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나는 조용필 이다

[노래사연] 조용필의 노래에 맺힌 情과 恨

바래미나 2007. 9. 3. 02:53
           [노래사연] 조용필의 노래에 맺힌 情과 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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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용필의 노래에 맺힌 情과 恨 ]
  
'돌아와요 부산항' 을 들으면서 나는 나도 모르게 전율을 느꼈다.
처음 듣는 노래가 그렇게 가슴에 와닿는 경우는 드물었다 노랫말은 세련되지 못했지만
내 가슴을 휘어잡는 것은 그의 가창력이었다.
그가 토해내는 노래의 숨결에는 우리만이 갖는 고유한 민족적 정서인
'정(情)'과 '한(恨)' 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정이란,
바로 휴머니즘이며 인간과 인간,
나와 이웃끼리 느끼는 체온 같은 것을 말한다.
아버지 형제가 나은 아이들이 사촌지간이므로 아주 가까운 친척을 사촌 이라 하지만
우리는 바로 이웃에사는 사람을 언제나 사촌으로 생각하고 지낼 만큼 인정이 두텁다.
이것이 '정'이다.
  
여기서 '한' 이라는 것은 원한(怨恨)을 말하는 게 아니다.
원한은 피해의식이며 복수심이며 증오심이 깔려 있는 원망의 개념이지만,
  우리가 말하는 한이란 원한의 감정이 배제된 순수한 감정이라 볼수 있다.
원한을 바탕에 깔고 있지만 '한' 만 있고 '원(怨)' 은 없는 상태를 말함이다.
  
한이란 곧 '원(願)' 을 담고 있는 개념이다.
원망이 아니라 바람이다.
굶주리며산 사람은 음식에 포원을 지었다고 말을 한다 원은 곧 포원의 뜻이다.
그러니까 한이란 부정적인 뜻보다는 긍정적인 뜻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검은색이 모여지면 흰색이 된다.
탈색이 되는 것이다.
불순한 물이 여과되면 맑은 물이 된다.
그것들이 증류되면 더 깨끗한 이슬 방울이 된다.
우리의 한은 그렇게 증류된 물이다.
  
민족사적으로 볼 때 봉건독재 혹은 외국의 침략 등으로
서민들은 짓밟히고 가난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원한이 많아 보이지만
그 원한은 곧 또 하나의 특성인 해학이란 낙관적 유머속에 용해되어
원망의 독소를 탈색시킨 것이다.
그것은 체념이 아니다.
  
따라서 한은 맺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푸는것이다.
강물에 사람이 빠져 죽어 넋을 건질 때는 하얀 천을 강물속에 푼다.
사자(死者)의 맺힌 원한을 풀어주기 위해서이다.
무당들은 사자가 평안히 저승에 갈 수 있도록 '씻김굿'을 한다.
그의 업보와 원한을 씻기기 위해 굿을하는 것이며 그때도 하얀천을 이승과 저승에 연결시키고 굿을 한다.
  
얘기가 옆길로 샌 듯 하지만 조용필의 노래 속에는 바로 그런 정과 한이 시리게스며 있었다.
그때 나는 다섯 장의 판을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보다는 여기 저기 술 마시러
자주 가는 카페 같은 곳에 나누어주는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며칠마다 한 번씩 들르면 주인은 그 노래를 들려주고 있었는데
손님들의 반응이 아주 좋다는 것이었다.
'돌아와요 부산항'은 때마침 일본 조총련계 모국방문 시기까지 겹쳐 빅 히트를 하게 되었다.
  

                            [ 조용필 나름대로의 자각 ]
  
나는 그 소설에서 '내 것' '우리 것' 이 무엇인지 찾아내고 싶었다
서구적이 아닌 우리 식의 소설발상, 그리고 소설양식이 뭔지 시험해 보았다.
사라져가는 우리말을 찾아내고 판소리 사설을 모델로 하여
민요조 문장을 구사하고 장을 나누는 데도 한 마당 두 마당으로 나누었다.
  
그 작품을 읽고 조용필은 나름대로 '내 것' '우리 것' 이 뭔지 깊이 알아야겠다는
자각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특히 대중음악에서의 우리 음악, 우리 노래가 무엇인지 아직도 탐색을 계속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저는 이른바 뽕짝이라고 말하는 트로트 가요가 그래도 우리 대중가요의 원류이고
그것이 바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깊이 파고들며 공부를 하고보니 트로트야말로 국적이 없는 가요라는 걸 알았어요.
굳이 따지자면 일본 가요이지요
우리민요는 거의 4분의 4박자입니다 트로트는 4분의 2박자입니다.
그 리듬은 일본 엔카에서 나온 것입니다.
물론 엔카 역시 일본 고유그이 리듬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들의 전통가요와는 전혀 다르니까요.
아마 명치유신이후 서양에서 들어온 리듬일 거예요.
트로트란 말 자체가 불어니까요.
우리도 그 엔카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보아야지요"
  
그는 우리것을 찾기 위해 경기민요 서도민요 남도민요 그리고 판소리 등이 담긴
레코드를 싸들고 산사에 틀어 박힌채 따라 부르며 심취하여 공부를 했다고 한다
  
"정말 어려웠어요.
처음에는 이질감을 느꼈지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는 서양음악의 음계에 따라 음악을 배웠기 때문이었어요.
하지만 우리 음악은 음계가 달랐지요.
그러니까 생소하지요"
  
옳은 말이었다. 서양음악은 도레미파솔라시도라는 7음계로 구성이 되어있다.
그 중에서도 음(音)을 최초로 악보라는 약속된 부호로 표시한 사람은
그리스시대의 기하학자 유크리트였다.
음의 높낮이와 감정을 악보속에 정리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음악은 7음계가 아닌 5음계로 구성이 되어 있다.
  
            
                            [ 기지촌에서 이태원으로 진출 ]
  
그이후 그는 끼니를 굶으며 떠돌이 무명 악사생활을 견뎌내야 했고
좌절과 고통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파주, 문산 등 미군 기지촌을 돌며 악단을 찾아 기타를 연주했지만
실력이 모자란다는 구박만 받고 쫓겨난다.
어느날 그의 둘째형이 묻고 물어서 그를 데려가려고 판잣집 자취방에 나타났지만
그 고생을 다 하면서도 형을 따돌리고 다시 도망을 쳐 악사생활을 계속한다
그때 집으로 돌아갔으면 오늘의 조용필은 없었을 것이다.
  
거기서 좌절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다시 도망쳤고 꼭 성공하고야 말겠다는
  분발심이 불붙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그에게 위로를 준 것은, 술이었다고 한다.
  
"고등학교를 갓 나온 저로서 기타를 연주하며 무대에 선다는 것도 무리였겠지만
자신있게 연주할 수 있는 곡은 몇 곡 되지 않는데 20여 곡을 자유자재로 불러야
대접을 받는 상황이었으니 그 천대와 좌절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지요.
하루 한끼 혹은 두 끼 정도 먹으며 굶주리는 것은 그런대로 참을수 있었지만
실력이 없다고 무시당하는 것은 정말 참을 수 없었어요
 그때마다 비좁은 냉방에 돌아와 술을 마시며 마음을 달랬지만 술만 가지고는 안되더군요.
문제는 실력이었어요
실력으로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에 하루 한두 시간 자면서 열심히 공부했지요.
그때 쌓은 실력이 대단한 밑천이 되었어요.
급기야 실력을 인정받아 기지촌을 청산하고 서울 이태원으로 진출하게 되었으니까요 "
  
그로부터 그는 그룹 '파이브 핑거스' 혹은 '김 트리오'등의 그룹의 일원으로
기타 혹은 리드 싱어로 자기를 굳히게 되었고
한때는 그룹 경연대회에서 가수왕까지 되기도 했다.
이것이 70년대 전반이니 '돌아와요 부산항'이 히트되기 이전이다.
  
그러다 대마초로 다시 좌절을 했으니,
주량이 얼마나 늘었을까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이나 집념은 아주 대단하다
그는 나름대로 항상 앞으로를 생각하고 준비를 하면서 산다.
  
"모르겠어요 일상생활 혹은 돈,
여자에 대한 집념은 없는데도 음악에 대한 집념은 대단해서
내가 생각해도 집착력이 아주 대단해요
학교 다닐때는 공부하기 싫어서 시험 볼 때면 당일치기 시간 치기
초치기 하는 걸 예사로 알았지만 음악은 절대 당일치기를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적어도 일년동안의 계획은 세워놓아야 하고
그 계획에 맞춰 미리 준비를 해야 하거든요.
희한하지요.
팔자인 모양이에요."
  
그 계획이란 각종 콘서트 음반취입 등을 말한다
그는 금년이 가수생활 25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동안 작년까지 14집의 앨범을 냈고 1백 30여곡을 취입하여 30만장 이상 팔린
빅히트 곡만 30여 곡이 된다.
이것은 국내 가수로서는 신기록이라 할 만하다.
  
그런데 그 중에서 남의 곡을 받아 노래를 부른것은 몇 곡되지 않고 대부분이 자신이 작곡한 곡이다.
  
내가 놀라는 것은 바로 그의 음악에 대한 계획성과 준비성이다.
특히 대중 음악은 여자의 스커트 길이처럼 그 유행이 그때그때 변한다.
솔 풍의 노래가 나오더니 하드락이,
뉴 웨이브라는 댄싱음악이 유행하다가 요즘에는 랩이란 노래가 유행한다.
요즘은 가수가 창조하는 게 아니라 듣는 사람이 요구한다.
그래서 가수는 유행을 쫓아다니게 마련이다.
하지만 조용필은 그 유행을 상관하지 않는다.
  
자기만의 세계를 고집하며 1년후 혹은 2년 후
어떤 노래를 부르고 어떤 곡을 연주해야 지속적인 인정을 받을 수 있을까 그 준비를 하는 것이다.
나름대로 그는 한국가요는 무엇이며 무엇이 사랑을 받고
어떤 곡이 끝까지 남을수 있는지에 대해 확고한 자신의 신념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 "결혼을 생각하면 아찔하다" ]
  
그 같은 실력을 갖고있기 때문에 유행에 흔들리지 않고 자기영역을 고수하며
롱런을 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유행을 쫓지 않아서인지 그는 가수의 인기에도 그렇게 연연하지 않는다.
  
"형님은 활자로 된 책을 통하여 독자를 만나고 늘 정신적으로만 서로 교감을 하니까
작가는 표면에 나서지 않아도 신비감이 있잖습니까?
하지만 가수라는 직업은 알몸으로 공개되어 바로 팬들 속에 섞이게 되니
지겹고 피곤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이혼하고 나서 왜 결혼을 하지 않느냐 하시지요? 인기인이기 때문에 못
합니다.
평범한 여자와 친구도 되고 싶고 결혼도 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절차를 생각하면 끔찍해요 저런 여자라면 사귀어 보고 싶고 좋아서
사랑하게 되면 결혼 하고 싶다,
그런 마음이야 굴뚝같지요.
그래서 한두 번 자연스럽게 만날수도 있는데
그리 되면 언론이 가만있질 않습니다.
온갖 추측을 하며 뉴스의 초점을 만들지요.
  
내가 책임질수도 없는 입장인데 소문에 오르내리게 되면 여자만 피해를 입게 됩니다.
무서워서 그 여자 멋지다고 말도 못 꺼낼 입장입니다
지저분한 스캔들 기사는 그렇게 나는 겁니다.
그러니 여자 또는 결혼생각을 하면 아찔해지지요.
차라리 하지 않는게 편하다고 체념하고 말아요.
결혼을 하긴 해야 할 텐데 큰일이에요.
물론 중매가 들어오지요.
제 나이가 많으니까 처녀는 없고
대개가 재산이 많은 여자라거나 집안이 좋은 여자라거나 그런편입니다.
그건 더 두렵습니다
조용필이가 이혼하더니 돈에 팔려 재혼했다더라 그런말이 듣기 싫어 서지요.
돈보다 사랑 때문에 했다고 한들 믿겠어요"
  
그는 해금이 된 후 어디에서건 '돌아와요 부산항' 을 불러달라면 진저리를 치며 싫어한 때가 있다.
비록 언더그라운드에서일 망정 인기정상의 그룹 리더였고
손꼽을 정도의 명 기타리스트로 대접을 받고 있었는데
'부산항' 이 히트되는 바람에 대마초 사건에 말려들었던 것이다.
  
실은 대마초 사건이 나기 전에 이미 조사를 받고 벌금을 내고 풀려 나온 상태였는데
'부산항' 이 인기를 얻어 일약 인기가수로 떠오르는 바람에
다시 한 번 여론의 재판을 받아 홍역을 치렀던 것이다.
지금도 잊을수없는 것은 79년 아직 완전히 해금이 되지 않았는데,
대한극장에서 조용필 리사이틀을 하던 때의 기억이다.
  
  
                              [ "국민적 가수로 남고 싶다" ]
  
그러나 알고 보면 그런 집착력과 승부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여자와 돈에 관한한 속 빈 강정이다.
  
"형님도 알다시피,
여자가 무엇인지 어찌 해야 하는 건지 잘 알지 못해요.
일찍 가출해 음악에만 빠지다 보니 제대로 연애다운 연애 한 번 못해 봤어요.
그러다 지숙씨를 만난 거지요.
제 딴에 진심으로 사랑 했어요.
그런데도 이혼까지 가는 불행을 겪었어요.
지금도 가슴이 아파요 애정에 굶주려 있으면서도 그걸 표현하는 게 아주 서툰 모양입니다
주위에서는 여복이 없다고 하지만 다 내 책임인 것 같아요"
  
우리는 늘 한 주일이면 한두 번은 만나고 산다.
그런데 그를 만나면 늘 추워 보인다.
여자가 없어서일까.
아니면 아이들이 없어서일까.
물론 그말도 맞을 것이다.
  
재산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다른 어느 연예인 보다 수입이 많다.
수입이 많으면 재산으로 남아야 하는데 내가 알기로 모아놓은 재산은 별로 없어 보인다.
  
"낭비가 많은 것도 아니에요.
그런데도 모아지질 않아요.
돈에대한 욕심이 없어서 그런가 봅니다.
가난은 밑바닥까지 경험했어요.
돈이 없어도 두렵지 않을 거같아요.
그래서 욕심이 없나 봐요.
그저 쓸 만큼만 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
  
그러면서 그는 웃는다.
두마리 토끼를 잡으려 했더라면 둘 다 놓치고 말았을 것이 틀림없다.
돈과 음악 두 가지에 집착하지 않고 음악 하나에만 집착했기 때문에
오늘의 가수 조용필이 존재하는 것일 게다.
  
"전 다른 욕심 없습니다.
미국군가에 나오는 말이라지요?
노병은 죽지않고 다만 사라질 뿐이라고요.
저 사람 아직도 살아 있었구나.
왕년엔 잘 나갔는데..
그런 소리 듣는다면 얼마나 비참합니까?
50세까지는 현역으로 활동하구 싶어요.
그럴 계획과 준비를 해두었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죽지않고 사라져야지요.
욕심 같아서는 엘비스 프레슬리처럼 신화를 창조한 국민적 가수로 기억되고 싶어요"
  
우리 대중문화에 끼친 그의 영향은 대단하다고 볼 수 있다.
자기 개인은 팬들에 의해 희생되고 있지만,
그의 바람대로 조용필은 우리의 신화적인 가수로 남기를 나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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