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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도래한 성씨(가나다별 정리)

바래미나 2007. 10. 31. 02:06

 

 

                   韓國 內의 中國姓氏


1. 蘇州賈氏

시조는賈維鑰.  明나라 兵部尙書 遼都察使로 壬辰倭亂때 明軍을 이끌고 와 安州싸움에서  倭軍을 물리치고 돌아갔다가 丁酉再亂때  아들 손자와 함께 다시 들어와 부산에서 싸우다 순절 하였다. 원래 賈氏는 周 文王의 자손으로 公明이 賈(지금의 洛陽, 蘇州 일대)伯에 봉해짐으로써 賈씨가 되었다.

1. 중국에 明나라 兵部尙書 계원도찰사(薊遼都察使) 역사적 기록이 있는가?

2.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역사의 기록이 있는가? 


2. 檜山甘氏

     시조는 감규(甘揆), 元나라 사람(원래 노(魯)나라 한림학사)로 고려 충정왕 1년 魯國公主를 따라 元朝의 翰林學士들이 陪從해 올 때 함께와, 門下侍郞平章事를 지냈고 延陵君에 봉해졌다. 그때 함께 온 분들은 孔紹. 張敬. 皇甫榮. 獨孤億. 西門氏. 南宮氏. 邊肅등 학사들이라 한다. 檜山은 지금의 昌原이다.

       감씨(甘氏)는 원래 주나라 무왕(武王)의 셋째아들인 숙대를 감후(甘侯)에 봉함으로써 나라 이름을 따서 감씨라 하였다.

     1. 원나라 노국공주로 왔다는 기록이 중국과 한국에 있는가?

     2. 같이 왔다고 하는 7학사의 기록도 있는가?


3. 南陽葛氏

제갈씨의 시조는 諸葛亮의 아버지 諸葛珪이며 그의 20세손 諸葛公巡이 신라 흥덕왕(興德王)때 귀화 하였다.  고려조 고종 때 제갈공순의 12세손 諸葛泓. 諸葛瀅 형제가 각기 諸氏와 葛氏로 分宗하여 姓을 삼았다.

1. 중국 족보에서  諸葛珪의 20세손 諸葛公巡을 확인 할 수 있는가?

2. 신라 흥덕왕 때 사적을 확인 할 수 있는가?

4. 信川康氏

시조는 康候. 箕子가 동래할 때 西周 武王의 아우 康叔封의 둘째아들 강후(康侯)가 기자(箕子)를 따라 우리나라에 와서 8조(條)를 제정하고 윤리를 교화한 공으로 관정대훈공신(關鼎大勳功臣)이 되고 , 아버지 강숙의 <康>자로 사성(賜姓)을 받았다. 中始祖는 康之淵이며 후대에 谷山. 載寧. 忠州. 晋州 등의 별관이 생겼으나 信川으로 통일 하였다. 

1. 西周 武王의 아우 康叔封의 둘째아들 강후(康侯)가 기자(箕子)를 따라 우리    나라에 온 역사적 기록이 있나?

2. 관정대훈공신(關鼎大勳功臣)이 된 기록이 있나?


5. 忠州强氏- 미상

强씨는 晋나라의 大夫 强검의 후예로 宋나라 휘종 때 强浚明과, 理宗때 警巡 强伸 등이 전해 오고 있으나  東來시기는 알 수 없다. 剛氏는 1908년 민적부에 기재할 � 强氏를 잘못 적은 것이라고 한다.


강씨(强氏)는 중국(中國) 천수(天水 : 감숙성 남동부 위수에 면한 상업도시)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서 진(晉)나라 때 사람인 강 일(强 일)이 시조(始祖)가 되며, 우리나라 강씨는 북송(北宋) 휘종(徽宗)때의 전당(錢塘) 출신인 강준명(强逡明)의 후손으로 전하나 우리나라에서는 언제 동래(東來)하였는지 고증(考證)할 문헌(文獻)이 없어 상세히 상고(詳考)할 수 없다.


5-1 剛氏강씨- 미상

   강씨(剛氏)는 중국(中國) 청(淸)나라 덕종(德宗 : 제 11대 황제, 재위기간: 1875~1908) 때 사람인 강의(剛毅)가 만주(滿洲) 출신으로 공부상서(工部尙書)와 군기대신(軍機大臣)을 지낸 것으로 문헌(文獻)에 나타나 있으며 우리나라에 동래(東來) 한 연원(淵源)에 대해서는 미상(未詳)이다.


6. 驪州介氏- 미상

‘ 韓國氏族統譜’에 따르면 介氏는 중국 太平(지금의 山西城)에서 系出되었다 한다. 周襄王때 晋에 介子가 있어 王光臨으로 改名 했다고 한다.  동래 시기는 알 수 없으며 1930년도 국세조사 때 처음으로 나타났다.


7. 泰仁. 海州景氏- 미상

시조는 景汝松. 箕子를 따라 우리나라에 온 뒤 平壤에 세거하였다. 그 뒤 譜系를 잃어 고려조에 樞密院副使와 東南都兵馬使를 지내고 泰山府院君에 봉해진 景磋를 1世로 하고 있다. 그 뒤에 또 昭穆이 분명치 않아 고려조의 直提學大司空을 지낸 景祥祖와 左僕射에 있었던 景祥祿 형제를 貫祖로 삼아 泰仁과 海州로 분관하였다.


8. 淸州慶氏- 미상

      경씨는 본래 중국의 성씨로서 제(齊)나라 공족(公族)이었으나, 언제 우리나

      라에 들어 왔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중국 하내에 연원을 두고 있으며 현존하

      는  관향은 청주 단본이다. 시조로 전하는 경진은 고려 명종 때 정의광정대부

      를 지냈다. 중국에서 왔다는 근거가 없어 중국과 확실히 연계할 수 없다.


9. 遂安桂氏

    시조는 桂 碩遜.  明나라 天水사람으로 성양 태수(城陽太守) 경횡(炅橫)의 셋

    째아들이다. 禮部侍郞으로 있을 때, 洪武帝(明太祖)의 명을 받아 우리나라에

    와  禮學을 전수 한 뒤, 귀화하여 遂安伯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관향을 삼았

    다.  遂安은 황해도 북부에 위치한다.

    1. 明나라 天水사람, 성양 태수(城陽太守) 경횡(炅橫)의 셋째아들 근거가 있나?

    2. 洪武帝(明太祖)의 명을 받아 우리나라에 온 근거 있나?


10. 廣寧高氏- ?

시조는 高有寶. 明나라 사람으로 明. 淸 교체기에 淸의 지배를 받을 수 없다 하여 인조 초에 우리나라에 망명하였다. 그는 宋나라 진종 때 衛國의 충렬무왕인 高瓊의 후손으로 禮部侍郞을 지냈다. 廣寧은 중국 지명이다.


11. 曲    氏- 미상

곡씨는 1960년도 국세조사에 처음으로 나타난 성씨로 龍宮. 沔川 두 본이 있다. 원래 중국 성씨로 唐나라때 장군을 지낸 曲環이 있다. 東來 연대는 미상이나 고려 태조때 評察를 지낸 曲矜會 등이 있는 것을 보면 오래된 성씨임을 알 수 있다.


12. 曲阜孔氏

시조 孔紹는 元의 翰林學士로 있다가 공민왕비 魯國公主를 陪從, 8학사와 더불어 우리나라에 왔다. 그는 공민왕조에 門下侍郞平章事를 지내고 檜原君에 봉해졌다. 공씨의 선조는 孔子로, 세록에도 文宣王 孔子를 시조로 起世하면서 曲阜孔氏 中國宗統편에 엮고 있다. 중국 魯나라의 孔氏와 동원임으로 曲阜를 관향으로 하고 있다.

1. 공민왕비 魯國公主를 陪從, 8학사와 함께 온 역사적 근거.

13. 金浦公氏

시조 公允輔. 唐나라때 사람으로 安祿山의 난을 피해 18학사 중 한사람으로 우리나라에 와 김포에 정착, 公氏의 시조가 되었다. 공씨의 선계는 중국 노(魯)나라 왕족이자 공자(孔子)의 제자로 72인의 반열에 들었던 공숙문자(公叔文子), 즉 공하수(公夏守)라 하였다.

1. 安祿山의 난을 피해 18학사 중 한사람 근거 있나?

2. 공자(孔子)의 제자로 72인의 반열에 들었던 공숙문자(公叔文子), 즉 공하수     (公夏守)의 후예는 어디가 많은 가?


14. 善山郭氏

     곽씨(郭氏)는 중국의 성씨로서 주문왕(周文王)의 아우 괵중(괵仲)이 괵(괵)

     에  봉함을 받은 후 괵과 비슷한 음을 따서 곽공(郭公)이라 불렸기 때문에 곽

     (郭)을 성으로 삼았다고 한다.

선계는 周나라 왕손 郭穆인데, 고려조에 호를 巖谷이라한 正懿公 郭鏡이 우리나라에 건너와 苞山君에 봉해져 포산곽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 뒤 고려 중기에 銀靑光祿大夫 門下侍中平章事겸 太子詹書를 지낸 郭佑賢이 善山君에 봉해져 선산곽씨의 시조가 되었다. 한때 포산곽씨와 合譜하여 포산으로 통일했으나, 그 뒤 세계간의 연대차가 발견되어 西川公 郭佑賢을 시조로 하고 있다.


15. 玄風(苞山)郭氏

시조는 郭鏡. 宋나라 關西의 弘農 사람으로 文淵閣 翰學士가 되었다. 고려 인종11년에 7명의 학사들과 우리나라에 와, 인종 16년 등과하여 여러 관력을 거친 뒤 平章事文化侍中을 지냈고, 金紫光祿大夫에 올라 苞山君에 봉해졌다. 현풍곽씨 중에는 한때 본관을 善山. 海美. 江陵 등 별관을 써온 때가 있었으나 그들이 의례 玄風郭氏 (시조 郭鏡)의 후손이라 써 왔기에 1979년 종회 의결로 본관을 玄風으로 통일하였다.

1. 宋나라 關西의 弘農이 어디인가?

2. 고려 인종11년에 7명의 학사들과 우리나라에 온 근거 있나?


16. 綾城具氏

    구씨(具氏)의 선계(先系)는 중국(中國) 진(晋)나라 대부(大夫) 구 병(具 丙)으로      전하여,「동사보유(東史補遺)」와「주청계공실기(朱淸溪公實記)」의 기록에 의      하면 우리나라 구씨(具氏)는 송(宋)나라 출신인 구존유(具存裕)가 1224년(고종      11) 신안 주씨(新安朱氏)의 시조(始祖) 청계(淸溪) 주 잠(朱 潛)과 함께 고려(高      麗)에 귀화(歸化)한 것이 시초가 된다.

    具存裕의 장인은 宋나라 사람 朱潛으로 翰林學士를 지냈다. 宋나라가 蒙古에       게 패망하자 7학사와 함께 錦城, 지금의 羅州에 망명해 왔다. 유명한 朱熹는 妻      高祖가 된다.

    1. 신안 주씨(新安朱氏)의 시조(始祖) 주 잠(朱 潛)과 함께 고려(高麗)에 귀화          (歸化)한 역사 있나? 


16-1.창원구씨(昌原具氏)- 미상

     「창원구씨세보(昌原具氏世譜)」와「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창원구씨는 원성(原姓)이 구씨(仇氏)로 한(漢)나라 명환(名宦) 구 남(仇 남)의       후손 구성길(仇成吉)이 동래(東來)하여 서기 945년(혜종 2) 서경(西京)에서  

      공(功)을 세원 의창군(義昌君)에 봉해졌고 벼슬은 찬성사(贊成事 : 문하부의  

      정2품 관직) 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관향(貫鄕)을 창원(昌原)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계승

      하 였으나 상계(上系)가 실전(失傳)되어 생원(生員) 설(雪)을 일세조(一世祖)

      로 하고, 조선(朝鮮) 세종(世宗) 때 홍문관 직제학(弘文館直提學)을 역임한 종

      길(宗吉)을 중시조(中始組)로 계대(繼代)하여 오다가 1791년(정조 15) 현재

      의 구씨(具氏)로 개성(改姓)했다고 한다.


17. 平海丘氏

     구씨(丘氏)는 주(周)나라 초기의 정치가인 강태공(姜太公)의 후예(後裔)로  산

     동성(山東省) 창락현(昌樂縣)에 위치한 영구(營丘)라는 지명의〈구(丘>자(字)

     를 성(姓)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는 하남성(河南省)에 연원을 두고 제태공(齊太公)이 봉해진 땅이름 영구의〈구

     (邱)〉자를 자손(子孫)들이 성으로 삼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시조는 丘大林. 중국 唐나라 장군으로 신라 문무왕 3년에 우리나라 黃氏의  都

     始祖인 黃洛장군과 함께 사신으로 갔다가 풍랑을 만나 경북 蔚珍郡 平海에 표 

     착, 平海丘氏의 조상이 되었다.

     1. 黃氏의 都始祖인 黃洛장군과 함께 왔다는 근거가 있나?

     2. 황 씨 측의 주장은?


18. 潭陽鞠氏

시조는 鞠周. 시조 국 주(鞠 周)는 원래 송(宋)나라 사람으로 1126년(인종 4) 황제 흠종(欽宗)이 금(金)나라로 잡혀가자 남송(南宋)으로 옮겼다가 이듬해인 고려 인종 6년 (南宋 高宗建炎 2년)  함께 東來하였다. 부인 영산신씨(靈山辛氏)와 邊九萬 등과 함께 東來하였다. 인종은 그를 監正官에 제수했고, 그 뒤 金나라에 사신으로 가 국위를 떨쳐 秋城君에 봉해졌다.  秋城은 지금의 潭陽이다.

1. 시조 국 주(鞠 周)가 고려 인종 6년에 동래했다는 역사적 근거.

2. 인종이 그를 監正官에 제수했다는 근거는?


19. 國    氏- 미상

‘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國氏는 중국 성씨로, 유명 인사로는 春秋戰國時代 鄭나라 宰相 子産을 들 수 있다. 자산의 본명은 國僑이다. 국씨는 백제 8대 姓중 하나이다.


20. 兎山弓氏- 미상

시조는 弓欽. 본래 중국 太原 의 후손으로 殷나라 末에 東來하여 兎山(黃海道 金川郡에 있는 지명)에서 世居 하였다고 한다. 그 후 세계가 失傳되어 弓繼信을 1世로 삼아 世系를 이어 오고 있다.

궁씨(弓氏)는 중국의 성씨로 노(魯)나라 대부(大夫) 숙궁(叔弓)이 <궁(弓)>자를 따서 성을 삼았다고 한다.

21. 幸州奇氏

시조는 奇友誠. 백제 溫祚王 때 侍中을 지내고 지금의 경기도 고양군 幸州에 세거, 幸州를 관향으로 삼았다. 奇씨는 幸州 단일 본으로 箕子조선을 연 箕子가 先系祖라고 밝히고 있듯,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성씨의 하나이다.

箕子의 41세손 箕準(哀王)이 燕人 衛滿의 침입으로 南遷, 현재의 익산으로 옮기고 그의 7세 손 箕勳(元王)에 이르러 3형제를 두었는데 그들은 각기 다음과 같이 改姓을 했다고 한다.

1) 첫째 友誠은 德陽(幸州)奇氏   2) 두째 友諒은 上黨(淸州)韓氏

3) 세째 友平은 北平(平壤)鮮于氏가 되어 지금까지 통혼을 하지 않고 있다.


1. 箕子의 41세손 箕準(哀王)이 衛滿의 침입으로 南遷했다는 역사적 근거.

2. 한씨와 선우씨의 족보상 주장은?

3. 箕子에 대한 중국 측의 견해는 ?


22. 幸州箕氏

箕氏는 고대 중국 주나라 무왕 때 사람인 箕子 후예라고 조선씨족통보에 기록되어 있으나 幸州奇氏와 同源으로도 전해진다.

1. 幸州奇氏와 同源인가?


23. 海平(善山)吉氏

시조는 吉瑭. 길씨(吉氏)는 중국(中國) 풍익(馮翊)에 연원(淵源)을 두고 있으며, 당(唐)나라에서 귀화(歸化)해온 8학사(八學士)중의 한 사람인 길 당(吉 당)이 고려(高麗) 문종(文宗)때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로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내고 해평백(海平伯)에 봉해져 우리나라 길씨(吉氏)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그는 중국 唐나라에서 列卿의 벼슬에 있었다.

 冶隱 吉再의 증조이며 成均生員을 지낸 吉時遇를 시조로 삼아  起世하였다.

  

24. 英陽金氏

시조는 金忠. 唐나라 사람으로 荊州刺使겸 按廉使를 지냈다. 그는 鳳陽府 汝南사람으로 신라 경덕왕 14년 일본에 초빙되어 다녀오다가 풍랑을 만나 표착. 경덕왕이 남쪽에서 왔다는 뜻으로 南氏로 賜姓하였다. 賜姓前 아들을 金氏, 賜姓後 아들을 南氏로하였다.


25. 太原金氏

시조는 金學曾. 명나라 신종때 복건성 都御使를 지냈고 翰林太原伯에 봉해졌다. 그의 아들 金坪이 翰林侍講을 지낸 뒤, 인조 4년에 우리나라에 망명, 김해 대종산 아래 정착 세거하게 됨으로써 후손들이 太原을 관향으로 삼아 계대하고 있다.


26. 錦城羅氏

시조는 羅聰禮. 금성나씨는 본래 중국 祝融씨의 후예인 운씨(鄖氏)였는데 춘추시대에 羅國에 봉해짐으로써 羅씨가 되었다고 한다. 그 뒤 唐 太宗때의 尙書左僕射로 있던 羅至强이 우리나라에 망명, 지금의 羅州에 정착한 뒤  신라조의 左丞相에 올라, 후손들의 繁衍의 기틀을 가졌다. 나주의 옛 이름이 錦城일 뿐 아니라 시조가 錦城府院君에 봉해졌다는 연유로 금성을 관향으로 삼았다.

羅文瑞를 시조로 하는 軍威羅氏는 錦城羅氏에서 분적 된 것이다.


27. 羅州羅氏

시조는 羅富. 고려조에 正議大夫監門衛 上將軍을 지냈다. 羅富는 南宋 고종조때 고려조에 奉命使臣으로 왔다가 미쳐 돌아가지 못한 사이에 宋나라가 멸망, 艅艎(지금의 나주)에 눌러 살게 되어, 후손들이 나주로 貫鄕하게 된 것을 알 수 있다.


28. 安定羅氏

시조는 羅天瑞. 고려 공민왕 때 門下侍中 平章事를 지냈으며 후에 安定伯 겸 安川君에 봉해졌다. 안정나씨는 나주나씨에서 본이 옮겨졌다고 한다. 또 원래 唐나라 태종 때 翰林修撰官으로 있다가 참소를 입어 우리나라에 피신, 지금의 나주에 정착 관향으로 삼았다고도 한다.

1) 중국 唐나라 태종 때 翰林修撰官  羅天瑞가 있었는가?


29. 英陽. 宜寧. 固城南氏

시조 南敏. 중국 唐나라 鳳陽府 汝南사람으로 원명은 金忠이었다. (영양김씨 참조)  고려 명종 때 南敏의 후손 3형제가 높은 관직에 올라 각기 중시조가 되었다.

1) 南洪輔: 英陽南氏 2) 南君輔 : 宜寧南氏  3) 南匡輔 : 固城南氏


1) 鳳陽府 汝南이 어디인가?


30. 咸悅南宮氏

시조는 南宮元淸. 고려 성종조의 門下侍郞 平章事를 지냈고 甘勿阿(咸悅의 옛이름)伯에 봉해졌다. 김행성(金行成) 등과 함께 송(宋)나라에 유학하여 국자감(國子監)에서 공부하고 대과(大科)에 급제했다. 그는 중국의 주나라가 은나라를 멸망시키자 李惟成, 皇甫儉 등과 함께 箕子를 따라 동래하여 司徒를 지낸 南宮隋의 후손이다.


31. 揚州浪氏-미상

浪氏는 중국 揚州(지금 강소성 강도현) 단본이며, 시조는 단지 浪忠正公으로 전해올 뿐 어느 시대 인물인지 알 수  없다. ‘朝鮮氏族統譜’에는 “浪氏는 중국 江蘇省 揚州에서 왔다”고 기록 되어 있다. 일설에는 明나라 때 兵部侍郞을 지낸 浪礎라는 사람이 간신들의 참소를 받고 등주(登州)에 유배 되었다가 禍를 피해 조선조 인조 때 배를 타고 건너 왔다고 전해진다.


32. 盧    氏

   우리나라 노씨는 노수(盧穗)를 都始祖로 한다. 그는 중국 唐나라 때 范陽 출신

   으로 翰林學士를 지내다가 신라 효성왕 때  安祿山의 난을 피해 아들 9명을 데리

   고 우리나라에 왔다. 처음에 평안도 定州에 정착 하였다가 龍岡으로 옮겨 뿌리를

   내렸다. 谷山盧氏. 光州(光山)盧氏. 交河盧氏. 萬頃盧氏. 新昌盧氏. 安康(慶州)

   盧氏. 安東盧氏. 延日盧氏. 長淵盧氏. 豊川盧氏. 海州盧氏등 대부분이 盧穗의 후

   손이다.


33. 魯    氏- 미상

   중국 殷나라 太師 箕子가 8백 義士를 데리고 온 성씨 중의 한분으로 여러 번의 변란을 겪으며 鼻祖의 이름이나 官爵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중국의 魯氏는 周나라 때 周公의 아들 伯禽이 魯候에 봉해짐으로써 그 후손들이 ‘魯’를 성씨로 삼았다고 한다. 우리나라 魯氏는 江華. 廣州. 密陽. 咸平 등이 있는데 모두 同祖, 同 源이다.

   1) 周나라 때 周公의 아들 伯禽이 魯候에 봉해진 사실이 있는가?


34. 開城路氏

    노씨(路氏)는 중국 내황(內黃)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서 한(漢)나라 때 노(路)  땅에 봉해진 황제(黃帝)의 후손이 지명을 성(姓)으로 삼은 것이 시초가된다.

    시조 路門儆. 원래 元나라 翰林學士인데, 고려조 공민왕 때 魯國公主를 배행하여 東來, 開城에 정착 하였다. 후손들은 그를 시조로, 開城을 본관으로 삼아 세      계를 이어왔다.


35. 喬洞雷氏- 미상

     본관喬洞은 강화도에 딸린 섬으로 연산군이 귀양가 있던 곳으로 유명하다. ‘朝 鮮氏族統譜’에 따르면 雷氏는 본래 中國姓氏라고 한다. 동래 시기는 알 수 없다.

36. 江陰段氏

遠祖는 段一河. 중국의 延安城 江陰縣사람으로 明나라 헌종조에서 內院直閣을 지냈고,  뒤에 魯의 領詔使가 되었다. 그의 4세손 段萬里가 壬辰倭亂때 摠兵將으로 왔는데, 그때 그의 아들 段希詳이 함께 왔다. 江陰段氏는 段萬里를 중시조로 섬기는데, 江陰은 황해도 김천군에 있던 지명이다. 段氏는 稀姓임에도 10여개의 본관이 있는데 ‘汎段氏大同譜’를 작성하고 있어 본관이 하나로 통일될 전망이다.

단씨(段氏)는 본래 중국 경조(京兆: 섬서성 관중도 장안현)에서 계출 (系出)된 성씨(姓氏)로 정장공(鄭莊公)의 아우 숙단(叔段)의 후손이 이름자인 단(段)을 성으로 삼은 것이 시초가 된다.

1)  延安城 江陰縣은 지금의 어디인가?

2)  중국 경조(京兆: 섬서성 관중도 장안현)에서 계출되었다고 하니 그곳을 추적해 볼 것.

  

37. 端    氏- 미상

     端氏는 韓山 단본으로 옛 文獻에도 보이는 성씨이다. ‘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端氏는 본래 중국성씨라고 한다.


38. 密陽唐氏

시조는 唐誠. 본래 浙江省 明州人으로 元末의 난을 피하여 우리나라에 왔다. 李成桂의 조선왕조 창업을 도운 開國功臣으로 태종 12년 嘉靖大夫 恭安府尹이 되었고 密陽唐氏로 賜貫 되었다.

당씨(唐氏)는 중국 진양(晋陽 : 산서성 기영도)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서 본래 도당씨(陶唐氏 : 제요를 일컬음)의 후예(後裔)가 당(唐)나라 제후(諸侯)에 봉해져서 나라 이름을 성(姓)으로 삼은 것이 시초(始初)가 된다고 한다.

  

39. 密陽大氏

시조는 大仲象. 원래 唐나라 장군으로 말갈족을 통치하였으며 震國公에 봉해졌다. 그의 아들 大祚榮이 渤海를 세워 228년간 왕권을 유지하였는데 契丹에게 멸망하자 哀王의 아들 大鐸이 자손을 이끌고 密陽에 와 정착하였다. 한편 渤海가 망하자 후손 大光顯이 고려에 투하하여 王氏(太氏로 전하는 문헌도 있다)를 下賜 받았다고 전하기도 한다.


40. 星州. 八莒. 星山都氏

도씨(都氏)는 중국 여양(黎陽 : 지금의 직예성 대명도) 사람인 도 계(都 稽)가 한무제(漢武帝) 때 복파장군(伏波將軍)으로 여가(呂嘉)의 반란을 평정하여 도씨(都氏)로 수성(受姓)한 것이 시초가 된다고 하며, 우리나라 도씨(都氏)는 도 계(都 稽)의 후손 도 조(都祖)가 성제(成帝 : 중국 전한 제11대 황제, 재위기간 : BC 32~BC 7) 때 고구려(高 句麗)에 건너와서, 동명왕(東明王)의 맏아들 유리(琉璃)가 이복동생인 비류(沸流), 온조(溫祚)와 왕권쟁탈을 벌일 때 크게 활 약하여 유리를 왕위(王位)에 오르게 하였으며, 나라를 바로 잡고 백성을 다스리는 데 공헌한 후 우리나라에 살게 되면서부터 문호(門戶)가 열렸다. 

도씨는 聖州. 聖山. 八莒(지금의 漆谷)등 몇 본이 있지만 모두 同祖 同源이다. 


41. 順天陶氏

시조 陶球元은 원나라의 進士이다. 駙馬都尉로 元세조 2년, 곧 고려 충렬왕 22년에 원(元)의 賓塔實憐 공주의 陪臣으로 우리나라에 와 순천에서 눌러 살았다.

「순천도씨김포세보(順天陶氏金浦世譜)」에 의하면 순천 도씨의 시조(始祖)는 중국 진(晋)나라 사람인 도 단(陶 丹)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그의 아들 도 간(陶 侃 : 257-332)이 진(晋)나라 무장(武將)으로 진(晋)왕조가 오(吳)를 평정하여 삼국(三國)을 통일(統 一)하는 데 훈공을 세웠다.

한편 <귀거래사(歸去來辭)> 로 유명한 진(晋)나라 시인 도연명(陶淵明)은 무장 도간(陶 侃)의 증손(曾孫)이다.


42. 固城道氏- 미상

道氏는 중국 성씨로 고성 단본인데, ‘陶谷叢說’ ‘典故大方’에도 보이지 않던 성씨다.

도씨(道氏)는 한(漢)나라 때 중국 여음(汝陰 : 지금의 안휘성 영주지방)에서 계출 (系出)된 성씨(姓氏)로 전해지며, 우리나라 도씨(道氏)의 연원(淵源)은 고증(考證)할 문헌(文獻)이 전하지 않아 미상(未詳)하다. 1930년도 국세조사에서 발견된 성씨이나 자료가 충분치 못하다.


43. 南原獨孤氏

先祖 獨孤共舜은 원래 중국 하남성 남원(南原)출신으로 고려 중엽에 8학사의 한 사람으로 동래하여 정착 하였다. 일세조 獨孤信은 고려조 충숙왕때 유명한 학자로 남원을 관향으로 삼았다.

독고씨(獨孤氏)는 중국 고양(高揚 : 지금의 직예성 보정도)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서 남원(南原)․광릉(廣陵 : 중국)을 비롯하여 나주(羅州)․황주(黃州)․의주(義州) 등 다섯 본(本)이 있는 것으로 문헌(文獻)에 전한다.

독고공순(獨孤公舜)이 신라 말엽에 8학사(八學士)의 한 사람으로 동래(東來)해 정착세거(定着世居)한 것이 시원(始原)을 이루게 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44. 廣川蕫氏

시조 동승선(董承宣) 한무제(漢武帝) 때의 대유(大儒)로 광천백(廣川伯)에 봉해진 蕫仲舒의 43세손으로 고려말에 接慰使로와 卜地하게 된 蕫承宣으로부터 비롯 �다. 廣川은 董仲舒의 고향으로 중국의 하북성에 있다.

그런데 광천동씨(廣川董氏)에는 동승선의 후손 외에 1597년(선조30) 정유재란 때 도진사(都眞使)로 명나라의 원병을 이끌고 우리나라에 온 명장(明將) 동일원(董一元)의 후손이 있다. 동일원은 명군이 철수할 때 본국으로 돌아갔으나 그를 따라 종군했던 아들 대순(大順)은 그대로 머물러 있다가 <후금(後金)의 난>이 일어나자 길이 막혀 돌아가지 못하고 결국 귀화한 것으로 전한다.


45. 東 方 氏- 미상

    동방씨(東方氏)는 중국 제남(濟南 : 지금의 산동성 역성현)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이며, 고대 복희씨(伏羲氏)가 동방의 진(震) 땅에서 나왔다고 하여 동방(東方)을 성(姓)으로 삼은 것으로 전한다.

    우리나라 東方씨의 중시조는 조선조 정조때 문과에 급제, 典籍을지낸 東方淑으로 알려졌다.


46. 杜陵杜氏

      두씨(杜氏)의 연원(淵源)은 중국 경조(京兆 : 협서성 관중도 장안현)에서 시작        된다.

1) 杜慶寧系 : 중국 북송 太宗 때 兵部尙書를 지냈다. 왕위계승 문제로 직언과 극간을 하다가 蘇州刺使로 좌천되어 가던 중 배가 풍랑을 만나 지금의 古群山列島에 표착 하였다. 杜陵은 지금 의 全北 金堤郡  만경면을 말한다.

2) 杜喬林系 : 杜喬林의 아들 杜師忠이 壬辰倭亂때 李如松장군을 따라 구원군 으로 와 활략한 뒤 그 아버지를 시조로 삼고 정착했다.


47. 上谷麻氏

중시조는 麻貴. 明나라의 大將軍 兵部尙書로 선조 30년 丁酉再亂 때 구원병을 이끌고  온 明나라의 제독이다. 관향인 上谷은 河北省에 있고, 시조 역시 遠祖인 回回國王 麻立으로 하고 있다.

1) 上谷은 河北省에 있다고 하니 확인 할 것.


48. 萬    氏- 미상

萬氏는 보통 壬辰倭亂 때 援兵으로 왔던, 明나라 經理使 萬世德의 후예로 알려져 있으나 문헌에는 그 이전부터 나타난다.

만씨(萬氏)는 중국 부풍(扶風 : 섬서성 관중도 장안현에 속한 지명)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이며, 한(漢)나라 명제(明帝 : 후한의 2대 왕, 재위기간 : 58-75) 때 28장군(將軍)의 한 사람인 만 수(萬 修)의 후예(後裔)로 전한다.

  

49. 忠州梅氏- 미상

梅氏는 忠州 단본이다. 權文海의 ‘大東韻府群玉’에 “ 梅氏는 본래 중국 山東성 濟南府 출신인데, 梅氏를 賜姓받고 관향을 忠州로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역대 인물로는 조선조 중종 때 黃澗사람인 梅漢孫이 있다.


50. 新昌孟氏

시조 孟軻는 유명한 亞聖 孟子이다. 그의 50세손 孟尤鉉이 고려 원종 때 國子監을 지냈으며, 그의 셋째아들 孟理가 門下侍中을 지낸 뒤 그의 아들 依가 조적(曺頔)의 亂으로 공을 세워 新昌伯에 봉해져 본관을 新昌으로 삼았다. 新昌孟氏는 孟子를 시조로 하고, 우리나라에 와서 출세한 후손 중 孟理를 중시조로 하여 계대를 있고 있다.


51. 西蜀(延安)明氏

시조 明玉珍. 중국 隨州사람으로 元 순제 23년 (고려 공민왕 12년) 成都에서 大夏를  세워 황제가 된 인물이다. 그의 아들 明昇이 嗣立, 왕통을 이었으나 朱元璋의 신흥 明나라 군세에 밀려 나라가 망하고 공민왕 21년 어머니와 함께 우리나라에 망명하였다. 그 뒤 조선이 개국되면서 이태조가 그를 華蜀君에 봉했다. 후손들은 중국 四川省에 있는 西蜀을 본관으로 삼고 있다. 西蜀明氏와 同祖同根인 延安明氏는 延安에 세거하며 蕃行하게 된데서 연안을 관향으로하는 후손도 있게 되었다.


52. 毛   氏 -미상

시조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모두 중국에서 건너온 성씨라고 한다.

모씨(毛氏)는 중국(中國) 서하(西河 : 지금의 산서성 하동도 임분현)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이며,「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주(周)나라 문왕(文王)이 아들을 모(毛)에 봉하여 모(毛)를 성(姓)으로 삼았다고 한다.

 문헌(文獻)에 나타는 모씨(毛氏)의 본관(本貫)으로는 광주(廣州 : 중국 산동성)를 비롯하여 서산(瑞山)․김해(金海)․공산(公山 : 공주의 별호)이 전한다.


53. 咸平牟氏

     모씨(牟氏)는 본래 중국(中國) 평양(平陽 : 지금의 절강성 구해도 임분현)에서 계출(系出)되었다고 하며, 고대(古代) 축융(祝融)의 후예(後裔)가 고을 이름을  성(性)으로 삼은 것이 시원(始源)을 이룬 것으로 전한다.

  

     시조는 牟慶, 함평모씨세보(咸平牟氏世譜)」에 의하면 모 경(牟 慶)은 북송(北宋)의 휘종조(徽宗朝 : 북송의 8대 왕, 재위기간 : 1101~1125)에 병부 상서(兵部尙書) 겸 호북경서(湖北京西) 선무사(宣無使)를 거쳐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지내고 북송의 마지막 왕조(王朝)인 흠종(欽宗)때 대사마 대장군(大司馬大將軍)에 올랐다.

     고려 인종 4년 李資謙의 亂이 일어나자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와 平亂의 공을 세워 1등 공신에 策勳되었다. 그 뒤 다시 우리나라에 와 平章事의 직첩을 받고 牟平(咸平의 옛 이름)君에 봉해졌다. 晋州牟氏도 咸平本과 同源이다.


54. 泗川睦氏- 미상

시조는 睦孝基. 고려 고종때 郎將同正을 지냈다.  고구려 영류왕 24년, 唐나라에서 파견되어 건너온 8學士중 한분인 睦種이 泗川睦氏의 先始祖라고 한다. 그는 우리나라에 온 뒤 경남 泗川에 살아,  그곳을 관향으로 하고 있으며, 특히 형제 사이의 우애가 남달라 성을 睦氏라고 했다고 전한다.


55. 驪興閔氏- 미상

      민씨(閔氏)는 중국(中國) 농서현(농西縣: 감숙성 난산도)에서 계출(系出)

      된 성씨다.

始祖는 閔稱道. 고려조에 尙衣奉御를 지냈다. 閔氏는 본래 孔子의 제자 10哲의 한 사람인 민 손(閔 損 : 자는 자건(子騫)의 후손 민칭도(閔稱道)가 使臣으로 왔다가 驪興(지금의 驪州)에 정착 하였다. 閔稱道의 先系와 대수는 잘 나타나 있지 않다. 그의 8세손 閔漬가 고려 원종조에 문과에 오르고 驪興府院君에 봉해진 것을 계기로 驪興이 관향이 된 게 아닌가 여기고 있다.


56. 巨濟潘氏

시조는 潘阜.  南宋 사람으로 翰林學士를 지낸 뒤 吏部尙書에 이르렀는데 蒙古의 침입으로 燕京이 점령당하자 몽고군에 잡혀갔다. 고려 원종 7년 樞密副使 金方慶이 원종 遜位로 入蒙했을 때 세자(충렬왕)의 부탁으로 그를 데려왔고 이름도 阜로 고쳤다. 巨濟. 結成. 光州. 南平 등으로 분적 되었으나 단일본이다.


57. 班    氏- 미상

     반씨(班氏)는 중국(中國) 부풍(扶風: 섬서성 관중도 장안현에 속한 지명)에서 계출되었다. 班씨는 중국 고대 전욱(顓頊)의 후예, 또는 楚나라 사람 鬪班의 후손으로, 이름을 성으로 삼았다고 전해지나 언제 우리나라에 왔는지 알 수 없다. 본관은 開城. 固城. 光州. 平海로 전해오고 있다.

58. 溫陽方氏

시조는 方智. 중국 河南省 출신인데 신라 문무왕 9년 中國翰林學士로 우리나라에 문화사절로 와 薛聰과 더불어 예의를 강론하고 선교와 교육으로 ‘東方文敎의 宗’이라 일컬어졌다. 후에  方雲이 고려 태조조에 左僕射에 오르고 溫水君에 봉해져 溫陽方氏의 중시조가 되었다.


59. 南陽房氏

시조는 房季弘. 고려조의 開國功臣이다. 중국 당나라 文昭公 房玄齡의 둘째 아들로 고구려 보장왕  奏請으로 우리나라에 온 唐의 8학사중 한 사람인  房俊의 9세손이다. 南陽은 경기도 화성군에 위치하고 있다. 水原房氏 시조 房貞儒는 南陽房氏 시조 方季弘의 손자라고 전하는 문헌도 있다.


방씨(房氏)는 당(唐)나라 양공(梁公) 방현령(房玄齡)이 634년(당태종 정관 8, 고구려 영류왕 17) 고구려의 주청(奏請)으로 동래(東來)하여 남양(南陽)에 사적(賜籍)한 것이 시초가 된다.


60. 邦   氏

중국 山西省 鴈門道代縣 출신으로 명나라 唐王때의 사람인 邦苞의 후손이 귀화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근대 인물로는 우리나라 기독교사상 최초의 목사로, 기독교 초창기에 커다란 업적을 남긴 邦基昌牧使를 들 수 있다.


61. 開城龐氏

시조는 龐斗賢.  원래 원나라 直省舍人으로 학사를 지냈는데, 고려조 공민왕 때 魯國公主를 배종한 육시랑 8학사의 한사람으로 동래하여 開城에 정착 세거하였다.


62. 太原龐氏- 미상

시조는 방발(龐浡). 원래 중국 太原人으로 指揮都摠長을 지냈는데, 조선에 귀화하여 정착, 세거 하였다고 한다. 년대는 미상.


63. 水原白氏

     시조 白宇經은 중국 蘇州사람으로 황제의 후손인 白乙丙의 원손이다. 인품이 고결하고 학문이 뛰어나 당조에 僉議事와 吏부사서에 올랐으나 모함을 받고 신라 선덕왕 1년에 망명 하였다고 한다. 신라 경명왕 때 中郞將을 지낸 白昌稷을 중시조로 하여 起世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백씨는 모두 同源을 이룬다.


64. 錦城范氏

시조는 范承祖. 중국 랑야(瑯琊)사람으로 元나라의 禮部侍郞으로 元의 계국(薊國)公主를 陪從하여 고려 충렬왕 때 왔다. ‘甲午譜’에 보면, 그는 우리나라에 올 때 程伊川의 易傳, 朱子의 四書集註, 百家禮說 등을 가지고 왔다고 한다. 그는 錦城, 지금의 羅州에터를 잡아 이곳에서 여생을 마쳤다고 한다.

65. 安州凡氏                   

     시조는 凡永富. 선계는 중국 河南사람이며 시조 凡永富는 고려 우왕때 文化安集使를 지냈다고 한다. 관향은 安州 단본이다.


66. 黃州. 原州邊氏

都始祖는 邊呂.  宋나라 瓏西 사람으로 宋나라가 망하자  고려 때 우리나라에 망명해 왔다. 황주변씨와 원주변씨는 모두 그의 후손으로 전해지고 있다.

1) 黃州邊氏 : 시조인 邊呂가 황해도 取城(지금의 황주)에 세거의 터를 잡았고 上將軍에 봉해진 것이 연유가 되고 있다.

2) 原州邊氏 : 시조 邊呂의 후손 중 邊順이 원나라에 들어가 審陽路千戶侯 벼슬을 지냈는데, 그 손자가 원주변씨 시조인 邊安烈이다. 그는 공민왕비인 노국  대장공주를 陪行해 왔으며, 화려한 관직을 거쳐 刑部尙書가되었다.


67. 長淵邊氏- 미상

     시조는 邊鏡. 중국 宋나라 사람으로 門下習秘侯를 지냈다는 說, 신라 때 阿飡을 지냈다는 說, 고려 때 門下侍中을 지냈다는 說이 있다. 그의 후손 邊有寧이 고려 인종 때 淵城府院君에 봉해져 후손들이 관향을 삼았다. 淵城은 長淵의 옛 이름이다.


68. 草溪(密陽)卞氏

시조는 卞庭實. 고려 성종조에 등과하여 門下侍中에 오르고  八溪君에 봉해졌다.  八溪는 草溪의 옛 이름인데 草溪는 경남 합천군에 있는 지명이다. 先系는 중국 唐나라 현종 때 禮部尙書를 지낸 卞源이다. 그는 唐帝의 명을 받아 “孝經”을 가지고 신라 경덕왕때 使臣으로 왔다. 卞庭實의 4세손이 密陽으로 移居하여 일부가 그 곳을 貫鄕으로 쓰고 있다.


69 沔川卜氏

시조는 卜智謙. 王建을 도와 3한통일에 공을 세워 고려의 開國功臣이 됐다. 그의 선조는 중국 唐나라 翰林學士로 五季의 亂을 피해 배를 타고 건너와 唐津의 沔川에 도착하여 서해에 들끓던 海賊을 소탕, 민생을 안정시켰다고 한다.


70. 隴西丕氏- 미상

비씨의 본관은 ‘隴西’ 단본이다. 隴西는 중국 甘肅省에 있는 지명이다. 丕氏는 稀姓으로 약 4백년전 귀화한 성씨라고 한다.


71. 賓氏(壽城. 達成. 大邱. 靈光)

賓씨는 본래 중국의 성씨로, 魯나라의 賓牟賈가 공자를 섬겼다는 기록이 전해 온다. 壽城. 達成. 大邱. 靈光은 동일본이다. 達成賓氏의 시조는 賓于光(宇光)으로 賓牟賈의 후손이다. 宋나라 말엽에 翰林學士를 지내다가 宋이 망하자 書籍 1만 7천권을 가지고 고려로 망명, 學風을 진작시켰다 한다.

1) 중국 역사에 송나라 말 한림학사를 지낸 賓于光(宇光)이란 분이 있는가?


72. 慶州冰氏

시조 冰如鏡. 明나라때 禮部侍郞, 內閣翰林을 역임했다. 조선조 세조때 사신으로 동래하여 정착, 世居하였다. 세조는 그에게 吏曹參議를 제수하고 慶州府院君에 봉하였다. 그 뒤 후손들은 그를 시조로, 慶州를 관향으로 삼았다.


73. 靑州史氏

시조는 史繇. 중국 山東省 靑州출신이며 明나라의 開國功臣으로 禮部尙書를 지냈다. 그 후 明玉珍의 반란에 가담했다는 참소를 받아, 공민왕 21년 망명해 와 林泉에 숨어 살다가, 누명이 벗겨져 明의 洪武帝의 초서로 지금의 파주에 世居터를 마련하고 그의 출신지명을 따라 靑州로 관향을 삼게 되었다고 한다.


74. 謝   氏 -미상

  사씨(謝氏)는 중국(中國)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서 우리나라에는 청(淸)나라 말기에 귀화(歸化)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본관(本貫)은 진주(晋州)와 한산(韓山) 2본으로 전한다. 그러나 상계(上系)가 실전(失傳)되어 소목(昭穆)은 밝힐 수 없다.


75. 孝令司空氏

시조 司空圖. 唐의 僖宗때 中書舍人, 禮部尙書를 지냈다. 黃巢의 난을 만나 일가족을 대동하고 동료 7학사와 함께 신라 효공왕 1년(897년)에 동래해 왔다. 翰林學士 출신으로 문한에 밝아 文昌候, 崔致遠과도 교우가 깊었다. 고려 충숙왕때 孝令君에 봉해진 司空仲常을 1세조로 하고 있다. 孝令은 경북 軍威에 있는 지명이다.


76. 南陽徐氏. 唐城徐氏

시조는 徐趕. 중국 唐나라 사람으로 신라 문무왕 때 8학사의 한분으로 와 唐城(남양의 옛 이름)에 정착, 신라의 太師가 되어 남양군에 봉해졌다.

       唐城徐氏는 南陽徐氏의 시조 徐趕의 13세손 徐得富를 시조로 하고 있는데 그

       의 후손 가운데 花潭 徐敬德같은 인물이 배출 되면서 독자적으로  계대를 이

       어오고 있다.


77. 利川徐氏

    시조는 徐神逸, 利川徐氏世譜에는 箕子의 40세손 箕準이 衛滿을 피하여 利

    川 의 徐河城에 와 살게 됨으로써 地名을 따 姓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1) 達成(大邱)徐氏.  2) 峯城徐氏  3) 長城徐氏도 利川徐氏와 맥을 같이하며 다

        같이 徐神逸의 후손이라고 한다.

    1) 재확인, 신라에서 왔다는 학설이 있음.

      

78. 浙江徐氏

시조 徐海龍은 중국 浙江城 사람이다. 후손 徐鶴이 丁酉再亂때 都摠管으로 동래하여 공을 세우고 星州에 정착하여 살았다.


79. 西    氏-미상

       1930년대 국세조사 때 처음 나타난 성씨이다. 중국 淸나라 덕종 때 西拉布

        와 몽고인 西林이 문헌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귀화한 성씨로 보인다.


80. 安陰西門氏

시조는 西門記. 중국 河南省 사람으로 中郞將에 理政을 겸하였다. 그가 元나라 順帝때 侍臣으로 공민왕비인 大長公主를 扈從하여 와 공민왕으로부터 安陰君에 봉해졌다. 안음은 현재 경남 咸陽의 安義面이다.


81. 潮洲石氏 

시조는 石星. 明나라의 戶部, 工部, 兵部尙書를 지냈다. 明나라가 淸에 망하게 되자  그의 차남 石在錦이 숙부인 參政公 石奎와 그의 손자와 함께 망명, 가야산 아래 星州에정착, 관향을 星州라고 하고 혹은 중국의 본향을 그대로 이어 潮州石氏라 하였다.


82. 海州石氏

시조는 石星. 우리나라에 건너온 것은 壬辰倭亂 때 구원병을 보내 우리나라를 도운 것으로부터 계기가 되었다. 그의 장남 石潭이 遼東을 거쳐 해주에 표착 하였고, 조정에서는 그를 首陽君에 봉하여 해주를 賜貫 했다.


83. 忠州. 洪州石氏

시조는 石隣. 중국에서 왔으며 고려 의종 때의 庚寅亂에 西京郞將으로 발탁되었고, 명종 6년에 趙位寵의 반란을 평정하는데 공헌 忠州石氏의 기초를 세웠다. 洪州石氏는 忠州石氏에서 분관 되었다.


84. 寶城宣氏

시조는 宣允祉. 명나라 明殿試策에 장원하고 文淵閣學士로 있다가 고려 우왕 8년에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왔다. 고려 조정에서는 그에게 湖南按廉使로 제수 했다.


85. 太原鮮于氏

시조는 箕子. 鼻祖는 鮮于靖이다. 기자가 箕子朝鮮을 세우고 그  맏아들 松이 장혜왕으로 즉위하면서 아우인 仲을 于山國에 봉하여 조선의 鮮자와 우산국의 于자를 따서鮮于씨로  바꾸었다. 기자가 중국 殷나라 成湯의 후손이라는 데서 그 출신지 太原을 관향으로 삼았다. 衛滿의 亂과 溫祚의 변에 선우씨가 화를 입을까 變姓하여 씨족이 寒微해 졌던바, 고려 문종조에 中書注書를 지낸 鮮于靖이 나오므로 중흥의 기틀을 다지게 되었다.


86. 慶州偰氏

시조는 偰遜. 元나라 출신으로 고려 공민왕 7년 紅巾賊의난을 피하여 망명 귀화하여 富原侯에 정해졌다. 선조는 위그르 사람으로 偰輦河에 世居 하면서 偰氏로 창씨 했고, 太傳 偰克直이 그의 8대조가 된다. 귀화 후 대대로 벼슬길에 올랐다.


87. 慶州葉氏

      시조는 葉公濟, 宋나라 사람으로 송의 고종조에 급제 翰林學士에 올랐다. 宋.

      蒙古간의 和議에 반대 7學士와 함께 우리나라에 와서 潭陽에 정착 하였다. 潭

      陽을 본관으로 하다가 慶州로 이적 하였다.


88. 昌寧成氏

   시조는 成仁輔. 고려조에 中尹 戶長을 지냈다. 호장은 고려시대 지방민을 다스리

    는 豪族長을 뜻한다. 成씨는 본래 周文王의 아들 叔武의 후예라고 한다. 당나라

    학사 成鏡이 우리나라에 와, 그 후손이 번창했는데 고려 때 成淑昌이 戶長副

    正이 되었고 그의 아들이 成仁輔라고 한다.


89. 平山邵氏- 미상

시조는 邵雍. 邵氏는 召字가 변하여 이루어진 성이라 한다. 邵雍은 周나라 召公의 遠孫으로 潁川團 鍊推官을 지내고 新安伯에 봉해졌다.  世系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후손들이 平山에 살면서  그곳을 貫鄕으로 삼고 있다.


90. 宋    氏

    ‘宋氏上系世譜’에 보면 우리나라 宋씨의 都始祖는 중국 唐나라에서 戶部尙書를 지낸 宋柱殷이라 한다. 언제 귀화했는지는 기록에 없다. 그 후 7세 宋舜泰의 후손 宋自英이 세 아들을 두었는데 그들이 여산송씨, 은률송씨, 서산송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1) 礪山宋氏 : 시조 宋惟翊, 나라에 공훈이 많아 礪山君에 봉해지고 銀靑光祿大夫 樞密院副使에 추증 되었다. 여산송씨에서 新平宋氏. 楊州 宋氏가 파생 되었다.

2) 恩律宋氏 : 시조 宋天翊, 그 뒤 세계를 실전하여 그의 후손 宋大原을 시조로 하고 있다. 송대원은 判院事를 지냈고, 恩律君에 봉해졌다.

3) 瑞山宋氏 : 시조 宋文翊, 그뒤 세계를 실전하여 조선조에 顯信校尉를 지낸 宋而碩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 외에 金海宋氏 龍城宋氏를 비롯한 대부분의 송씨가 도시조 宋柱殷의 후손이라는 데 이의가 없다고 한다.

91. 南陽宋氏

    시조는 宋圭. 당나라 말년에 翰林學士로 있다가 간신의 참소로 7학사와 함께 신

    라에 와 吏部尙書가 되었다.


92. 舜    氏- 미상

舜氏는 1930년 국세조사대 처음 나타난 성씨로 중국 河東에서 系出 되었다. 본관은 林川, 坡州가 있다.


93. 延日. 光山承氏

시조는 承愷. 고려 정종 때 大將軍을 지냈다. 우리나라 承氏의 조상은 중국 東漢 명제 때의 琅琊사람인 承宮으로 衛大夫 成叔承의 후손이라고 한다. 그는 건초 1년, 왕망(王莽)의 난을 피해 벼슬을 버리고 우리나라에 와 경북 延日에 터를 잡았다. 光山承氏도 承愷의 후손 이다.

광산 승씨(光山承氏)는「여지승람(輿地勝覽)」에 광주(光州)의 토성(土姓)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시조(始祖)는 고려 정종(靖宗) 때 대장군(大將軍)을 역임한 승 개(承 愷)로 전한다.

  

94. 南原. 密陽昇氏

시조는 昇信. 중국 元나라 말기에 夏나라를 세워 隴西王이 된 明玉珍의 후손이다. 2대 왕 明昇은 명의 傳友德 장군에 패하여 공민왕 21년에 망명 해 왔고, 조선조의 태종은 그를 華蜀君으로 봉했다고 한다. 昇信은 그의 네째 아들로 본래의 姓을 버리고 아버지 이름자인 昇으로 改姓 했다.


95. 浙江施氏

시조는 施文用. 明나라 무장으로 兵部侍郞을 지낸 施允濟의 아들이다. 그는 丁酉再亂 때 조선을 돕기 위해 참전, 遊擊將軍으로 陜川에서 왜군을 무찌르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후 그는 돌아가지 않고 星州에 정착 하였다.


96. 綾鄕(泰仁)柴氏

시조는 柴登科. 壬辰倭亂때 督陣將으로 왔고, 丁酉再亂때는 遊擊將으로 와서 싸움에 이기고 돌아갔다. 그뒤 明나라가 淸나라에게 망하자 그의 아들 柴植이 明의 遺臣들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와, 전라도 泰仁에 눌러 살게 되었다. 綾鄕은 신라 때 태인의 관할  지역이다.


97. 居昌愼氏-확인요

시조는 愼修. 중국 宋나라 開封府 사람으로 神宗때 진사를 지냈다. 고려 문종때 우리나라에 사신으로와 문종으로부터 후대를 받았고 숙종 때 參知政事를 지냈다. 중국의 愼씨는 본래 고대 黃帝의 후손으로, 楚 惠王의 아들 連이 愼縣이란 곳에 숨어 살면서 姓을 愼으로 고쳤다고 한다.


98. 靈山. 寧越辛氏- 미상

시조는 辛鏡. 고려 인종조에 문과에 올라 平章事에 올랐다. 그의 先系는 중국 隴山의 寧州사람으로 唐나라 天寶 연간에 嚴侍郞과 함께 신라에 왔다 한다. 그러나 그 뒤 계서가 분명치 않아 고려조의 辛鏡을 시조로 삼아 起世하고 있다. ‘辛氏姓貫考’ 편에는 寧州가 중국에 없다며 귀화 성씨가 아니라고 변증 하였다.


99. 豊山沈氏

시조는 沈滿升. 중국 吳興(중국 절강성 북부, 태호 남쪽 기슭에 위치한 도시) 사람으로 고려 예종 5년 胡宗且, 劉載, 安愼之 등과 함께 우리나라에 와 풍산현에 정착 하였다. 그는 특히 문장으로 이름이 높아 淸宦職에 발탁 되었고 이어 尙書奉御, 太子詹事府詹事에 올랐다.


100. 竹山安氏(舊)

시조 安邦俊. 그의 아버지 李瑗은 원래 唐나라 宗室 사람으로 신라 애장왕 8년에 건너  와 개성에 살았고, 그의 아들 3형제는 李枝春, 李葉春, 李花春인데, 경문왕 때 왜구의  노략질을 토평한 공로로 安國之臣이라하여 안씨로 賜姓을 받았다. 장남 이지춘은 안  방준으로 사명 받고 竹山君에 봉해졌다.


101. 廣州安氏

시조 安邦傑. 竹山安氏(舊)의 시조 안방준의 동생으로 원명은 李葉春이었다. 고려 태조  조에 大將軍이 되었고 廣州君에 봉해졌다. 그의 17세손 安元衡은 竹山安氏(新)의 시조가 되었다.

  

102. 耽津安氏 

시조는 安元璘. 고려 충혜왕 2년 문과에 올라 政堂文學 檢校中樞府使에 이르렀고 耽津君에 봉해졌다. 丙午譜 서문에 보면 耽津安氏는 順興安氏에서 계출되었다고 한다.  안원린은 중국 朧西사람으로 新羅에 와서 安國之臣이란 칭호를 받은 李椀의 16세손 이며, 그의 장남 安祐는 紅巾賊을 토벌하여 난을 평정 했다. 


103. 太原安氏

     시조 安萬世. 元나라 太原사람으로 典書를 지냈다고 한다. 그는 魯國公主를

    陪從하여 동래, 정착 세거 하였는데, 공민왕 때 벼슬이 禮部尙書에 이르렀다.


104. 艾    氏-미상

‘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애씨(艾氏)는 중국 天水에서 계출된 艾孔의 후예이다.

우리나라의 애씨의 연원에 관해서는 고증할 문헌이 없다.


105. 淸州楊氏

시조는 後漢 楊震의 43세손 楊起로, 元나라 金紫光祿大夫 中書省政丞으로 있을 때 고려 공민왕비인 노곡대장공주를 陪從하여 왔다. 그뒤 다시 元나라에 들어가 많은 외교적 공헌을 하여 三韓昌國功臣 上黨伯에 봉해졌고, 淸州를 관향으로 하사 받았다.

楊氏는 同祖 同根이다. 멀리 중국 弘農(지금의 河南省) 출신 唐叔虞의 후손 伯僑까지 그 선계가 올라 가지만 우리나라는 淸州楊氏를 비롯, 密陽. 南原. 中和. 安岳 등을 관향으로 하는 楊氏가 大宗을 이루고 있다.


106. 通州楊氏

시조 楊福吉. 중국 通州 출신으로 明나라 9義士중 한사람이다. 그는 나라가 망하자 昭顯世子를 따라 동래하여 함께 北伐을 꾀하였으나 실패하자 귀화, 정착하게 되었다.


107. 襄    氏-미상

    襄씨는 본래 중국 周나라 莊公의 아들 襄仲의 후손으로 謚號를 姓으로 삼았다고

    전하는데 우리나라 襄氏와의 관계는 명확지 않다. 1960년 국세조사 조사에는

    238명이 파악 되었다.


108. 慶興魚氏-미상

      明나라 尙書侍郞 魚石奎의 손자 魚繼福이 함경도 경흥에 정착, 魚氏로 賜

      姓 받았다고 전하는 문헌이 있다고 한다.


109. 咸從魚氏-미상

    시조는 魚化仁, 고려 명종 때 戶長同正을 지냈다. ‘癸丑譜’에 보면, 咸終魚氏는

   중국 馮翊縣사람인데 南宋 영종(高麗 명종 1년)때 난을 피하여 우리나라의 江陵

   에 왔다가 뒤에 평안도 咸從縣으로 옮겨 터를 잡았다고 하였다.


110. 寧越嚴氏

시조는 嚴林義. 고려조에 戶部員外郞을 지냈고 奈城君에 봉해졌다. 그는 중국 漢나라  嚴子陵의 후손으로 이 새로운 악장을 만들어 여러나라에 전파할 때 嚴林義를 正使로, 寧越辛氏의 시조인 辛侍郞을 副使로 파견, 우리나라에 왔다고 한다. 嚴林義는 그 뒤 영월 땅 杏亭에 눌러 살게 됨으로써 寧越嚴氏의 시조가 되었다. 영월엄씨에서 분적한 尙州嚴氏도 있다.


111. 宜寧余氏-미상

      시조 余善才, 宋나라 사람으로 諫議大夫로 있으면서 天子에게 직언을 서슴치 않다가 미움을 사, 우리나라에 건너와 고려 조정에서 宜春君으로 봉해졌다. 宜春은 宜寧의 옛 이름이다. 우리나라 余氏는 모두 宜寧 단일본이다.


112. 呂    氏

시조는 呂御海. 본래 중국 萊州 사람으로 唐나라 僖宗 때 翰林學士로 있다가 黃巢의 난을 피하여 신라 헌강왕 3년에 우리나라에 와 典書에 올랐다고 한다. 그 뒤 星州(星山)呂氏咸陽呂氏로 분관 되어 왔다. 그러나 兵火등으로 중간에 譜版을 잃어 世次를 확인 고증할 길이 없어, 고려 말에 三中大匡을 지낸 呂良裕를 중시조로 하고 있다.


113. 谷山延氏

시조는 延繼苓. 고려조에 金紫光祿大夫 門下侍郞을 지냈다.

중시조는 延壽菖은 원래 중국 河南省 弘農사람이었다는 說이 있다. 고려 원종의 아들 忠烈은 원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원세조 忽必烈의 딸 齊國大長公主와 정략 결혼을 당했다. 1274년 충렬이 왕위 계승을 위해 고려에 환국할 때 元의 門下大將軍의 직에 있으면서 齊國大長 公主를 扈從, 고려로 건너온 인물이 延壽菖이다.


114. 燕    氏-미상

연씨는 본래 百濟 8대성의 하나로 ‘北史’ 東夷傳 百濟國條 ‘三國史記’ 등에는 여러 가지 燕氏가 나타난다.  한편 燕氏는 원래 중국의 성씨로 周나라 敬王 때 孔子의 제자 중 燕伋이 있었고 漢나라 昭帝 때는 倉이 있었는데 燕의 나라 이름을 姓氏로 삼았다고 한다.


115. 坡州廉氏-미상

시조는 廉邢明, 혹은 郊明이라고도함. 後唐 때인 五季의 난을 피해 우리나라에 온 뒤 지금의 파주인 峰城에 터를 잡은 뒤 고려 태조의 삼한통합에 공을 세워 三韓壁上功臣이 된 분이다. 坡州廉氏는 峰城, 曲城, 坡州 순으로 改貫 되었다.


116. 義興芮氏-미상

      시조는 芮樂全. 고려 인종 때 門下贊成事를 지냈고, 문장과 덕망이 빼어난 碩學이었다. 그의 선대는 중국에서 왔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한 근거가 없어 단정을 못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山西省에 芮省이 있고 慶南 蔚州郡 川前里의 신라 花郞石刻에서 芮氏姓의 金石銘이 발견되기도 해서 부정 할 수도 없다. 義興은 경북 軍威郡에 있는 지명이다.


117. 吳    氏

      오씨는 신라 지증왕 1년 중국에서 건너와 한동안 咸陽에서 살다 귀국한 吳瞻을 都始祖로하여 여러 파로 分籍 하였다. 吳瞻은 22년간 살다가 돌아가고 이땅에 남은 吳膺의 후손이라는 說이 널리 알려져 있다.

      그 후 吳膺의 12세손 吳光佑가 다시 중국에 들어갔다가 현손인 吳延龍이 고려 문종 30년에 다시 들어와 정착함으로써 吳氏의 始原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고려 고종3년, 吳瞻의 23세손 吳守叔이 吳賢輔. 吳賢佐. 吳賢弼과 거란군을 격퇴한 공으로 각기 海州君. 同福君. 寶城郡에 봉해졌다.

      1) 海州吳氏: 시조 吳賢輔-咸平吳氏 ,羅州吳氏, 樂安吳氏, 三嘉吳氏, 義城吳 氏, 平海吳氏가 파생됨.

      2) 同福吳氏: 시조 吳賢佐-軍威吳氏가 파생됨.

      3) 寶城吳氏: 시조 吳賢弼-和順吳氏, 興陽吳氏, 長興吳氏, 全州吳氏, 咸陽吳氏, 荳原吳氏가 파생됨.

 

118. 海州吳氏

    시조는 吳仁裕, 宋나라에서 고려에 귀화해 海州에 터를 잡았고 성종조에 檢 校軍器監을 지냈다. 吳氏門中에는 이같이 본관은 같으나 시조를 달리하는 海州      吳氏가 있다. 吳瞻과 吳仁裕간의 관계는 고증할 자료가 충분치 않다.

    1) 延日吳氏: 吳仁裕의 6세손 孝成公의 큰아들 吳延慶을 시조로 하고 있음.

    2) 蔚山吳氏: 吳仁裕의 6세손 孝成公의 둘째아들 吳延祉를 시조로 하고 있음.


119. 宜寧玉氏

      시조는 玉眞瑞, 중국 唐나라 사람으로 고구려 영류왕 18년 교수 자격으로 건너온 8학사 중 한 분으로 고구려가 망하자 신라조에 벼슬하며 詩書禮樂을 가르쳐, 그 공으로 宜春君에 봉해졌다. 고려 신종 때 倉正이란 벼슬을 했고 문 장이 뛰어났던 玉恩宗을 起世祖로 하여 관향을 宜寧으로 삼았다.


120. 鳳城(金溝)溫氏-미상

    ‘鳳城溫氏族譜’에 보면 시조는 叔虞라 했다. 중국  周의  16대왕 成王이 아우숙우(叔虞)를 溫國에 봉함으로 성을 얻게 되었다고 하였다. 계대는 분명치 않으나 우리나라 봉성온씨의 시조는 平康公主와 결혼한 溫達將軍이다. 고려 공민왕 때 右部侍郞을 지낸 溫信을 中祖로 하고 있다.  鳳城은 전북 김제군 金溝이다.


121. 開城王氏- 미상

    시조는 國祖 , 고려를 건국한 王建의 증조부가 된다. 開城王氏는 모두 고려 태조의 후손인데 족보에는 東陽君 王垣을 1세조로 기세하고 있다. 선계에 관해서는 멀리 중국황제의 후손으로 東來 하였고 그 뒤 箕子朝鮮 때 師士가 되어 王氏로 賜姓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122. 濟南王氏

    시조는 王以文, 중국의 濟南府 章丘縣 출신으로 본래 이름은 鳳崗, 자는 岐陽인데 효종이 以文이라 이름을 지어 주었다. 丙子胡亂의 결과 鳳林大君이 瀋陽에서 돌아올 때  陪從하여 입국했다. 濟南府 章丘縣 常遠庄에서 나왔기에 후손들은 그 곳을 관향으로  삼았다.


123. 海州王氏-미상

      시조는 王儒, 중국 山東省 사람으로 고려조에 귀화하여 太祖 때 賜姓 되었고, 大相을  지냈으며 章順公에 봉해졌다고 한다. 후손들은 그를 始祖로, 海州를 本貫으로 삼아 世系를 이어 왔으나 그 수는 극소수 이다.


124. 姚    氏-미상

      도씨의 본관은 徽州. 水原 등이 있는데, 병란을 피하여 귀화한 명나라 遺臣의 후예라고 한다. 姚씨는 본래 중국의 성씨로 漢나라 때 玄菟 太守를 지낸 姚光, 唐나라의 翰林學士 姚泊 등이 나타난다.


125. 木川于氏-미상

      시조는 于邦寧. 고려 인종. 의종 때 上書左僕射를 지냈다고 한다. 于氏는 원래 중국성씨로 周武王의 아들이 우(邘)땅에 정해지자 于자만을 써서 姓을 삼았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于氏는 木川 단본이다.


126. 原州元氏   

     시조 元鏡의 처음 이름은 慶이다. 중국 原城사람으로, 唐 太宗 때 고구려가 ‘道藝之士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자 唐나라에서 元鏡등 8학사를 파견하여 왔다고 한다. 그는 唐나라에서 金紫光祿大夫 平章事의 벼슬을 지내다 고구려에 와, 두 나라의 국교를 회복시켜 보장왕은 그에게 佐命功臣에 책봉 하였다고 한다.


127. 比安袁氏-미상

      비안은 경북 의성군에 위치하고 있다. 袁氏는 원래 중국 성씨로 陳나라 공자 轅塗濤의 후손으로, 뒤에 ‘轅’字에서 ‘車’를 떼 버리고 ‘袁’으로 성을 삼았다고 한다.


128. 長興魏氏

      시조 魏鏡. 신라조에 阿飡尙書侍中에 올랐고 懷州君에 봉해 졌다. 그는 唐太  宗이 신라 선덕여왕의 道藝지士의 초청에 따라 보내준 8학사(.... 奇... )중 한 사람으로 長興君에 봉해졌다.


129. 江華韋氏-미상

      시조는 韋壽餘, 고려 건국 초인 광종 11년에 중국에서 건너와 司膳官이 되고 官服을 제정, 科擧導入에 큰 공헌을 했다. 韋氏의 先系는 중국 태고시대 黃帝의 손자 전욱(顓頊)의 후손인 彭祖의 후예로 唐나라 때 크게 번성했던 씨족이었다.


130. 居昌. 江陵. 白川劉氏

      시조는 劉荃. 그는 중국 宋나라 때 사람으로 翰林學士와 兵部尙書를 지낸 뒤        고려 문종 36년 우리나라에 건너 왔다. 유전은 漢太祖 高皇帝의 41세손으로        王安石이 제정한 靑苗取息法이 부당하다고 極諫하다 참소를 받아 지금의 영        일군에 와 살았다고 한다.


131. 茂松. 平山庾氏

      시조는 庾黔弼. 고려 태조를 도와 삼한 통합에 공을 세워 三中大匡統合三韓翊贊功臣에 책록되고 태사에 추증 되었다. 중국 漢말 晋나라 초기에 庾荀悠 가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와 눌러 살게 됨으로써 庾氏의 연원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뒤 계대가  분명치 않아, 고려 開國 功臣인 庾黔弼을 실제의 시조로 삼게 된 것이다.

132. 沃川陸氏

시조는 睦普. 중국 浙江省 紹興府 사람으로, 後唐 명조때 8학사의 首班으로 우리 나라에와, 신라 경순왕의 사위가 되고 管城君의 봉해졌다. 그러나 그 뒤 480여년간 昭穆을 알수 없게 되어 후손 睦仁端을 起世祖로 세계를 잇고 있다.


133. 幸州殷氏

시조는 殷洪悅. 중국 唐나라 사람으로 신라 문성왕 12년 8학사의 한사람으로 우리나라에 와 禮樂을 가르치고 벼슬은 太子太師에 이르렀다. 경기도 고양군 행주에 정착 했음으로 그를 시조로, 본관을 幸州로 하였다.


134. 竹山陰氏

     시조는 음준, 원나라 사람으로 예부시랑으로 있다가 고려 공민왕비인 노국공

     주를 배종하여 왔다. 고려 왕조에서 죽산군에 봉해졌다.


135. 固城(鐵城)李氏

시조는 李璜. 중국 漢나라 武帝때 中書舍人이었던 李槃이 군사를 이끌고 우리나라에 와서 눌러 살았다. 李璜은 그의 24세손으로 고려 덕종 때 문과에 올라 密直副使를 거쳐 契丹軍의 침입 때 공을 세워 吏部尙書에 이르렀고 鐵嶺(固城의 별호)君에 봉해져 후손들이 관향으로 삼았다. 鐵城은 固城의 옛 이름이어서 鐵城을 관향으로 하는 이씨도 固城李氏와 같은 뿌리이다.


136. 尙州(商山)李氏-미상

시조는 李敏道, 중국 朧西 사람으로 翰林學士로 있다가 元나라 말기에 난을 피해 동래, 조선 개국때 공을 세웠다. 商山(尙州의 옛 이름)君으로 봉해졌고 조선인으로 동화케 하기 위하여 李太祖의 명령으로 본관을 朧西에서 尙州로 하였다.


137. 陽城李氏

시조 李秀匡. 宋나라 사람으로 고려에 와서 문종조에 벼슬길에 올라 三中大匡輔國에 이르렀고, 陽城君에 봉해졌다. 그는 출중한 인품과 剛柔兼全, 唐나라의 郭子儀에 비견 되었고 능란한 외교술로 契丹과의 외교를 성공시켜 定難功臣으로 책훈되었고 한다.


138. 延安李氏-미상

시조는 李茂. 중국 唐나라의 中郞將으로 신라 무열왕 7년 蘇定方의 副長으로 우리나라에 와 백제를 평정한 후 延安侯에 봉해졌다. 황해도 연안에 터를 잡아 후손들이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139. 隴西李氏-원래 한국성씨

     시조는 李長庚, 星主李氏의 중흥조이다. 이장경의 증손 李英이 明나라에 귀화 하여 대대로 높은 벼슬에 올랐으며 그의 5대손 李如松이 壬辰倭亂 때에 명나라 원군 총지휘관으로 우리나라에 와 평양성을 탈환, 전세를 역전시키는 공을 세웠다. 隴西李氏는 성주이씨와 같은 뿌리로서 ‘성주이씨대동보’(甲寅譜) 편찬을 계기로 두 종파가 동보하기에 이르렀다.


140. 丹陽李氏-미상

     시조는 李盃煥, 고려조 三韓功臣 三重大匡 門下侍中에 올랐다. 丹陽李氏 泰川 波 ‘庚寅譜’서문에는 “이씨는 중국 隴西에서 크게 번성한 大姓으로서 선계를 중국에 두고 있다”고 하였다. 이씨가 우리나라에 온 뒤 李盃煥은 丹山(丹陽의 옛 이름)에서 나와 王建의 삼국통일에 큰 공을 세웠다.


141. 安岳李氏-미상

     시조는 李震, 중국 漢나라 隴西 사람으로 漢무제 원봉3년 東征軍을 이끌고 衛滿朝鮮의 右  王을 정복, 漢四郡을 설치하는데 공을 세웠다. 한 무제로부터 樂浪太守로 임명된 뒤 壬險城(平壤)에 눌러 살게 됨으로써 安岳李氏의 시조가 되었다.


142. 原州李氏(舊)-미상

시조 李椿桂. 고려조에 安逸戶長을 지냈고, 인조와 의종때 兵部尙書를 지냈다. 그의 선계는 중국의 漢나라 고조 때 사람으로 秦始皇의 苛政을 피해 우리나라 辰韓에 피난 왔다. 오랜 옛 일이어서 세계가 불확실하나 신라 때 門下侍中을 지낸 李眞民이 遠祖라고 한다. 李椿桂는 그의 28세손이다.


143. 旌善李氏

시조는 李陽焜. 중국 宋나라 사람으로 金나라의 전쟁을 피해 우리나라에와 경주에 정착 함으로써, 정선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러나 관향을 정선으로 삼게 된 것은 그의 6세손인 李羲民과 아들 李性純이 고려 명종 26년 崔忠獻에 被禍, 손자 李遇元이 정선으로 낙향, 세거한데 연유한다.


144. 靑海李氏

시조는 李之蘭. 중국 南宋의 충신인 岳飛의 다섯째 아들 霆의 6세손으로 성은 佟,본명은 쿠룬투란티무르(古倫豆蘭帖木兒)이다. 그의 아버지 雅遠은 元나라의 金牌千戶였으며, 아버지에 이어 千戶가 되었다가 고려 공민왕 20년 귀화 하면서 李之蘭으로 개명하였다. 태조 李成桂를 도아 조선 개국공신이 되었으며 靑海伯에 봉해졌다. 原鄕인 중국 靑海省을 연유로 하여 본관을 삼았다.


145. 泰安李氏-미상

     시조는 李奇, 중국 당나라 때의 李昇南의 후손으로 고려 광종 때 亂을 피해  우리나라 태안에 들어와 정착, 세거하게 됨으로서 태안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의 7세손인 이천(李蕆)이 泰安府院君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泰安을 관향으로 삼았다고 한다.


146. 太原李氏-미상

시조는 李貴芝. 고려 충렬왕 때 太原에서 난을 피해 와서 司宰判書, 漢城府尹을 지냈다고 한다. 손자 李芳茂는 郞將을 지냈는데, 조선조 開國願從功臣으로 벼슬이 司正에 이르렀다. 뒤에 北靑으로 이거 정착 하면서 본향인 중국의 太原을 본관으로 삼았다.


147. 平山李氏

시조는 李敷明. 평산이씨(平山李氏)의 원조(遠祖) 이부명(李敷明)은 중국 당(唐)나라 설인귀(薛仁貴)가 보낸 8세자 중의 한 사람으로 평산(平山)에 들어와 백성들에게 예법을 가르쳤고, 사문박사(四門博士)를 지냈다. 그러나 그뒤의 세계를 실전, 그의 遠孫인 고려때 密直副使를 지낸 李子庸을 기세조로 하여 계대하고 있다. 선대는 중국 唐나라 출신으로 신라 말에 우리나라 平山에 들어와 백성들을 敎化한 분이라고 하나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


148. 花山李氏

시조는 李龍祥. 安南(베트남) 국왕 李龍翰의 아우로 나라가 망할 것을 예견하여 고려 고종때 甕津의 花山에 망명, 정착하였다. 이 사실을 고종이 알고 13년에 花山君에 봉했다. 安南國 시조인 交趾郡王 李公蘊을 시조로 하면서 그의 7세손인 李龍祥을 중조로 하여 계대하고 있다.


149. 異    氏

異氏는 중국 唐나라 덕종때 雲南王 李牟尋이 선조라고 한다. 이씨의 본관은 童城(通津). 南原. 密陽. 靑陽이 있다.


150. 太原伊氏

伊氏는 원래 중국의 성씨로 商나라 湯王때의 明相 伊尹, 漢나라 成帝 때 御使中丞 伊嘉 등이 문헌에 전해오나 언제 우리나라에 들어 왔는지는 알 수 없다. 본관은 太原(忠州), 銀川(白川)이 있는데, 銀川伊氏 시조는 알 수 없고, 太原伊氏의 시조는 伊丹取라는 이름만 전해온다.


151. 喬桐印氏

시조는 印瑞. 신라 유리왕(279년) 때 사신으로 신라에 건너왔고, 왕이 阿湌과 太常博士를 제수 하였다.  貫은 印瑞가 중국의 馮翊印氏로 하였다고 하는데, 고려 인종 때 翰林學士 인빈(印邠)이 喬樹府院君이 되어 교수인씨로 바꾸게 되었다. 喬樹는 喬桐의 옛 이름이으로 고려 인종때부터 교동인씨로 부르게 되었다.


152. 延安印氏

시조는 忍侯. 고려조에 檢校政丞에 올랐고 平陽君에 봉해졌다. 그의 선계는 몽고 사람으로 본명은 홀자알(忽刺歹)이었다. 그는 고려 忠烈王妃 齊國公主를 陪從하여 우리나라에 온 뒤 귀화, 印侯로 賜姓名 되었다고 한다.


153. 林    氏

太原인 林蘊을 原祖(得性祖)로,  중국 당나라 말엽 한림학사를 지내다 정치적인 화를 피해 신라에 온 8학사(林八及. 薛仁敬. 許董. 劉荃. 宋圭. 崔沍. 權之奇. 孔德狩) 중의 한분인 林八及을 元祖(東渡祖)로 받들고 있다. 임씨는 우리나라 10대 성씨중의 하나다. 이중 평택 임씨가 차지하는 비율은 약 70%이다.  平澤은 시조 林八及이 자리 잡았던 고을 이름이다. 平澤林氏는 후대에 와서 善山. 鎭川. 醴泉. 扶安. 沃溝. 益山. 蔚津. 兆陽. 安東. 沃野. 全州. 恩律. 利安. 林川. 淳昌. 長興. 寶城등 25개 관향으로 분관되었다.  


154. 長興任氏

시조 임호(林灝). 중국 紹興府 출신으로 宋의 철종시 吏府尙書를 지낸뒤 당시 중국인들의 동국진출이 빈번함에 따라 우리나라에 귀화, 定安縣(장흥)에 정착, 세거의 터를 마련하였다. 그가 우리나라에 온 연대는 고려 정종때이다. 그의 아들  任懿가 문종때 문과에 급제한뒤 吏部尙書, 中書侍郞 平章事, 文部侍郞平章事로 致仕하고 佐理功臣이 되어 그를 1세조로 삼게 되었다. 


155. 豊川任氏

시조는 任溫. 그는 중국 紹興府 慈溪縣에서 고려로 건너와 6세손에 이르기 까지 황해도 풍천에서 살아 풍천임씨가 비롯됐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후손들은 이들 선대가 꼭 중국인은 아니라는 해석도 내놓고 있다.   


156. 張    氏

우리나라 장씨는 중국의 張伯翼으로부터 貫을 이어 浙江省 출신인, 5세 張貞弼이 우리나라에 와 영남의 蘆田, 곧 지금의 仁同에 살게 된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장정필은 절강성 출신으로 고려 왕건이 후백제 견훤을 정벌할 때 큰 공을 세웠다. 張貞弼은 德水, 浙江張氏를 제외한 結城. 仁同(玉山). 安東. 順天. 求禮. 鳳城. 丹陽. 木川. 禮山. 沃溝. 蔚珍. 知禮. 鎭安. 鎭川. 昌寧. 靑松. 洪城. 夏山. 興陽. 驪興. 扶安 등 여러 장씨의 都始祖로 대접 받는다.


157. 德水張氏

시조는 張舜龍. 본래는 回回國 사람으로 고려 충렬왕때 귀화했다. 회회국은 지금의 아라비아에서 新疆 위구르까지 이르는 回敎地域을 일컫던 명칭으로 그의 출신지역은 어딘지 분명치 않다. 그는 元나라 사람으로 고려 원종 15년, 忠烈王妃인 齊國大長公主를 따라 고려에왔으며 충렬왕으로부터 張舜龍이라는 성명을 받고 德成府院君에 봉해졌음으로 德水를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덕수는 경기도 개풍군에 있던 지역이다.


158. 浙江張氏

시조는 張海濱. 중국 明나라 浙江省 鳥江縣사람으로 丁酉再亂때 遊擊將軍 吳惟忠의 휘하장사로 출진, 竹山과 忠州싸움에서 크게 이기고 蔚山전투에서 부상, 귀국하지 못하고 軍威에 정착했다. 후손들이 여러代를 그곳에 세거해 오면서 시조의 출신지인 浙江을 관향으로 삼어왔다. 浙江張氏는 원래 중국 漢나라 丞相 留候 張良之의 후예이다.


159. 牙山蔣氏

시조는 장서(蔣壻). 중국 宋나라 사람으로 金紫光祿大夫 神慶衛 大將軍으로 있으면서 金나라와 항쟁을 주장했으나 받아드려지지 않자 배를 타고 망명, 우리나라 牙山에 표착하였고 牙山君에 봉해졌다. 그것은 고려 예종 때 일이다. 蔣은 나라이름으로 지금의 汝南縣이라고 한다. 蔣氏는 牙山 단본이다.


160. 居昌章氏-미상

시조는 章宗行. 고려 충렬왕조에 奉翊大夫版圖判書, 藝文舘 大提學兼 春秋館事를 지냈다.  중국 章氏는 南唐때 建州刺史를 지낸 자조(仔釣)를 시조로 하고 있다. 그의 아들 章頻은 宋나라 眞宗때 刑部郞中을 했고 그 후손인 章鑑이 南宋의 度宗때 右丞相을 지내다 화를 피하여 고려에 와 蔭襲했으나, 昭穆이 분명치 않아 章宗行으로 起一世 하였다. 章宗行의 아들 章斗民이 공민왕때 上將軍이 되어 紅巾賊을 평토한 공으로 侍中公 娥林(현재의 居昌)君에 봉해졌다.


161. 莊    氏-미상

본래 중국 楚나라 莊王의 후예로 莊子(莊周)는 전국시대의 大思想家 이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莊氏는 壯甫이다. 그는 고려조 명종때 무신으로 兵部員外郞을 지냈다. 본관으로는 衿川(果川지방). 長連. 全州 등이 있다. 대부분 北韓지역에 집중 거주하고 있다.


162. 廣平田氏-미상

시조는 田好謙. 본래 明나라의 經籍隸 鄕學生으로, 明이 淸나라에 망하게 되자 인조 14년 우리나라에 귀화했다. 田氏의 선조는 중국 趙나라 사람이다. 인조가 그를 가상히 여겨 訓練將에 예속시켰는데 丙子胡亂때 왕궁을 호위한 공으로 原從功臣에 책록되고 折衝將軍에 올랐다.


163. 南陽田氏-미상

    시조는 田柱, 본래 성명은 王康이었으나 조선조의 王氏末殺政策으로 태조 3년에 화를 당했다. 그의 손자가 두차례의 왕자의 난때 공을세워 田興이라 賜名되고 몰락당한 가문을 일으켜 세웠다. 田興은 그의 조부가 外職으로 나갔던 지명을 따서 본관을 南陽으로 하였다.


164. 潭陽田氏-미상

시조는 田得時. 고려 때 賢良으로 薦擧되어 문과에 장원하고, 의종조때 左僕射 參知政事에 이르렀으며 潭陽君에 봉해졌다. 시조 田得時의 선계는 상고할수 없으나 중국 濟나라로부터 우리나라에 들어왔다고 한다. 또 ‘甲子譜’에는 濟나라의 宗室의 후예라 하였다.  延安田氏. 河陰(江華의 속현)田氏는 모두 田得時의 후손이다.


165. 聞慶(冠山)錢氏

시조는 錢惟謙. 원나라 사람으로 龍圖閣直學士를 지냈다. 그는 吳越開國王인 武肅王 錢  략의 후손이다. 1351년 공민왕비인 노국공주를 배행, 최영장군의 누이와 결혼, 開京에 눌러살게 되었다. 우왕 14년 李成桂의 威化島回軍으로 이듬해 최영장군등이 피살되자 冠山(지금의 聞慶)에 유배되어 살기 시작하면서 聞慶錢氏의 기틀이 잡혔다.


166. 瑞山鄭氏

시조는 鄭仁卿. 고려 고종 41년 문과에 급제, 벼슬길에 오른 뒤 推誠政策安社功臣 壁上三重大匡匡靖大夫 都僉議中贊 上將軍 判典理司事가되고 瑞山軍에 봉해져 화려한 족보를 이루었다. 瑞山鄭氏는 본래 중국 浙江에서 대대로 벼슬을 해온 오랜 씨족이다. 鄭仁卿의 曾祖 鄭應冲은 宋나라에서 判將作監事였고 조부 鄭儀는 尙書佐僕射를 지냈다. 


167. 瑯琊鄭氏

시조는 鄭先甲. 명나라의 進士를 지냈으며 중국 山東省 제남부의 瑯琊에서 출생하였다. 인조 22년 明淸戰爭에 倡義 起兵하였으나 포로가 되어 瀋陽舘에 執留당하다가 丙子胡亂 결과로 鳳林大君의 귀국길에 陪從하게 되어 입국, 정착 하였다. 瑯琊鄭氏의 源祖는 중국사람인 鄭文謙으로 鄭先甲의 증조가 된다.


168. 丁    氏

丁씨의 시원은 중국 濟나라 太公의 아들 伋이 周室의 勳戚으로 丁땅에 봉함으로 비롯되었다. 伋은 四岳의 후손이고, 四岳은 炎帝新農氏의 후손이다. 우리나라 丁氏는 신라 문성왕 15년인 853년 중국 당나라 大相의 자리에 있던 大陽君 丁德盛이 우리나라 서해남부에 있는 押海島(전남 신안군 압해면)에 유배되어와 정씨의 시조가 되었다. 丁氏는 모두 한 시조 大陽君으로부터 태어났으나 지금은 靈城. 羅州. 先昌原. 後昌原. 義城 등 5개 파로 나누어지고 있다.


169. 河南程氏

시조는 程羽. 중국 後晋의 進士로  宋 太宗때 太子少師를 지냈다. 우리나라 河南程氏는 그의 18세손 程思祖로부터 계세되었다. 그는 元나라 순종때 衛尉校丞에 올랐고 고려 공민왕비 魯國公主를 孔紹등 20여명과 함께 배종하여 와, 殿中侍御史가되어 우리나라에 河南程氏의 터를 닦았다. 


170. 漆原(固城)諸氏

중시조는 諸文儒. 고려 충숙왕 7년, 上王인 충선왕이 吐蕃(티베트)으로 귀향갈 때 扈從했다. 上王이 환국뒤인 충숙왕 17년에 그 공으로 壁上一等功臣이 되고 平章事에 배하였으며 지금의 漆原인 龜山府院君에 봉해져 후손들이 칠원을 관향으로 삼았다.

諸氏는 중국 漢나라 諸葛嬰 장군이 始祖로서, 유명한 諸葛亮은 그의 6세손이다. 諸葛亮의 증손 諸葛忠은 漢이 망하고 父兄이 순절하자 13세 나이로 東來하여 신라에 입국하였다. 고려 현중때 諸葛嬰의 34세손으로 諸葛泓과 諸葛瀅 형제가 탄생하자, 형 諸葛泓은 諸氏로 하여 南陽君에, 아우 諸葛瀅은 갈씨로하여 瑯琊君에 봉함으로써 姓이 나누어졌다.   


171. 南陽 諸葛氏

중시조는 諸葛忠. 중국 魏나라 사람으로 魏의 지배를 싫어해 신라 미추왕때 우리나라에 와 南陽 諸葛氏의 중시조가 되었다. 그의 先系는 前漢말기에 泰山郡丞을 지낸 諸葛珪를 시조로 삼고 있는데 그는 유명한 諸葛亮의 아버지로서 諸葛忠은 그의 5세손이다. 중국의 본관인 南陽을 관향으로 쓰고 있다.


172. 金堤趙氏-미상

 시조는 趙連壁. 고려 고종조에 大將軍이 되었고 壁城君에 봉해진 인물이다. 벽성은 金堤의 옛이름이다. 金堤趙氏의 선계는 1) 箕子가 데리고 온 열두 사람중하나인 趙寔이 遠祖라는 설,  2) 趙寔의 후손인 趙世冑가 중국에서 翰林學士로 있다가 五季의 亂을 피해 동래하여 遠祖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173. 白川趙氏

시조는 趙之遴, 그는 宋태조 조광윤(趙匡胤)의 큰아들 趙德沼(魏王)의 세째 아들로 皇帝 登極에 얽힌 난을 피하여 우리나라에 와 지금의 황해도 白천에 정착, 고려 현종 때 金紫光祿大夫 左僕射 參知政事에 오른 분이다.


174. 林川趙氏

시조는 趙天赫. 고려 현종때 契丹軍을 격파, 그 공으로 嘉林(지금의 林川)백에 봉해져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면서 관향을 林川으로 하였다. 趙天赫은 宋太祖 趙光胤의 손자인 기왕(冀王) 趙惟吉의 다섯째 아들이라 한다. 그는 魏王이 화를 입자 숙부 趙惟固와 함께 우리나라에 피난, 夫餘의 林川에 정착하였다.

175. 稷山趙氏-미상

     ‘甲子譜’에 의하면 “ 箕子의 宗室 한분인 斗元이 衛滿의 亂을 피하기 위해  趙씨로 변성, 도망쳐 살아남았는데 그 다섯 아들이 平壤. 豊讓. 漢陽. 白川. 玉川 등에 봉해짐으로서 각기 본관이 되었고, 시조인 趙成은 한양파에서 분파, 백제 溫祚王을 도와 開國功臣이 되었다”고 한다. 趙成이 稷山伯에 봉해져  후손들이 그 官爵에 따라 稷山을 본관으로 삼았다.


176. 平壤趙氏-미상

시조는 趙椿. 고려 예종과 의종 연간의 인물로 金紫光祿大夫 義兵上將軍이 되어 南宋을 도와, 金나라 정벌에 가담하여 공을 세웠고 樞密院副使가 되었다.

평양조씨 문중에서는 선계가 箕子와 함께 왔다는 설을 믿지 않는다. 그보다 중국의 北宋이 金나라에 망하자 趙翼. 趙慶. 趙廣등 세 왕자가 고려에 망명, 우리나라에 정착하게 되었고 자손이 번창함에 따라 白川. 漢陽. 楊州. 平壤. 林川 등 여러 조씨로 분관된 것으로 믿고 있다. 이들 조씨 사이에는 관향이 다르지만 同祖 同源이라하여 서로 혼인을 하지 않는 오랜 관습을 갖고 있다.


177. 漢陽趙氏-미상

     시조는 趙之壽. 중국에서 건너 왔는데 그 연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趙氏五千年史’에는 趙之壽의 선대는 중국 전욱(顓頊) 高陽氏로 宋의 태조인 趙匡胤이 선조이며 그 후손인 趙翼의 둘째아들이라고 하였다.  趙之壽는  고려 명종. 신종. 희종. 강종 등 4조에 걸쳐 벼슬하여 朝順大夫 僉議中書事에 이르렀고 그 후손가운데는 많은 名臣賢儒가 배출 되었다.


178. 咸安趙氏-미상

     시조는 趙鼎. 중국 後唐 사람으로 신라 말기에 두 아우 趙釜와 趙鏜을 데리고 우리나라에 왔다. 王建을 도와 陜川에서 起義, 후에 古昌城(安東)에서 후백제 甄萱軍을 대파하는 등 큰 공을 세워 開國壁上功臣 大將軍에 올랐다.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咸安에 세거하면서 본관을 함안으로 삼았다.


179. 橫城趙氏-미상

     시조는 趙翌. 고려조 광종조에 門下侍中 橫城君에 봉해져 득관하게 되었다. ‘壬寅譜’ 횡성조씨 근원편을 보면, “조씨의 근원은 중국 전욱(顓頊) 高陽氏의 후예로 周나라 때부터 크게 번성한 씨족이었다”고 한다. 周의 穆王 때 趙國의 君主가 되었는데, 혜왕 5년에 秦의 소왕 2세인 安國軍에 망하여  그뒤 근근히 명맥을 유지해 오다가 고려 정종 때 趙瞻이 우리나라에와 平章事를 지냈다. 광종9년에 고려에서 처음으로 실시한 과거에 趙翌이 장원급제, 벼슬이 翰林學士에 오르고 橫城君에 봉해졌다.


180. 靈岩鍾氏-미상

     鍾氏는 송나라 桓公(皇帝)이 둘째 아들을 鍾城의 王으로 봉하고, 鍾氏를 내림으로써 이루어진 성씨라고 한다. 그 후에 銅修, 芝蘭이 조선에 들어왔다 했으나 언제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조선의 태조가 개국 후에 郞州(靈岩의 옛이름)를 靈岩으로 고쳐 鍾寬秀를 靈岩伯에 봉하였다. 본관을 河陰. 江華등 으로하는 종씨는 모두 靈岩鍾氏의 후손이다.


181. 淸州左氏-미상

     시조는 左亨蘇. 元나라 千官侍郞으로 고려 충렬왕 때 耽羅(제주)의 牧馬場 監牧官으로 와 그 곳에 정착, 후손들이 세거하게 되었다. 그러나 후손들은 본관을 청주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182. 尙州周氏-미상

     시조는 周頤. 중국 당나라 사람으로, 신라 원성왕 2년 副使로 우리나라에 와 侍衛府大監과 兵部令. 尙州摠管을 지냈다. 후손들이 尙州에 세거하면서 관향을 상주로 삼게 되었다.

  

183. 鐵原周氏

     시조는 周承光. 尙州周氏 시조 周頤의 조부로 당의 중종조에 東北面指揮使를 지냈다. 그는 당 태종비 測天武后가 황실을 장악, 국호를 장악 하는 등 ‘革唐’이 일어나자 탄식하고 두 아들을 데리고 신라 효소왕 1년에 우리나라에 왔다고 한다. 그 때 함께 온 아들 周行儉과 周孝儉이 철원에 터를 잡게 되어 그 곳을 관향으로 하게 되었다.


184. 草溪周氏

     시조는 周璜. 중국 周나라 왕실의 후예로 唐말에 翰林學士로 있다가 신라 효공왕 11년, 五季의 난을 피하여 卞. 鄭 등 두 학사와 함께 우리나라에 와 草溪(지금 경남 협천군 초계면)에 세거 하게 되어 자손들이 관향으로 삼았다. 그 뒤의 子孫이 長興. 森溪. 咸安. 安義. 豊基 등으로 분관 되었다.


185. 新安朱氏

     시조는 朱潛, 중국 南宋사람으로 유명한 유학자인 朱熹(흔히 朱子라 한다)의 증손이다. 그는 南宋이 元나라에 망하자 우리나라에 망명, 在野 士林으로 청절한 기풍을 지켰다. 그 후 후손들이 세거지를 따라 綾州. 羅州. 全州. 咸興등 관향을 써오기도 했으나 고종 39년 종중의 합의로 본관을 新安으로 통일 하였다.

   


186. 忠州池氏

     시조는 池鏡. 중국 宋나라 弘農 사람으로 고려 광종 11년 太學師로 奉使官이 되어 우리나라에 와 金紫光祿大夫 太保 平章事에 올랐다. 충주를 관향으로 삼은 것도 雲巖公 池宗海가 門下侍郞平章事로서 충주에 살아 忠原伯에 봉해진 것이 연유가 되었다고 한다. 

187. 廣東陳氏

     시조는 東璘. 중국 明나라 장군으로 丁酉再亂 때 御倭都摠管으로 우리나라에 왔다. 인조 22년 明나라가 淸에게 망하자, 그의 손자 海沙公 陳泳溸가 우리나라에 망명, 廣東陳氏의 東來祖가 되었다.


188. 梁山陳氏. 臨陂陳氏

     1) 梁山陳氏: 시조 陳普材. 元나라말 漢帝로 자칭하였던 陳友諒의 아버지이며 조선조 태종 때 順德候에 봉해진 陳理의 조부로 고려조에 丞相에 贈職 되었다고 한다. 그 뒤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梁山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 왔다.

     2) 臨陂陳氏: 시조 陳理. 중국 元나라 때 梁山사람으로 세칭 陳王으로 불렀다. 梁山陳氏와 같은 계통을 이루며 그 후손들이 남원과 청양에 세거하였다 한다.


189. 陳     氏

      시조는 陳寵厚. 고려 예종조에 上將軍 겸 神號衛 大將軍이 되었고 賊臣 李資謙을 토평한 공으로 驪陽君에 봉해졌다.  陳寵厚의 선대는 본래 중국 사람으로 北宋말엽 右尹벼슬지내던 福州사람 진수(陳  )가 遼金의 난을 피해 가족을데리고 배를 타고 고려에 건너와서 지금의 충남 홍성군 장곡면인 驪陽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廣東陳氏. 梁山陳氏. 臨陂陳氏 등 선계가 다른 진씨를 제외하고 三陟. 江陵. 羅州. 新光陳氏 등은 모두가 다 陳寵厚의 후손이다.


190. 豊基秦氏

     시조 秦弼明.  중국 吳州 출신으로 唐나라 고종조에 大司馬 大將軍이었다. 신라의 3국통일을 돕기위해 파견된 蘇定方의 幕將으로 참가, 浿州에 눌러 살게됨으로써 우리나라 秦氏의 시조가 되었다. 秦弼明의 선계는 중국 황제의 후손으로 당나라에서 僕射公을지낸 秦叔寶와 靑州侯 泰昌이 모두 그의 선조가 된다고 한다. 南原秦氏. 大元秦氏. 晋州秦氏는 모두 豊基秦氏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


191. 昌    氏-미상

      昌씨는 본래 중국 성씨로 黃帝의 아들 昌慧의 후손으로 전해오나, 우리나라에는 1930년 國稅調査 때 처음으로 나타났다.


192. 倉    氏-미상

     ‘조선 씨족통보’에 보면 倉씨는 중국 太原에서 계출된 성씨이다. 倉氏도 1930년 國稅調査 때 등장한 성씨이다. 문헌이 실전되어 상고 할 수 없다.


193. 光州蔡氏-미상

시조는 蔡順禧. 고려조에서 平章事를 지냈다. 일부에 알려지기로는 그의 선계는 중국 高辛氏의 아들 契의 후손으로 箕子와 함께 우리나라에 온 蔡琳이라고 한다.


194. 平康蔡氏-미상

     시조는 蔡松年, 고려 고종� 崔忠獻 집권시 발탁돼 門下侍郞平章事에 올랐다.

     蔡씨의 원뿌리는 중국 春秋戰國時代 蔡國에 봉함을 받은 周文王의 일곱째 아들 蔡淑度다. 후손 蔡元光이 신라 奈勿王때 신라에 와 내물왕의 부마가 되고 우리나라 蔡氏의 鼻祖가 되었다고 전한다.

      仁川蔡氏도 동조동원이나 고려 의종 24년 (1170년) 鄭仲夫의 亂 때 문신들이 대량 학살당하고 문헌들이 흩어져 平康蔡氏와의 관계를 확인할 길이 없다고 한다.


195. 潁陽千氏

      중시조 千萬里. 중국 明나라 사람으로 武科에 壯元하여 太淸殿 守衛使 겸 總督五軍  師를 역임하고, 선조 25년 壬辰倭亂 때 領糧使 겸 總督將으로 두 아들과 함께 왔다. 千萬里는 壬辰倭亂과 丁酉再亂 때 평양, 직산, 동래, 울산 등지에서 전공을 크게 세우고 귀화 하였다. 조정에서는 그 공을 인정 하며 花山君에 봉하였다.

     潁陽千氏의 시조는 千嚴으로 명나라 洪武연간에 都摠將에 오르고 版圖丞相을 지냈다.관향인 穎陽은 중국의 지명이며 우리나라 千氏는 모두 千萬里의 후손이다.

196. 濟州肖氏-미상

     시조는 肖古道. 문헌이 없어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다만 肖씨는 元나라에서 귀화한 성씨로 제주도에 정착, 본관으로 삼아 世系를 이어 왔다. 원래는 ‘趙’씨였으나 ‘走’를 떼고 ‘肖’로 改姓하였다고 한다.


197. 巴陵 楚氏

     시조는 楚海昌. 중국 明나라 사람으로 翰林學士로 있다가 明이 망하자 淸나라의 신하가 될 것을 거부하고 우리나라에 망명 했다. 경북 星山에 터를 잡고 聖山伯에 정해졌다. 관향인 巴陵은 중국의 지명으로, 당시 岳州의 한 縣의 이름이다.


198. 楊州崔氏-미상

     시조는 崔億. 고려 공민왕조의 인물로 문과에 급제하여 戶部尙書 에 올랐으며, 학행이 뛰어나 師父로 천거 되었다. 공민왕 2년에 楊州君에 훈봉 되었다. 楊洲崔氏의 上系는 18명의 학자를 唐에서 파견, 그로 인해 중국의 사대부가 많이 와 살았는데, 그중에 淸河崔氏가 있었고, 楊洲崔氏가 淸河에서 나왔다는 말도 있지만 확인할 수 없다고 楊洲崔氏 世譜에 적혀있다.

199. 忠州崔氏

시조는 崔承. 唐나라 사람으로 押新羅渤海兩蕃等使를 거쳐 博陵郡開國侯로 있을 때 唐 昭宗의 명령에 따라 진성여왕 3년 元宗 京奴等의 叛賊을 소탕하기 위해 上將軍으로 왔다. 반란을 평정한 공으로 銀靑光祿大夫에 特除되었고 蘂城(忠州 옛 이름)에 눌러 살게 되어 忠州崔氏의 시조가 되었다.


200. 秋   氏-미상   

시조는 추엽(秋饁). 중국 宋나라 고종 때 사람으로 문과에 올라 門下侍中에 이르렀고 고려 인종 때 우리나라에 건너와 咸興 蓮花島에 정착함으로써 秋氏의 시조가 되었다. 수십 개의 관향으로 분적되어 있으나 크게는 秋溪, 咸興, 全州 등으로 나뉘어 진다.

1) 咸興秋氏 : 시조 秋饁가 처음 정착한 지명이란 이유에서 연유한다.

2) 秋溪秋氏 : 秋饁의 손자 秋適이 고려 고종 때 뛰어난 학자라 그의 본관을 秋溪라 한데 있다.

3) 全州秋氏 : 秋饁의 10세손 秋水鏡의 壬辰倭亂때 명의 副將이 되어 큰 전공을 세운 뒤 전주에 살아 죽은 뒤 完山府院君에 봉해진데 연유한다.

  

201. 光山(光州)卓氏-미상

시조는 卓之葉. 고려 선종조 翰林學士를거쳐 太師가 되었고 光山君에 봉해졌다. 선대는 중국 한나라 布德侯로부터 시작�는데, 중세에 東國사람이 되어 고려 선종조에 시조 學圃公이 光州에 瑞石亭을 쌓고 道를 講하고 인륜을 밝임으로써 宗儒로 추대되었다고 한다.


202. 永順太氏-미상

     중시조 太金就. 渤海國 창업주 大祚榮의 遠孫으로서, 고려 고종조의 金郊에서 몽고군을 격파하는데 공을세워 大將軍에 오르고 永順君에 봉해졌다. 후손들이 永順(지금의 상주)를 관향으로 삼고 그를 중시조로 하여 계대하고 있다. 渤海가 망한 후 세자인 大光顯과 발해유민 數萬이 고려에 옮겨왔다. 고려 태조는 이들을 후하게 대접하고 광현세자에게 太씨를 賜姓, ‘大氏’가 ‘太氏’로 바뀌었다고 한다. 永順太氏는 大祚榮의 아버지 震國公 大仲象을 시조로 하고 있다.


203. 陜磎太氏-미상

     중시조 太集成. 渤海의 震國公 大仲象의 후손인 太和鈞의 8세손이다. 고려 고종조에 御使大夫 大將軍에 올라 西北面兵馬使가 되어 몽고군을 격파 했다. 그 공으로 陜磎(지금의 沃川)君에 봉해져 후손들이 그를 중시조로, 관향을 陜磎로 하고 있다. 震國公 大仲象을 시조로 하고 있다. 陜磎太氏에서 太孟禮를 중시조로 하는 南原太氏가 분적되었다.


204. 龍岡彭氏

     시조는 팽적(彭逖). 중국 金陵人으로 고려 충정왕 3년 內閣學士가 되어 魯國公主를 호종하여 동래하였다고 한다. 그가 龍岡伯에 봉해지자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龍岡을 관향으로 삼았다.


205. 浙江彭氏

     시조는 彭友德. 중국 浙江省 사람으로 조선조 선조 30년 丁酉再亂이 일어났을 때, 中軍副摠兵署가 되어 아들 彭信古와 함께 동래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彭信古가 명나라 의종의 殉社之伏이 되었으므로 明나라가 망하자 그의 아들 彭富山이 우리나라로 귀화하게 되었다. 후손들이 原鄕인 중국의 浙江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 왔다.


206. 浙江片氏

     시조는 편갈송(片碣頌). 그의 선대는 唐나라 宗室이며, 南宋의 儒賢인 문청공 이동(李侗)의 9세손 李址의 玄孫이다. 明나라 신종조에 漁陽摠節使가 되어 壬辰倭亂 때는 遊擊將, 丁酉再亂 때는 提督中將으로 우리나라에 와 큰 공을 세웠다. 전란이 끝난 뒤, 간신 丁應泰의 무고로 인해 돌아가지 못하고 경주 金鰲山에 들어가 은거 하였다.


207. 忠州平氏-미상

    시조 平友聖. 조선조 선조 때 사람으로, 그의 묘가 인천시 남구 서창동 앞산에 있다. 고려조 태조 14년 平喚이 康德鎭頭를 지냈다고 전하는데 지금의 平氏와 어떤 관계인지 알 수 없다. 平氏는 원래 중국 성씨로 漢나라 成帝 때 사람 平堂이 食邑名 平陵을 姓으로 삼았다고 하는데, 언제 우리나라에 들어 왔는지 알 수 없다.


208. 包    氏 -미상

     包氏는 중국에서 귀화한 성씨로 豊德. 順天 등 2본이 있다. ‘韓國姓氏統譜’에 의하면 “周나라 申伯의 후예로 ‘申包胥’가 있었는데 그의 후손들이 이름으로 姓을 삼았다”고 했다. 우리나라 포씨는 고증할 문헌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


209. 新昌表氏

     시조 표대박(表大圤). 고려 광조 11년 중국에서 귀화 했다. 그는 당시 後周의 吏部尙書로 宋에의해 나라가 망하자 절의를 지켜 ....... 皇甫 등 여덟 성씨를 인솔해 고려로 망명, 귀화했다.  表氏는 문헌에는 37본이나 나타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新昌 단일본인데, 新昌은 충남 아산시에 있는 지명이다.


210. 臨朐馮氏

시조는 馮三仕. 명의 進士, 兵部侍郞을 지낸 중국 山東省 靑州府 臨朐縣 출신이다. 숭정 연간에 淸의 침입으로 포로가 되어 沈陽에 있던 중 丙子胡亂으로 인질이 되어 그곳에 가 있던 鳳林大君이 1645년 귀국할 때 陪從하여온 9이사 중 한사람이다. 9義士는 모두 귀화하였고 후손들은 선조의 출신지를 관향으로 삼았다.


211. 槐山皮氏-미상

시조는 皮慶廷. 중국 元나라 사람으로 처음 이름은 皮起光이다. 元나라 순제때 벼슬길에 올라 金紫光祿大夫 神慶衛大將이 되어 南邊을 정벌하였으나 전세가 불리, 戰功을 세우지 못하자 순제의 진노를 사게 되어 화를 피해 가족을 데리고 우리나라에 망명해왔다. 공민왕은 그를 우대, 槐山君에 특배하게 됨으로써 槐山을 관향으로 삼았다.


212. 洪川.丹陽皮氏-

皮氏는 周나라때 鄕士인 번중피(樊仲皮)의 ‘皮’자를 따서 만든 성씨라고 전해온다.

1) 洪川皮氏 : 시조 皮謂宗. 원래 宋나라의 金吾衛上將인데 고려조 정종 때 按廉使로 왔다가 풍물에 정이 들어 귀화, 兵部侍郞을 지내고 左司議大夫에 追贈되었다. 그의 후손 皮寅善은 政堂文學左僕射를 역임하였는데 그가 洪川君에 봉해지자 후손들이 洪川을 본관으로 삼았다.

2) 丹陽皮氏 : 시조 皮寅古. 皮謂宗의 후손으로 고려조에 大相. 平章事를 지냈는데 丹山君에 봉해짐으로 丹山(丹陽)으로 관적하게 되었다.


213. 達城夏氏

시조는 夏欽. 중국 宋나라의 大都督으로 고려 인종 때 귀화하여 達城(지금의 大邱)에 정착함으로써 達成夏氏의 시조가 되었다. 그의 아들 夏濬이 胡兵을 무찌른 공을 세워 達城君에 봉해진 데에 연유한다.


214. 谷山韓氏

시조는 韓銳. 고려 희종조에 金紫光祿大夫政堂文學平章事 門下侍中에 이르고 谷山府院 君에 봉해졌다. 그가 중국 南宋 영종조의 丞相 韓奎哲의 孫으로써 兵部尙書로 있다가 고려 희종 2년, 8학사의 한분으로 우리나라에 온 것이 谷山韓氏의 시조 유래가 된다. 忠州韓氏는 谷山韓氏에서 분적한 성씨이다.


215. 淸州韓氏-미상

중시조는 韓蘭. 고려 태조때 3한통합에 공을세워 三中大匡 門下太尉, 開國壁上功臣에 서훈되었다. 고려 태조 11년 王建이 후백제 甄萱을 정벌기 위해 淸州에 당도하자 군량을 풀어 구원했고 일족을 거느리고 참전했다. 그는 箕子의 遠孫으로, 準王이 衛滿에게 쫓겨 마한을 세우고 스스로 韓王이라 한것과, 위만에게 억류당한 그의 가족이 한씨라 하였다는 것으로 미루어 준왕 이전부터 한씨성을 썼다고 추측할 수 있다. 嘉州. 錦山. 沔川. 扶安. 安邊. 楊州. 平山. 漢陽. 鴻山韓氏는 모두 청주한씨에서 분적되었다.


216. 漢    氏-미상

한씨는 원래 중국 성인데 언제 우리나라에 들어왔는지 확실히 알 수 없다. 다만 1930년 국세조사 때 처음으로 발견 되었고 본관은 潭陽. 沃川. 忠州가 있는데 시조나 본관의 유래 등은 알 수 없다.


217. 江陵. 楊根咸氏-미상

시조는 咸規.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삼한통합에 공을 세워 翊贊 開國功臣에 책록되었으며 銀靑光祿大夫大尉 廣評侍郞平章事에 올랐다. 咸氏는 그 선계를 중국 漢나라때 大將軍으로 우리나라에 와 용문산을 중심으로 적을 토평, 城을 쌓고 부족국가를 세운 咸王을 원조로 한다. 그 뒤 金紫光祿大夫에 오른 咸赫을 鼻祖로, 21세인 咸規를 시조로 하여 다시 起世하여 계대를 잇고 있다.

218. 金海海氏

시조는 海瑞必. 중국 明 太祖때 吏部尙書를 지냈다. 明 태조의 명을 받아 大都督으로 우리나라에 온 뒤 공을 세워 조선왕조 태조 李成桂로부터 金海君에 봉해져 자손들이 관향을 삼았다고 한다.

219. 晋州邢氏

시조는 형옹(邢顒). 중국 唐나라 사람으로 고구려 영류왕 17년에 8학사의 한분으로 우리나라에 와 문학과 유교의 홍보에 공을 세우고 三韓壁上功臣 三重大匡輔國에 이르렀다. 충선공 刑公美가 征倭 都元帥로 왜군을 격파, 일등공신이 되고 晋陽君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그 곳을 관향으로 삼았다.


220. 全州扈氏

시조는 扈浚. 중국 明나라 사람으로 壬辰倭亂때 李如松의 副將으로 우리나라에 와 많은 전공을 세운 뒤 귀화하여 全州에 터를 잡고 세거함으로서 全州를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221. 巴陵. 加平胡氏

시조는 胡克已. 중국 建寧사람으로 明나라 순정조에 문과에 올라 直閣 翰林學士로 都御使大夫가 되었다. 인조 22년 明나라 황제의 명을 받아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온 뒤, 明나라가 淸에게 망하자, 귀화하여 경기도 가평에서 살다가 咸北 北靑으로 옮겨 여생을 살았다. 

1) 巴陵胡氏 : 6세 胡世翼의 큰 아들 胡叔의 후손들은 중국의 巴陵을 관향으로 삼아 巴陵胡氏가 되었다.

2) 加平胡氏 : 胡世翼의 둘째 아들 胡澄과 셋째 아들 胡濬의 후손은 加平을 관향으로 삼아 加平胡氏가 되었다.


222. 南陽洪氏-唐洪系

도시조 洪天河. 고구려 영류왕 22년 唐 太宗의 명령으로 온 8學士 중 한사람으로 고구려에 와 禮道와 儒學에 힘썼다. 그는 唐 태자 李承乾의 亂을 피해 요동에 은거하다가, 唐 太祖의 명령으로 銀樹浦에 도착하자 왕은 예로 맞고 그 곳을 唐城(지금의 南陽)으로 개명하고 관향을 삼게 하였다고 한다. 신문왕은 그를 太子太師에 책봉하고, 신라 의 5大王으로부터 스승으로 섬김을 받았다고 한다. 우리나라 洪氏는 대부분 洪天河의 후손이다. - 토홍계 남양홍씨도 있다.


223. 晋陽化氏

시조는 化明臣. 중국 明나라 사람으로 조선조 중엽 丁酉再亂때 한국에 와 귀화했다. 瑯琊사람인 그는 明나라 중엽 吏部尙書를 지낸 化光新으로 본성이 花氏였다고 한다. 후손들에게 전해지는 花氏의 세계는 明朝 개국공신인 花雲龍에서부터 비롯된다. 


224. 黃    氏

우리나라의 黃氏는 杭州黃氏를 제외하고 平海. 長水. 昌原의 三大本 외에 尙州. 紆州(전주의 속현). 懷德. 德山. 齊安등 10여本이 있으나 모두 한 할아버지의 자손으로 알려져 있다. 黃氏 도시조는 중국 後漢의 유신으로 신라에 터를잡은 黃洛으로 전해진다.  그는 신라 유리왕 5년(서기 28년) 交趾國(지금의 越南)의 사신으로 가던 중 풍랑을 만나 표류, 경북 울진군 평해에 상륙했다고 한다. 


225. 杭州黃氏

시조는 黃功. 항주에서 指揮使 黃賓의 아들로 태어나 進士에 합격 中都留守에 이르렀다. 崇禎 17년(인조 22년) 淸軍에게 포로가 되어 沈陽舘에 執留중 丙子胡亂의 결과로 그 곳에 볼모로 와 있던 鳳林大君을 陪從하여 9義士중 한분으로 우리나라에 왔다. 遠祖는 明의 宣撫使를 지낸 黃甲이며, 후손들은 黃功의 출신지를 貫鄕으로 삼아 杭州黃氏라 하였다.


226. 永川皇甫氏-미상

    시조는 皇甫能長, 고려 태조 때에 金剛城將軍으로 통일에 공을 세우고 永川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후계가 실전되어 고려 말 목사를 지낸 皇甫安을 起世祖로 하여 世系를 잇고 있다. 能長의 선조가 신라 말 唐나라에서 귀화해 온 씨족이라고 하나 확실한 근거가 없다. 그러나 皇甫라는 姓이 우리나라 토착의 성이 아니라 중국에서 歸化했거나 流入된 성씨인 것은 분명하다. 영천황보씨에서 黃州皇甫氏가 분적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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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7. 墨    氏

    묵씨는 주나라 무왕(武王) 때 사람인 백이숙제(伯夷숙 齊)의 후손이라 전한다. 문헌에 전해지는 본관으로는 명나라 때의 묵사(墨泗)를 시조로 하는 광령 (廣寧:중국량주지방) 묵씨(墨氏)와 요동묵씨(遼東墨氏)가 있다.

    광령묵씨(廣寧墨氏)는 중국 양주(梁州) 사람인 묵사(墨泗)가 명(明)나라에서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내다가 화(禍)를 입고 우리나라에 건너와 정착세거 (定着世居)한 것이 시초(始初)가 된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묵 사(墨泗)를 시조(始祖)로 하고 선조의 원향지(原鄕地)인 광령(廣寧)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228. 全州連氏-미상

    시조는 連珠, 고려태조 때 2등공신에 책록됨. 300여 년 전 중국에서 귀화했다 함.


229. 遼陽慈氏

    시조는 慈好祥. 형주현 동주사람으로 1557년 영군부장으로 몽고 정벌 시 순 절하였으며 그 아들 홍선이 요양으로 이거했다. 홍선의 아들 4형제가 명 신종 때 전란을 피해 동래하여 길주 남쪽 설봉산 밑에 거주하기시작 하였다.


230. 晉州 姜氏

    시조는 강이식(姜以式),  고구려 영양왕 9년 병마도원수로 5만 군사를 이끌고 요서지방에 출정해 공을 세우고, 뒤이어 수문제의 30만 대군을 크게 무찔렀다.

    강씨는 염제의 후손으로 중국역사상 유명한 인물로는 강태공이 있다. 시조 강이식은 고구려왕 때 동래하여 우리나라에 왔다고 한다.


231. 奉化琴氏-미상

    시조는 고려 초의 삼한공신(三韓功臣)인 태사(太師) 금용식(琴容式)으로 일찍이 기자(箕子)와 함께 우리나라에 온 금응(琴應)의 후손이라고 한다. 그러나  금응으로부터 용식까지의 세계를 상고할 수 없고, 또 금용식으로부터 6세 내지 8세의 세계가 실전되어 금의(琴儀: 초명 克儀, 자 節之, 시호 英烈)를 1세조로 하고 있다. 금의는 금씨 성을 쓰는 인물 중 우리나라 역사와 문헌에 등장하

는 최초의 인물로 고려 명종. 신종. 강종. 고종 4조를 섬기며 수태보(守太保). 문하시랑(門下侍郞). 동중서문하시랑평장사(同中書門下侍郞平章事).  판이부사(判吏部事)로 벽상공신(壁上功臣)에 오르고 김포(金浦)로 적(籍)을 받은 당대의 명신이다.


232. 載寧米氏-미상

     미씨(米氏)는 중국(中國) 경조(京兆:지금의 섬서성 관중도 장안현에 속한 지명)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이며, 문헌(文獻)에서 전해지는 본관(本貫)으로는 재령(載寧)을 비롯하여 송림(松林:경기도 장단지방). 유성(儒城). 방산(方山:강원도 양구지방)이 있다.

    우리나라 미씨는 기자(箕子)가 동래(東來)할 때 복술가(卜術家)인 미씨를 대동(帶同)한 것이 시초가 된다고 전하는 문헌이 있으며, 일설(一說)에는 1771년(영조 47)에 창씨(創氏)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상계(上系)를 고증(考證)할 문헌이 없고 보첩(譜牒)이 전하지 않아 정확히 상고(詳考)할 수 없다.


233. 대구빈씨(大邱彬氏)

     빈씨(彬氏)는 중국(中國) 성씨(姓氏)로, 청(淸)나라 덕종(德宗 : 1875~1908) 때 몽고(蒙古) 출신으로 원외랑(員外郞)을 지낸 빈 문(彬 文)이 조선(朝鮮) 고종조(高宗朝)에 우리나라에 건너와 대구(大邱)에 정착(定着)한 것이 시초 (始初)가 되며, 전해지는 본관(本貫)은 대구(大邱)와 담양(潭陽) 2본(本)이다. 


234. 목천상씨(木川尙氏)-미상

    상씨(尙氏)는 본래 중국(中國) 상당(上黨 : 산서성 기령도 노성현)에서 계출 (系出)된 성씨(姓氏)로 당(唐)나라 덕종(德宗) 때 병마사(兵馬使)를 지낸 상가고(尙可孤)의 후예(後裔)로 전한다. 우리나라 상씨(尙氏)의 시조(始祖)는 고려 초에 목천 호장(木川戶長)을 지낸 상국진(尙國珍)이다.


235. 순   씨(筍氏)-미상

    순씨(筍氏)는 중국(中國) 하내(河內 : 하남성 필양현 신향의 한나라 때 지명) 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서 주(州)나라 문왕(文王)의 아들이 순후( 侯)에 봉해지자 후손들이 순씨(筍氏)로 하였다고 한다.

    순씨의 본관(本貫)은 홍산(鴻山)을 비롯하여 임천(林川)․창원(昌原)․연곡(連谷 :강릉지방) 등 4본이 있는 것으로「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전 해지며 우리나라에 동래(東來)한 연원(淵源)에 대해서는 미상(未詳)하다.


240. 단양우씨(丹陽禹氏)-미상

    우씨(禹氏)는 중국(中國) 계통(系統)으로 하(夏)나라 우왕(禹王)의 후예(後裔)라 전한다. 그러나 문헌(文獻)의 실전(失傳)으로 선계(先系)는 상고(詳考)할 수 없다.

    우리나라 우씨(禹氏)의 연원(淵原)은 우 현(禹 玄)이 고려(高麗) 초 중국(中國)에서 건너와 단양(丹陽)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하면서 부터이다. 현(玄)은  정조호장(正朝戶長)을 지냈고,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에 추증(追贈)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