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고려와 이슬람의 만남
이슬람이란 이슬람교를 바탕으로 한 문명 전반에 대한 범칭이다. 한국과 이슬람의 첫 만남은 통일신라 때 이뤄졌으며, 고려시대에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초엽에는 아랍 상인들이 대거 몰려와 교역을 하고, 말엽에는 주로 원나라를 통해 이슬람이 본격적으로 한반도에 전해졌다. 그리하여 한반도 안에서 사상 처음 이슬람공동체가 적은 규모나마 형성되었고, 그 흔적은 오늘날까지도 남아있다.
<고려사>나 <고려사절요> 등의 사서를 펼쳐보면, 이슬람을 지칭하는 ‘회회(回回)’나 이슬람교도 무슬림을 일컫는 ‘회회인’에 관한 기사가 간간히 눈에 띈다. 고려 초기인 1024년과 1025년, 1037년 열라자와 하선을 비롯한 회회 상인들이 100여 명씩 무리지어 개경에 와서 수은, 몰약(방부제), 소목(외과용 약) 같은 진귀한 공물을 바쳤다. 고려왕은 객관까지 마련해 후대하고, 돌아갈 때 황금과 비단을 하사하기도 했다. 열린 나라 고려의 아량으로 맺어진 이질적 문명간의 범상찮은 만남이었다.
고려말 원간섭기때 본격 유입
이슬람 세계는 이때가 압바스왕조(751~1258년)의 전성기였다. 이슬람 문명이 세계를 향해 종횡무진 파급되어 급기야 한반도까지 물결이 밀려왔던 것이다. 그러다가 몽골군의 서역원정으로 제국이 붕괴되자 물결은 일시 가라앉고 말았다. 그래서 고려 중기에는 만남의 자취를 별로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만남에 영원한 단절은 없으며, 한때의 멈춤은 또 다른 만남을 위한 쉼표이자 뜀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 대악후보(大樂後譜) 6권에 실린 「쌍화점」악보 <이슬람문명>, 창작과비평 |
고려 말엽 원나라 간섭기와 때를 맞추어 이슬람의 한반도 유입은 본격화된다. 통칭 ‘색목인(色目人)’이라고 불리는 서역 무슬림들이 몽골인들의 후광 속에 밀려왔다. 원 제국에서 색목인들은 몽골인 버금가는 사회적 지위를 누렸다. 내정은 물론, 원정을 비롯한 대외관계에서도 ‘두뇌역할’을 했다. 이슬람 문명의 신봉자도 아니고 이용자일뿐인 유목민들 등에 업혀 이슬람 문화가 반입되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원대 조정에서 ‘문화교수’의 특수한 입지를 점했던 색목인들은 원 제국의 고려 경략과 간섭에 동참하여 ·역관·근위병·시종무관·겁령구(怯怜口:사속인) 등 여러 직분으로 고려에 파견되었다. 상인이나 민간인들도 다수 고려를 왕래했으며 이런저런 이유로 눌러앉아 귀화한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귀화 무슬림들은 중세 한반도 무슬림의 비조가 되어 한반도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대표적 일례가 삼가(三哥) 장순룡(張舜龍)이다.
귀화 무슬림, 고위관직 역임
△ 서역에서 들어온 호적이라 불리는 태평소 (악학궤범) |
삼가보다 뒤늦게 귀화하고 고관직에 오른 무슬림으로 경주 설씨의 시조인 회골(현 중국 신쟝 위구르 지역) 출신의 설손이 있다. 그는 원나라에서 일어난 ‘홍건적의 난’을 피해 망명했는데, 원에 인질로 잡혀갔을 당시 그와 친분을 쌓은 공민왕으로부터 부원후에 봉해지고 전답을 하사받았다. 귀화한 뒤 고려의 대표적 시인으로 활약했으며, 후손들 중에는 조선 개국 때 명나라에 여덟 차례나 사신으로 간 장자 장수(長壽)가 있다. 태조 때 장수가 연산부원군에 봉해지자 계림(옛 경주)을 식읍으로 하사받고 본관을 경주로 정했다. 현재 약 2천명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고려가요 ‘쌍화점’ 에도 등장
△ 덕수 장씨 마을에서 진행되는 ‘장말도당굿’ 장면. 중요무형문화재 제98호. 부천시청. |
이같이 ‘준몽골인’으로, ‘문화교수’로 고려에 온 무슬림들, 특히 귀화한 무슬림들은 고려와의 만남에서 선도적 역할을 하고, 상당한 권력도 행사하면서 나름대로 사회문화적 기여도 했다. 그들은 수도 개경 인근지역에 마을을 이뤄 집단거주하면서 특유의 공동체를 형성했다. 이슬람교 사원격인 예궁(禮宮)에서 일상 예배행사를 열었으며, 회회사문(이슬람교의 스승 이맘)의 인도 아래 집단예배의식인 ‘대조회송축(大朝會頌祝)’을 궁전에서 거행하고 신전에서 왕을 위해 향연을 베풀기도 했다. 충혜왕 때는 무슬림들에게 피륙 판매권을 준 대가로 매일 쇠고기 15근을 상납받았다는 기록도 보인다. 원나라에 보내는 진귀품인 매를 키우고 관리하는 응방 총관도 이들이 도맡았다. 왕실 주변에는 색목인 출신의 최성노 같은 대상인들도 있어 공사무역에 종사하기도 했다.
이처럼 무슬림들이 고려사회에 어지간히 적응하여 ‘고려화’하다 보니, 유행하던 풍자가사의 주인공으로까지 등장한다. 유명한 고려 가요 <쌍화점(雙花店)>이 일례다. 이 속요는 4절로 되어 있는데, 첫 절이 회회 남자와 고려 여인간의 로맨스다. 지금말로 풀이하면, “쌍화점에 쌍화를 사러가니 회회아비가 내 손목을 쥐었다. 이 소문이 상점 밖에 퍼진다면 새끼 광대인 네가 퍼뜨린 것인 줄 알리라“란 내용이다. 이를 혹자는 퇴폐적 사회상의 단면이라고 혹평하지만, 그렇게만 볼 일은 아니다. 이질적인 두 문명의 문화가 어쩔 수 없이 세진 속에서 융합되다 보니 인간 본능인 사랑과 낭만이 자연스럽게 표출된 셈이다. 여기서 ‘쌍화’는 상화(霜花)떡으로 무슬림 고유의 빵(만두)일 것이다. 쌍화와 함께 전래된 무슬림 음식으로는 송도 설(薛)씨가 만든 데서 유래한 설적(薛炙)이 있다. 쇠고기나 소 내장에 고명을 입힌 뒤 쇠꼬챙이에 꿰어 구운 음식인데, 오늘날도 유행하는 중동의 케밥이나 동남아의 사떼와 흡사하다.
전래품 중 으뜸 명물 ‘소주’
△ 소주를 내릴때 사용하는 소줏고리. |
고려와 이슬람세계간의 교류품 가운데 오늘날까지 일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물이 소주다. ‘취중진담’이란 이유를 들어 서양에서는 술을 신이 인간에게 내린 최고의 선물이라고 한다. 이런 술이 이땅과 이슬람의 만남을 주선한 매체가 되었다면 이야말로 신이 두 문명에 하사한 실로 진중하고 신기한 선물이 아닐 수 없다. 흔히 3대 토주의 하나로 꼽히는 소주의 연원을 고려시대로 잡는다. 그런데, 다시 그 연원을 캐올라가면 원조는 아랍에 가닿는다. 세 번 고아내린 증류주라 하여 이름 붙여진 소주는 기원전 3천년께 메소포타미아 수메르에서 처음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 뒤 증류주는 오늘날까지도 중동 아랍지역에서 ‘아라끄’란 이름으로 전승되고 있는데, 몽골 서정군은 1258년 압바스조를 공략할 때 처음 ‘아라끄’의 양조법을 배워간 것으로 전해진다. 몽골군은 이후 일본 원정을 위해 주둔한 고려의 개성과 안동, 제주도 등지에서 이 술을 처음 빚기 시작했다. 원정군이 가죽 술통에 넣고 다니며 마시는 ‘아라끄’를 공급하기 위해 고려인들이 만들어낸 것이 바로 고려 소주다. 고려 소주의 본산인 개성에서는 근세까지도 소주를 ‘아락주’라고 불렀다.
짧은 만남 오랜 흔적
이와같이 고려와 이슬람의 교류는 몽골의 내침과 간섭이란 특수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거의 일방적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런 만남이 있었기에 이슬람 문화의 전파나 수용은 역동적일 수밖에 없었다. 길지 않은 만남이었지만, 그 영향은 자못 커서 오늘날도 흔적이 남아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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