문하였다. 막달레나의 집을 운영하는 이옥정씨는 추기경이 방문하던 날에 대하여 “들뜬 마음으로 추기경님을 맞이했는데 옷차림이 좀 이상해 보였다. 텔레비전에서 보던 근엄하고 깔끔한 모습과는 달리 후줄그레한 감색 점퍼에 구김이 심하게 진 허름한 바지를 입고 나타나셨다. 동행자라곤 딱 비서 한 명뿐이었다.”라고 적었다.
(《막달레나, 막달래나?》에서)

 “올바른 사랑의 실천으로 에이즈를 예방하고 감염자들이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도록 사회적 여건과 분위기를 조성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한국 에이즈 연맹 창립2주년 기념 조찬회 격려사, 1995. 7. 7.)
[ 외국인 근로자를 위한 미사 ]
 “필리핀의 전 대통령이신 코라손 아키노 여사가 연초에 이곳을 방문했을 때, 저는 이곳에서 여러분 모두와
함께 미사를 드리겠노라고 약속한 바가 있습니다.…여러분들은 고향과 가족을 두고 여러분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위해 머나먼 나라인 한국으로 떠나 왔습니다. 여러분은 때로는 향수병으로,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떨어져 있음으로 해서 힘드시리라고 생각합니다.…설상가상으로 여러분은 때때로 부당하거나 혹독한 대우를 받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이는 끔찍한 일이며, 저는 그와 같은 일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길 바라고 기도합니다.”
(외국인 근로자를 위한 첫 미사 강론, 1994. 4. 24.)
[ 1988년 장애인 올림픽 ]
  “성화를 여기 밝힌 목적은 장애자 올림픽을 계기로 장애자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드높이기 위해서입니다.
 즉 우리 자신을 비롯하여 교회의 모든 이가, 나아가 우리 사회의 모든 이가 이 횃불처럼 장애자에 대한 사랑의 불을 밝히고자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또 하나는 이 횃불은…저 자신의 해석일 수 있겠습니다만…장애자들이 자신들이 겪는 시련을 용감히 극복함으로써, 우리를 위하여 밝히고 있는 희망과 사랑의 등불입니다.”
(장애인 올림픽 성화 명동성당 안치 및 장애인을 위한 미사 강론, 1988. 10. 15)

 남북한 장애인 걷기 본부가 주최한 이 행사에서 장애인 73명에게 보장구 및 생활 보조금을 전달하였다. 총재인 추기경은 격려사를 통해 “보장구나 성금을 보내는 일 그 자체보다 장애인에 대한 우리 모두의 의식 변화가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사랑의 보장구 보내기 전달대회, 1994. 4. 12.)

 「세계의 장애인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사회와 교회에서의 장애인 소외 현상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나라 사회가 언제 참된 인간다운 사회가 되느냐? 그것은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사라질 때입니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극복’ 프로그램진행자 김연종 박사와의 대담, 1996. 5. 4.)
[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희생자를 위한 미사 ]
 “우리는 외양으로는 그럴싸하게 화려하게 큰 집을 짓고 새 도시를 건설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으로
모래 위에 지은 사상누각에 불과하였습니다. …우리가 좀 더 정직하였더라면, 좀 더 성실하고 책임감이 있었더라면, 돈보다는 사람을 먼저 생각할 줄 알았더라면,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거나 망해 버린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루가 9,25)고 하신 복음 말씀대로 인간과 인간 생명이 모든 가치 중에서 제일간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살아왔더라면, 그리고 누구보다도 우리 정치인과 경제인들에게 이런 인간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돈이나 권력에 대한 욕망에 앞서 있었더라면 이런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희생자를 위한 미사 강론, 1995. 7. 16.)
[ 일본군 위안부 인권 회복을 위한 기도회 ]
 “저는 이 문제에 대하여 금년 1월 10일부로 일본의 무라야마 수상에게 편지를 쓴 일이 있습니다. 편지 내용은 일본 정부가 위안부 문제에 대하여 국가로서 개인 배상을 하지 않고 민간 모금으로 피해자에게 ‘위로금’을 지급할 방침을 세운데 대하여 강력히 유감의 뜻을 표한 것이었습니다. …병사들의 성적 욕구 충족을 위해 여성을
전쟁터에 강제로 끌고 가서 강간을 일삼은 것은 분명히 윤리와 도덕에 반하고 여성에 대한 더할 수 없이 큰
모독이며 용서받을 수 없는 인권 유린입니다.…일본은 과거 제국주의 시대에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범한 모든 반인륜적·반도덕적 죄를 깊이 인식하고 뉘우치고 사죄해야 합니다. 그럴 때 일본은 참된 의미로 우리의 이웃이 될 수 있고 일본 자신도 큰 나라로 인정받을 것입니다.”
(일본군 위안부 인권 회복을 위한 기도회 미사 강론, 1995. 12. 4.)
 김수환 추기경은 하느님께서 주신 고귀한 생명의 가치가 사라져 가는 것을 크게 안타까워했다.
 “오늘날 불행하게도 귀한 생명의 소중함을 깊이 깨닫지 못하고 있다. 많은 생명이 이 땅에서 죽어가고 있다. 낙태가 그렇고 교통사고로 죽는 건수가 세계에서 제일 높은 것이 그렇고, 이보다 수적으로 더 많아지는 자살이 그렇다. 생명 존엄과 그 가치를 모르면 이는 인간으로서 기본 가치를 모르는 것이다. 인간 존중, 인간 사랑이 없는 곳엔 삶의 가치도, 의미도 없다. 이런 사회는 죽음의 문화가 지배하는 사회다. 우리는 지금 생명이냐, 죽음이냐 갈림길에 서 있다. 참으로 깊이 반성해 봐야 할 것이다. 생명은 어머니 뱃속 잉태 순간부터 시작되고 작은
배아도 인간이다. 생명운동이 전 교회와 사회로 확산되길 바란다“
(명동대성당, 2005. 12. 4 생명미사 축사).
 추기경 김수환.
서울대교구장직에서 물러났지만 여전히 정겨운 벗이자 착한 목자로 우리 곁에 머물러 있다.
‘혜화동 할아버지’의 넉넉한 웃음과 힘있는 강론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고 있다.

 

 

 

  교회는 이처럼 어떤 누구도 소외됨이 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를 사랑으로 하나되게 하는 도구요, 이를 나타내는 표지여야 합니다. 교회 쇄신이란 바로 이러한 정신으로 이웃과 사회, 세계를 위해 봉사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누구나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먼저 그러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분을 주변에서 찾아 나름대로 그분의 신앙을 본받으려 합니다. 1968년 5월 29일 제12대 서울대교구장으로 임명된 이래 지금까지 40여년 동안 하느님의 목자로서, 양심의 대변자로서 스스로에게 충실해 온 김수환(金壽煥, 스테파노) 추기경의 신앙과 삶은 '너희와 모든이를 위하여'라는 말의 실천이었습니다.

 

 

   ▣ 약력    
   1922년 5월 8일    대구 출생(음력)
   1933년    성 유스티노 신학교 예비과 입학(대구)
   1941년 3월    서울 동성상업학교 (현 동성고등학교) 을조(乙組) 졸업
   1941년 4월    일본 조치(上智)대학교 입학
   1944년 1월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하여 학업 중단
   1947년    성신대학(현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편입
   1951년 9월15일    사제 수품 · 안동성당(현 목성동성당) 주임
   1953년 4월    대구대교구 교구장 비서
   1955년~ 1956년    김천성당(현 황금성당) 주임 겸 성의중고등학교 교장
   1956년~ 1963년    독일 유학, 뮌스터대학교 대학원 사회학 전공
   1964년~ 1966년    가톨릭시보사(현 가톨릭신문)사장
   1966년 5월31일    주교 수품, 마산교구장 착좌
   1968년 5월29일    대주교 승품, 제12대 서울대교구장 착좌
   1969년 4월28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하여 추기경 서임
   1970년~ 1975년 10~ 2월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1차 역임)
   1975년~1998년    평양교구장 서리 겸임
   1981년~ 1987년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 (2차 역임)
   1998년 5월29일    서울대교구장 및 평양교구장 서리 퇴임
   2009년 2월16일    선종
   ▣ 상훈    
   1970년 8월    국민훈장 무궁화장
   2000년 5월    제13회 심산상(성균관대학교)
   2000년 11월    제2회 인제 인성대상(인제대학교)
   2001년 1월    대십자 공로 훈장(독일)
   2002년 11월    베르나르도 오히긴스 대십자 훈장(칠레)
   ▣ 명예 박사 학위    
   1974년 2월    서강대학교 명예 문학 박사
   1977년 5월    노틀담대학교 명예 법학 박사(미국)
   1988년 11월    조치(上智)대학교 명예 신학 박사(일본)
   1990년 5월    고려대학교 명예 철학 박사
   1990년 10월    시튼홀대학교 명예 법학박사(미국)
   1994년 5월    연세대학교 명예 신학박사
   1995년 6월    푸런(輔仁) 가톨릭대학교 명예 철학박사(타이완)
   1997년 7월    아테네오대학교 명예 인문학박사(필리핀)
   1999년 10월    서울대학교 명예 철학박사

 

 

 

   ▣ 저 서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지식산업사, 1981, 구중서 편)
  이 땅에 평화를 (햇빛출판사, 1988년, 천주교 서울대교구 홍보국 편)
  참으로 사람답게 살기 위하여 (사람과 사람사, 1994년, 신치구 편)
  사회 정의 평화를 위한 기도外 수상록
  김수환 추기경의 신앙과 사랑(가톨릭출판사, 1998년, 천주교서울대교구)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사람과 사람사, 1999년, 신치구 편)
  우리가 사랑한다는 것(사람과 사람사, 1999년, 신치구 편)
  김수환 추기경 전집(가톨릭출판사, 2001년, 전집편찬위원회)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평화방송·평화신문, 2004년)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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