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조선의 ‘서학’ (西學) 수용
한·중·일 동양 3국의 근대화는 이른바 ‘서학’의 수용과 밀접한 연관 속에서 진행되었다. 일반적으로 서학이란 서구 근대 문명을 수용하고 연구하는 학문적 활동을 일컬은 말이다. 그 내용은 크게 ‘이적(理的) 측면인 사상과 종교, ’기적(器的) 측면인 과학과 기술의 영역을 포괄하고 있으며, 명칭에서 한국과 중국은 서학으로, 일본은 ‘난학(蘭學)’으로 좀 다르게 부르고 있다. 조선 서학의 경우, 청나라를 통해 들어온 한화(漢化)된 구라파(유럽)문명이란 뜻에서 ‘청구(淸毆)문명’이라고도 한다. 큰 흐름에서 보면 서학은 동서간 교류로서 그 전파와 수용은 이질문명간의 성공적인 융합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17세기 ‘서세동점’ 문화 충격 동양 3국은 근대화와 서구 대응을 위한 방편으로서 서학을 수용한 점에서는 역사의 궤를 같이 했다. 하지만, 그들이 처한 역사적 환경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서학에 대한 수용태도, 서학이 3국 근대화에 미친 영향은 사뭇 다르다. 이런 현상은 한·일 양국의 서학 수용과정에서 극명하다. 흔히들 조선의 서학 수용을 일러 ‘동도서기(東道西器)’, 즉 전통적 제도와 사상은 지키면서 서구의 근대 과학기술을 받아들인다라고 하며, 일본의 난학 수용은 일본 정신 위에 서구의 유용한 것을 가져와 사용한다는 ‘화혼양재(和魂洋才)’로 표현한다. 중국의 경우는 중국 학문을 바탕으로 서구 학문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에서 ‘중체서용(中體西用)’이란 말을 쓴다. 용어는 달라도 뜻은 그것이 그것이다. ‘동도’나 ‘화혼’, ‘중체’는 ‘이적’ 측면을, ‘서기’나 ‘양재’, ‘서용’은 ‘기적’ 측면을 염두에 둔 낱말들이다. 여기에서 공통된 난제는 서학을 받아들이면서 어떻게 전통을 지키고 계승하는가 하는, 이를테면 전통과 근대의 조화문제다. 한·중·일 서학 수용태도 달라
이렇게 약 150년 간에 걸친 북경 사행을 통해 서서히 전래된 서구문명의 산물 가운데는 화포나 천리경, 자명종, 천문관측의기, 역산법 등 근대적인 과학기술 문물과 정보, 한역된 각종 세계지도와 지리서 같은 서학서가 포함되어 있었다. 새로운 과학문명의 도입은 기술을 일종의 ‘잡기(雜技)’로 깔보며 중화주의적 세계관에 젖어있던 조선 유교사회에 커다란 자극을 주었고, 급기야 근대 서구와 만남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 만남이 마침내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선도한 조선의 서학을 낳게한 것이다. 요컨대, 조선 서학은 일본과 같이 외래의 서구인들이나 국가권력의 개입 등 타율에 의한 것이 아니라 조선인들 자신의 자율적 노력에 의해 받아들였다. 18세기 조선선비 필독서로
18세기 중엽에 이르면 조선에서 서학서는 선비들이 유불제가 경서처럼 서재에 꽂아놓고 읽는 필독서로 되고, 다산의 회고처럼 청년학도들이 서양서를 탐독하는 것이 하나의 ‘기풍’(氣風, 유행)일 정도로 서학은 널리 유포되고 있었다. 그만큼 서학 연구가 심도를 더해가면서, 서학에 대한 대응책도 전면 배격과 전면 수용, 그리고 ‘기적’ 측면만 수용하고 ‘이적’ 측면은 배격하는 이원적 대응 등 세 가지로 갈라졌다. 이러한 분파에 앞서 서학의 조사라고 하는 성호 이익(1681~1763년)은 서학의 과학기술 영역에 관해서는 다각적인 검토를 가해 그 선진성을 이해하고, 중화주의적 지리관으로부터의 탈피를 시도했다. 그러나 서학의 윤리종교 영역에 대해서는 기독교가 유교의 상제사상과 상통하는 점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지옥설 같은 일련의 부조리를 잉태하고 있다고 하면서 배척했다. 서학의 개조격인 이익의 사상을 기조로 해서 학계에서는 대응을 놓고 논의가 분분했는데, 순암 안정복(1712~1791년)을 비롯한 배격파는 서학의 수용을 전면 거부하면서, 서학을 연구하되, 그것은 받아들이려는 것이 아니라, 전통적으로 바른 학문인 유학을 보위하기 위해서라고 주장한다. 이에 반해 다산 정약용(1762~1836년)을 비롯한 남인계 학자들은 서학의 ‘이적’ 측면이건 ‘기적’ 측면이건 간에 다 수용할 것을 설파한다. 다산은 서교(西敎), 즉 천주교에 입교했다가 정조의 명을 받고 스스로 멀리하겠다는 ‘자벽서’까지 지었지만, 바깥은 유교이고 속은 예수교라는 ‘외유내야(外儒內耶)’의 평을 받을 정도로 서교와의 인연은 끊지못했다. 그에게 더 중요한 것은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백성을 유복하게 만드는 이용후생을 위해 서학에서 실용적인 기예(技藝)인 과학기술을 탐구 터득하는 것이었다. 수원성 축조공사 때 거중기를 발명해 돈 4만 냥을 절약한 것은 그 본보기다. 서구 과학기술 도입 한목소리
일본의 난학은 네덜란드어의 습득과 네덜란드 책의 독파로부터 막을 연 나가사키난학 시대를 거쳐 18세기 말엽에 에도난학 시대를 맞으면서 난학의 학문적 연구가 본격화된다. 소총을 비롯한 화기를 도입하면서 병학이 생겨나고, 총상의 치료를 위해 ‘홍모(紅毛: 화란)의학’이 도입되며, 각종 천문학 서적이 출간된다. 조선의 서학과는 달리 일본의 난학은 장장 2세기 반동안의 가혹한 쇄국정책에 묶여 그 속의 서양 종교는 구교건 신교건 간에 모두가 시종 엄금되어 일본에 발붙일 여지가 없었다. 오로지 과학기술의 수용만이 허용되었다. 물론 일본의 국가적 과학기술 일변도 정책이 명치유신으로 대변되는 근대화의 성공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가 없다. 엘리트 중심 수용 한계 드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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