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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호 - 두메산골[데뷔곡으로1964년이정당함](가요이야기 34 )

바래미나 2007. 9. 3. 01:59
배호 - 두메산골[데뷔곡으로1964년이정당함](가요이야기 34 )


최초 취입 음반(1963)


데뷔곡 취입 음반(1964)


본격 방송 음반(1966)


동일 시기에 취입 음반(1966)


투병 중 취입 음반(1966)

    *** 두메산골 *** 반야월 작사 김광빈 작곡 배호 노래 산을넘고 물을건너 고향 찾아서 너보고 찾아왔네 두메나 산골 도라지 꽃피는 그날 맹서를 걸고 떠났지 산딸기 물에흘러 떠나가도 두번다시 타향에 아니가련다 풀피리 불며불며 노래하면서 너와 살련다 혼을넘어 재를넘어 옛집을 찾아 물방아 찾아왔네 달뜨는 고향 새소리 정다운 그날 울면서 홀로 떠났지 구름은 흘러흘러 떠나가도 두번다시 타향에 아니 떠나리 수수밭 감자밭에 씨를 뿌리며 너와 살련다

    지금까지 배호님의 초창기 음반 취입에 대해서는 일부분에서 소문과 전설로만 전해져 오고 있었습니다.
    물론 본인이 생존해있질 않고, 친가의 유족 분들도 안 계시거나 투병 중이며, 또한 당시에 음반 취입을 시킨 외삼촌이신 김광빈 선생님이 계시지만 어렵게 최초 취입을 했다고만 전해 주시지 당시의 유명 연주인에다 많은 재산을 투자하여 음반사를 두 개(오스카, 아카데미)나 운영하면서 어려웠던 인력 관리와 많은 제자들의 성황으로 경황이 없을 정도의 바쁘셨던 선생님의 인기를 고려할 때 조카의 최초 내용등을 회상하질 못하시고 또한 연로하신 관계로 그 이상 자세한 내용들을 기억하시질 못해 정확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배호님이 인기가수가 되면서 각종 언론등에서 집중 취재를 했던 과정에 배호님의 초기 음반 취입 비화가 일부 전해져 왔습니다만 실제로 확인할 수 있는 음반이 발견되질 않아 전설로만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 유족이신 모친이 생존하셨거나 동생이신 배명신씨께서 건강하시다면 일부나마 증언이나 증거물이 남아있었을 수도 있었겠으나 모친의 어려운 삶 이후에 타계하셨고 동생의 투병으로 관련된 유품들이 온전히 보관되질 못했으며 또한 모친이 생존시 증언에 의하면 배호님 타계이후 찾아오신 팬 분들께 일부 음반과 자료들을 제공해 주셨다는 말씀에 따라 일부 귀중한 유품들이 팬들에게 전해지면서 유실되기도 했었습니다.

    지금까지 실존물로 확인되기는 배호님의 초창기 음반으로("돌아가는 삼각지"로 인기가수가 되기 이전) 두메산골, 굿바이, 사랑의 마술사, 차디찬 키스, 녹색의 장미, 그대 만이 등 6곡(톱힛트 레코드사 - 김광빈 작곡집 - 1964/5년경- 작사가이신 반야월 선생님의 증언도 일치) "황금의눈"(지구 레코드 - 김인배 작곡집 - 당초 1964년경 녹음을 했고 음반은 1966년 발표되었다고 알려졌었음) 음반이 서로 먼저라고 주장되었으나 지금까지 각종 자료와 증언들("황금의 눈" 영화 개봉일자 (1966년 7월 - 개봉하기 3년전부터 녹음했다기에는 무리가 있음), 음반 번호(LM 120132) - 문주란씨의 "동숙의 노래"가 LM120112 으로 1966년 발표), 목소리(본격 저음이 들어있고 또한 초기 목소리는 아님-1966년 이후로 투병시작), 인기가수가 된 1967년 보도기사에서 관계자들의 증언한 내용 - 1965년말 녹음/ 1966년 "황금의 눈"이발표 되었다는 내용), 김인배님의 최근 증언("자신을 만난 천지 나이트보다 먼저 천지 캬바레에서 김광빈씨과 연주했고 당시 노래도 몇 곡을 취입했다, 그러나 그때는 알려지지 않았고 "황금의 눈"을 시작으로 방송계에 본격적으로 알려졌다" (노래를 만든 시기가 겨울이라고 기억하시는데 1965년 겨울로 예상됨) - 여기서 방송계에 본격 데뷔된 이 곡이 한때 데뷔곡이라고도 알려졌었으며 이 과정에서 최초 취입곡이라고 잘못 알려진 것이 지금까지도 각종 언론등에서는 그대로 전해지고 있음) 을 참고 할 때 "두메 산골"등 6곡이나 담은 톱힛트 레코드사의 음반이 당시 장안의 천재 드러머로 알려진 그의 노래가 본격 소개된 데뷔곡 음반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그 이후 방송계에 많이 소개된 "황금의 눈"보다도 먼저 나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다음 항목에서 밝혀질 내용인 파라마운트 레코드사/오리엔트 레코드사에서 그보다 먼저 "굿바이"와 "사랑의 화살"이 그보다 1년전인 1963/4년에 발표되었으나 이 곡들은 먼저 취입은 했지만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음반으로 본격 데뷔 음반이라고는 보기 힘들고 최초 음반이라고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가수들의 첫 취입곡이 팬들에게 바로 알려지는 데뷔곡이 되기는 쉽지 않음)
    ** 여기서 몇 가지 의문점은 당시 천지 캬바레에서 근무하시던 양기환님의 증언으로는 천지 캬바레가 1962년 4월 개관하여 최초에는 다른 악단이 있었고 김광빈 악단은 1963년 말쯤부터 활동했다고 하시는데, 그렇다면 최초 취입이 1964년 경이라 생각되고, 또한 김광빈님의 기억으로는 자신이 천지 캬바레를 나와 황금마차와 한강로 캬바레에 있던 시절 배호님이 "배호와 그 악단" 을 했고 그때 톱힛트 레코드에 취입했다는 말씀과, 김광빈 악단보다는 늦게 천지 나이트에서 연주하신 김인배님이 자신과 같이 연주 할동을 같이 할 때(배호와 그악단 구성 이전)(취입할 때는 아프지 않았다고 함) "황금의 눈"을 취입했다는 증언이 있는데, 이 부분이 시기적으로 서로 일치하지 않는 부분으로 차후 재정리가 되어야 할 부분입니다. **

    그리고 이어서 그가
    투병중에 취입했던 음반사(뉴스타 레코드)에서 그의 목소리와 많이 차이가나는 힘든 목소리로 12곡을 취입했습니다.

    이제 최근(2002년 7월) 배호님의 첫 음반으로 확인된 귀중한 음반이 발견되었습니다.

    배호님의 열렬한 팬 이시자 그의 희귀음반을 많이 소장하고 계신 이재수님께서 얼마 전 새로운 음반을 찾으셨는데, 다음 자료에 소개되어있듯이 오리엔트 레코드사에서 출반 된 10인치 LP음반(김광빈 작곡집)입니다.
    이 음반에는 "굳바이"와 "사랑의 화살"등 2곡이 배호님의 어린 시절(21세) 애띤 목소리로 들어 있습니다.
    같은 음반에 배호씨의 데뷔곡인 "두메산골"이 김해광님의 목소리(남일해님 목소리와 비슷)로 같이 올라가 있습니다.
    이 자료를 접한 홈 운영진이 사실을 확인코져 당시의 관계자분들(음반사 대표, 같이 취입하신 가수분들, 작곡집을 직접 만드신 김광빈님-노래를 들려드리고 나자 서서히 기억을 하시고, 외숙모님도 "천지" 있을 때 한 것 같다고 회상하심)에게 확인한 결과 배호님의 최초 목소리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현재 찾아진 음반은 오리엔트 레코드사의 10인치 LP음반입니다만 당시 취입한 음반사 대표님의 말씀에 의하면 처음 취입은 파라마운트 레코드사에서 10인치 LP음반으로 취입하였고,히트되지 않자 그분과 가까운 친구지간이시고 당시에 문을 닫았지만 그때까지 잘 알려진 오리엔트 레코드 (실제 이 음반사는 1959년경 SP음반 시대로 작별을 고했던 음반사임)의 이름을 빌려(당시 이러한 음반들이 많이 있음) 같은 음원을 재발매 (이번에 찾아진 음반)했으며 이어서 배호님이 "돌아가는 삼각지"로 히트하자 1967년경에 파라마운트(미성) 레코드에서 기존의 음원을 다시 찾아 12인치 LP음반을 똑같은 음원으로 재발매 하였다고 합니다.

    당시 최초 음반에 대한 상황을 관계자분들의 증언을 모아 정리하면,

    1963년경 서울과 지방의 놀이꾼들이나 음악 관계자들에게 널리 알려진 김광수 악단과 동생이신 김광빈 악단이 장안의 화재 속에 동화 캬바레와 천지 캬바레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었습니다.
    당시 배호님은 이미 드럼을 배워 천지 캬바레의 김광빈 악단에서 드러머로 활동하고 있었고(실제 그는 17-18세때부터 노래를 시작했고, 외삼촌은 그가 나이들어 보이게 하기위해 안경과 모자를 씌워 주었음) 같은 악단에 외숙모인 안마미(피아노), 김광빈의 처남인 안건마, 트럼펫에 최상용, 바이올린에는 박상만(인천), 신상철(서울), 백해제(서울)등이 번갈아 가며 연주했고, 색서폰에 김익호 (파라마운트 레코드사장의 처남, 배호님과 같은 또래), 아코디언에는 김광빈 자신이 직접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이때쯤 배호님의 요청에의해 외삼촌인 김광빈님은 드디어 그에게 당시 유행하던 맘보풍의 "굿바이" 노래와(실제 "굿바이", "차디찬 키스"(후랑크백)등 나중에 배호님이 취입한 김광빈님 곡들은 50년대 만들어졌던 곡들로 김광빈님이 무대에서 자주 불렀던 곡들로, 김광빈님은 "당시 나도 노래를 많이 불렀지만 배호는 샹송과 세미 크라식등 하이 크라스한 노래들을 좋아했으며 잘 불렀습니다"고 전해 주심) 탱고풍의 "사랑의 화살"곡을 그에게 취입시킵니다. (이 곡은 당시 유행하던 외국 탱고곡인 이태리의 정원"곡과 비슷한 리듬으로 편곡되었음) 물론 같이 올라갈 다른 가수로는 자신의 악단에서 견습생으로 전속 가수처럼 노래를 했던 김해광님에게 완전한 트로트풍의 " 두메산골"을 주고 같은 음반에 올라갔는데, 이는 "두메산골"이 배호님보다 먼저 취입하게 된 계기가 됩니다.(여기서 "두메 산골"의 제목도 당초엔 다른 제목이었으나 김광빈님께서는 노래 가사중 "두메나 산골"이라는 말을따서 "두메 산골"이 낫겠다고 생각하여 바뀐 제목임) .
    취입한 음반사는 "파라마운트 레코드","오리엔트"로 당시 자신의 악단에서 색서폰을 연주한 김익호님의 매형인 이다향님(파라마운트 사장으로 노래도 취입함)의 음반사에 당시 음반 규격인 10인치 LP음반으로 만들었습니다.
    당시 드러머로 이름이 알려지고 있던 배호님(당시에는 배만금)에게 외삼촌은 "배호"라고 예명을 지어주고 음반 취입을 시켰으며 당시 음반은 김광빈 작곡집으로 모든 연주는 자신의 악단으로 직접 녹음 했습니다.(물론 음반 취입시는 무대에서 연주하시던 연주자분들 일부와 음반 취입을위한 고정 맴버들의 연주로 가수의 노래가 동시에 녹음 되었으며 그러한 고로 배호씨의 노래 음반에서 드럼 소리는 배호씨의 연주 소리가 아닌 당시 음반 녹음 전속 드러머이신 김종명님의 소리임) 또한 당시 남일해씨가 히트중 이었기에 비슷한 목소리의 김해광님을 같이 취입 시켰는데, 리듬 스타일이 완전히 다른 트로트풍의 "두메 산골"이 배호님과는 다르게 그에게 주어집니다.
    여기서 "두메 산골"곡도 처음에는 배호님에게 불러보라고 권했지만 배호님은 노래가 촌스럽다고 부르기를 거절하고 맘보와 탱고곡들만 택했다고 합니다.
    본 음반에 올라간 가수들은(라운, 이미나, 최정, 김해광) 모두 김광빈 악단 전속가수들로 짜여져 있습니다.

    결국 배호님의 첫 취입곡은 이렇게 멋있는(김광빈님의 증언으로는 하이 크라스 한 노래들)곡들인 맘보풍의 "굿바이"와 탱고풍의 "사랑의 화살"이 역사의 기록에 남게 되었고 본격 트로트를 부르기 이전에는 " 국경없는 (밤)거리-홍콩 66번지"등처럼 차원이 있는 노래들을 불렀습니다.

    이때 발표된 음반은 당시 개국한 동아방송의 음악 담당 PD에게 김광빈님은 가지고가 홍보하였으나 요즘 말로 PR비 부족으로 무명가수였던 배호씨에게 히트와는 거리가 멀었고 그는 연주 활동을 계속하여 1년뒤(1964/5년) 자신이 운영하고 있던 "배호와 그악단"으로 활동시 외삼촌의 악단과 함께 톱히트 레코드사에서 그의 많은 곡(6곡 - 기존 "굳바이"를 다시 부르고 최초 "두메 산골(트로트), 사랑의 마술사(탱고), 그대 만이(맘보), 차디찬 키스/녹색의 장미(스로락))들을 다시 내놓고, 당시 MBC 악단장으로 활동하시던 김광빈님의 노력으로 MBC 라디오방송(음악 담당 나규호님)에 부탁하여 처음으로 방송에 소개되기도 했으나 역시 홍보 부족등으로 큰 히트와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이 당시 배호씨는 MBC 초대 악단원으로 천지와 함께 오가며 악단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시에 배호님에게 "하이 크라스"한 곡들만 주어서 히트가 안되는 것 같고 트로트 풍의 노래들을 부른 가수들이 뜨고 있는 것 같아 다시금 "두메 산골"을 편곡하여 배호님에게도 취입 시켰다고 합니다. 당시 같이 취입 활동을 했던 가수로는 권혜경(산장의 여인)님이 있는데, "순정의 문을 두드릴 때" 라는곡을 김광빈님이 만들어 취입하고 방송사에서도 들려주었는데, 가수 자신과 방송사에서도 너무 어려워서 힘들다고 외면당하기도 했던 시절입니다.
    그는 히트에 관계없이 악단을 운영하며 연주와 노래를 계속했고, 이 후로 "황금의 눈"등 노래들이 취입되고(1965년말) 당시 방송계와 관계가 깊은 김인배, 하중희, 전우, 나규호님의 도움으로 방송에 본격적으로 소개되었고, 역시 김인배님의 추천으로 나규호님과 전우님등을 알게 된 그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음반인 "국경없는 (밤)거리-홍콩 66번지"곡을 신세기에서 KBS악단장 이셨던 김기웅님의 서부극에 가까운 리듬으로 색다르게 취입했으며 그후로는 역시 병상에서 뉴스타 음반이 취입됩니다(1966년 - 작곡가이신 나규호님의 증언으로는 1965년이라고 하심)
    이어서 그는 1966년부터 배상태님이 준비해온 "돌아가는 삼각지"를 1967년 3월에 취입하고 히트가 시작되어 인기가수로 본격 성장하게 됩니다.
    여기서 배호님의 초창기 앨범은 당시 인기로 봐서 많은 영세 업체들에게서 취입되었으나 업체의 영세성으로 빛을 발휘하지 못하고 뭍혀 있다가 그가 인기가수가 된 후로(1967년 이후) 다시 그때의 음원들을 음반사는 끄집어내어 음반을 다시 제작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이상 그동안 베일 속에 감춰져 있던 배호님의 초창기 음반에 관한 최근 자료들을 정리하여 드렸습니다.
    위에 올려진 내용 이외의 자세한 인터뷰 내용들은 차후 자료를 재 정리하여 올려 드리겠으며 본 내용들도 차후에 자료가 재 확인된 부분은 일부에 한해 재조정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이번 자료 정리를 위해 음반관련 내용을 제공해주신 이재수님께 감사를 드리며, 아울러 운영진의 장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시고 격려의 말씀과 함께 역사를 챙겨주어서 고맙다는 찬사를 전해주시며 당시 상황을 정확히 전달해주신 당시 관계자분들중 특히 이병주님(오리엔트 사장/작곡가 - 나중에 나온 오리엔트와는 다른 회사임), 이다향님(파라마운트 사장/작곡가/가수), 김인배님(작곡가/연주가), 김해광님(가수), 김광빈님(배호 외삼촌/작곡가/연주가/가수),김기웅님등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배호 공식 홈페이지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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