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2차세계대전기념관 제2차 세계대전을 생각하면 히틀러와 나치스, 유대인 학살 등의 단어가 떠오른다. 그리고 진주만 공습, 우리의 입장에서는 8월 15일의 광복도 생각하게 된다. 2차 대전은 세계 1차 대전이 끝나고 20년 만에 다시 일어난 사건이었다. 1차 대전이 끝나면서 파리평의회가 열리고, 베르사이유 조약이 탄생하여 독일이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만든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때문에 독일인의 불만은 높아지고, 가난에 허덕이며 희망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반면에 마르크스의 공산사상이 인기를 얻어서 노동쟁의가 계속되었으나 물가는 천정부지로 솟아올랐다. 그런데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총리에 임명되고, 독일국가사회주의노동당(나치스)이 중심으로 대두되었다. 다음 해 8월에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죽자 히틀러는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자신이 총서기로 취임했다. 그리고 5년 후인 1939년에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이 단순한 역사적 사실만을 보아도 우리는 커다란 의구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다. 다시 말하자면, 1차 대전의 전범이었던 독일은 엄청나게 가난했었는데, 단 5년 만에 최빈국에서 초강국으로 발전하여 세계를 뒤흔든 전쟁을 개시했다는 것이다. 어떻게 독일은 그렇게 짧은 시간에 가장 가난한 나라를 일으켜 세계를 장악할 뻔한 강국으로 만들었을까? 히틀러가 신이었는가? 당시의 일본은 또 어떠한가. 일본은 단순히 미국 땅을 점령하기 위해서 진주만을 공격했을까? 미국은 중립을 표명하다가 일본이 진주만을 습격하자 어쩔 수 없이 전쟁에 가담했다고 하는데 과연 그럴까? 자세히 알아보자. 미국 기업의 지원을 받은 나치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군대에는 미쓰이, 미쓰비시 두 기업이 전쟁 비용을 댔고, 독일은 화벤(interssen Gemeinschaft Faben)이라는 대기업이 자금을 대주었다. 그런데 의아한 것은 화벤은 미국 자본과 연결이 되어있다는 사실이다. 화벤이라는 화학회사는 막강한 자금력, 조직, 연구팀, 생산시설 등을 지원했는데 이 회사의 주인은 독일인이 아니라 뉴욕에 있는 'J. P. 모건' 등의 국제 금융가였다. 화벤은 2차대전 이후에 세 개의 회사로 나뉘었는데, 그 유명한 바이에르(Bayer), 헥스트(Hoechst), 바스프(BASF)가 그것이다. 이들은 제약과 화학에서 세계의 주도권을 갖고 있으며, 생명공학과 UFO 연구, 개발을 독점하고 있는 회사들이다. 이들은 1924년 미국의 은행가 '찰스 도드'의 이름으로 독일의 화벤에 8억 달러를 투자했고, 1928년에는 미국의 '헨리 포드'가 포드자동차회사의 독일 공장을 화벤과 병합했다. 다시 말하자면, 미국은 적국을 원조함으로써 힘을 키워준 다음에 다시 싸웠다는 말이다. 화벤은 1차 대전 때에도 염소가스를 개발했고, 2차 세계대전 때에는 유대인들을 학살했다는 '지클론 B' 가스를 생산한 기업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에 연합군의 공습이 그렇게 치열했는데도 이 회사의 시설은 거의 파손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폭격 대상에서 원래부터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왜 연합군의 폭격 제외 대상이 되었는가 독일은 1차 대전의 패인을 물자 부족으로 판단하여 2차 세계 대전 때에는 그에 대비를 하였다. 화벤 사에서는 석탄에서 휘발유를 추출하는 기술을 마침내 완성했고, 1927년 록펠러(미국의 석유부호, 프리메이슨)의 '스탠다드 오일' 사가 화벤과 합자하여 대용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것으로 전쟁을 치루기에 충분했고, 히틀러는 기름 걱정을 하지 않고, 전쟁에 임할 수가 있었다. 독일은 2차 대전에서 이 대용품으로 전체 휘발유 소비량의 75%를 충당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내노라하는 첩보원과 공작원들이 있던 연합국 측에서 그 사실을 몰랐을까? 공장의 위치를 몰라서 폭격을 못했을까? 그 치열했던 전쟁과 폭격 속에서 화벤 공장 시설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엽합군이 공격을 피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록펠러의 자산이었기 때문이다. 또, 스탠다드 오일 회사는 1939년 독일이 폴란드와 오스트리아를 침공했을 때 2천만 달러의 항공기용 휘발유를 공급해주었고, 독일의 탱크 제작사인 오펠 사는 제너럴 모터스의 계열사이다. 독일의 전쟁 준비를 미리 알았던 미국 2차 대전 발발 전인 1936년, 주독 미국 대사였던 '윌리엄 다스'는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에서 이렇게 말했다. "현재 독일에는 1백 개 이상의 미국계 회사들이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듀퐁 사는 화벤과 손을 잡고 무기 산업에 열중하고, 스탠다드 오일은 매년 50만 달러 상당의 휘발유 대용품을 생산하지만 그 이익금을 독일 밖으로 반출할 수 없는 실정입니다. 인터내셔널 하베스터사의 사장은 매년 무기를 33퍼센트 증산하지만 독일 밖으로는 아무것도 빼낼 수 없다고 나에게 말했습니다. 제네랄 모터스와 포드 사도 마찬가지인데, 아무것도 반출을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또, 제너럴 모터스가 대주주인 밴딕스 항공사와 다우케미칼, 아코아 등의 기업은 디젤엔진과 항공기 제작술, 스타터 엔진 등의 기술을 독일에 제휴했다. 그리고, 미국 국무성의 적극적인 협조로 스탠다드 오일사는 1938년 8월에 5백 톤의 테트라에틸 납을 화벤에 보냈다. 이렇게 독일이 탱크를 만들고, 전투기를 생산할 때, 그 공장의 주인이던 미국인들이 그 용도를 몰랐다면 말이 되지 않는다. 전쟁 중에도 나치를 도왔던 미국 한편 1932년 미국의 대통령 후보이던 루스벨트는 금융 자본가들과 결탁하여, 그들의 자금력과 지원을 받아 마침내 '허버트 후버'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이렇게 말하니, 내가 무턱대고 루스벨트를 매도한다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어, 이제부터 대통령이 된 이후의 그의 행태를 차근차근 설명하겠다. 루스벨트는 '뉴딜 정책'이라는 새로운 정책으로 "대아(大我)를 위해 소아(小我)를 희생시켜라"고 말하면서, 물가, 상품 생산, 신용 거래를 관장하는 정부 기관을 창설하고, 노동자와 농민들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아직도 미국 국민들은 루스벨트를 미국의 경제 공황을 해결한 영웅으로 생각하지만, 그것은 루스벨트의 세력이 언론을 통해 만든 것에 지나지 않는다. 2차 대전이 발발하자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은 계속 중립을 지킬 것이며, 절대로 전쟁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대중 앞에 공언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조지 마샬 장군을 연합군 사령관으로 임명한 다음, 군대를 재정비한다. 1940년 2월 19일자 '라이프(Life)'지에 게제된 사진을 보면 영국의 쉘과 미국의 에솔루브 회사의 유류탱크 차량이 기름을 옮겨싣고 있는 모습이다. 그리고 설명에는 '독일로 휘발유를 보내기 위해 선적하고 있는 장면'이라고 되어 있다. 목적지는 함부르크와 뷔페르탈이었으며, 이미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다음의 일이었다. 다시 말해서, 미국은 전쟁 발발 후에도 독일을 도와주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일본의 진주만 공습을 유도한 미국 전쟁이 진행되고, 미국의 루스벨트는 이제 난처한 입장이 되었다. 어떻게든 그 전쟁에 참여해야 했지만 명분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국민들 앞에서 쇼를 했었고, 만약 전쟁에 미군을 보낸다면 재선에서 낙선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1940년 8월에 미국은 일본군의 암호문을 입수하는데 독일, 이탈리아, 일본 3국이 군사 동맹을 맺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9월 28일 조약 체결로 군사동맹이 외부에 알려지자 루스벨트와 참모들은 작전을 짜기 시작한다. 그래서 10월에 해군장관을 태평양함대 사령관 리처드슨에게 보낸다. "대통령께서는 서부의 태평양 연안에 우리 군함을 배치시켜 일본의 유류보급을 끊고 싶어하시는데, 제독이 그렇게 해줄 수 있습니까?" "그것은 전쟁 행위이기 때문에 절대 불가합니다!" 장관은 명령을 내린 것이 아니라 질문을 한 것이다. 대통령의 뜻이라면 왜 직접 명령하지 않고 해군장관을 시켜 미온적인 지시를 내렸는가? 또, 대통령의 지시를 거부한 제독을 왜 그 때 좌천시키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일본의 공격을 받게 되었을 때, 제독에게 책임을 전가하면서, 어쩔 수 없이 일본과 전쟁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였다. 그 시기에 루스벨트는 이미 전쟁에 참전할 계획을 갖고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1월 선거 유세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미국의 모든 아버지와 어머니들에게 다시 한 번 약속합니다. 나는 절대로 당신의 아들들이 외국의 전쟁에 나가도록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다짐해서 루스벨트는 다시 대통령에 당선되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거짓말을 한 것이다. 일본의 공습을 알고 있던 루스벨트 리처드슨 태평양함대 사령관은 백악관을 두 번이나 찾아가서 함대의 하와이 철수를 강력히 건의했다. 그는 함대의 승무원들이 전투 요원이 아니고, 하와이는 너무 노출되어 있으며, 방어 능력도 불충분하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의견대로 함대를 철수하면 미국은 2차 대전에 참전할 수가 없으므로 루스벨트는 1941년 1월에 그를 파면했다. 그리고 1월 27일에는 주일 미국 대사 '조지프 그루'가 일본의 진주만 공습 계획을 접하고 국무성에 전문을 보냈다. "페루 대사가 우리 직원에게 이야기한 바에 의하면, 일본은 미국과 만일 전쟁을 한다면 진주만을 기습할 생각이다. 또 이러한 이야기를 여러 곳에서 들었다......" 1941년 3월 만찬에서 루스벨트는 측근에게 "모든 일이 잘 진행되고 있으며, 저들은 조만간 우리를 공격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당시 미국 내무장관인 '해럴드 익스'가 나중에 증언한 내용이다. 야마모토 작전 계획 미 육군 극동 담당 정보계 장교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야마모토 계획의 암호문을 해독해 일본의 진주만 기습을 알았고, 이 사실을 워싱턴에 세 번 통고했다고 한다. 이 통신문이 진주만 사건 전에 육군성에 접수되어 있었다는 것이 후에 증명되었다. 따라서 미국 정부가 일본군의 기습을 몰랐다는 사실은 어불성설이다. 결정적으로 나중에 하원의회 조사위원회 청문회에서 당시 '헨리 스팀슨' 국무장관의 일기장이 공개되었다. "우리는 외교적 노력을 기울여, 일본으로 하여금 공식적으로 사건을 일으키도록 꾸미고......" 그리고 그는 이렇게 증언했다. "문제는 어떻게 우리의 희생을 최소로 줄이면서 일본이 선제 공격을 하도록 유도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데일리 뉴스'의 기사를 보면 '리처드 소지'라는 소련 첩보원의 보고서를 입수한 특파원 오도넬 기자의 기사가 있는데, 소지는 거기에서 이러한 의견을 첨부했다. "미국 정부는 일본으로 하여금 미국을 선제 공격하도록 하여, 미국인들이 자신의 눈으로 과연 누가 침략 행위를 했는지 분명히 확인하기를 원했다. 그래야만 국민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진주만의 고물 군함 루스벨트는 진주만 폭격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전에 많은 준비를 해두었다.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에 참가한 일본군 조종사들에 의하면 당시에 그들은 이런 명령을 받았다고 한다. "만일 미국이 전쟁 준비를 해?N았다는 증거가 보이면 곧 되돌아오라." 하지만 공중에서 보니 하와이에는 즉시 이륙할 수 있는 비행기는 없었다는 것이다. 여러 대가 머리를 마주한 채로 날개가 닿을 정도로 붙어있었고, 이것은 비행기에 대한 테러를 방어한다는 목적으로 루스벨트가 직접 내린 명령이었다. 따라서 일본군은 폭격을 하고 미군 비행기들은 고스란히 당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미군 비행기에는 후진 장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장 이상한 점은 일본군에게 폭격당한 미 군함 가운데 전투에 사용할 수 있는 쓸 만한 군함이 없었다는 점이다. 미군의 태평양 함대에는 여러 척의 배가 있었는데 일본군에 파괴당한 것은 수 십년 이전에 건조된 것으로 낡아서 별 쓸모가 없는 것이었다. 나머지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 호는 쓸 만한 구축함 등과 함께 11월 28일에 이미 웨이크 섬으로 보냈으며, 항공모함 렉싱턴 호는 12월 5일에 순양함, 구축함 등과 함께 미드웨이로, 항공모함 사라토가 호는 태평양 연안으로 보냈었다. 미군이 전쟁에 사용할 배는 이미 다른 곳으로 보냈다는 말이다. 정부에서는 진주만이 폭격 당한 후에 방어 준비의 책임을 물어 하와이 해군 사령관 킴멜 제독을 1월 7일에 불명예 예편시키고, 진주만 주둔 육군 사령관 월터 쇼트 장군도 불명예 예편 조치했다. 두 사람은 군법 회의에 회부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나치에 관한 비밀 우리가 잘 아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2차 세계 대전 당시에 저항 운동에 참여했고, 아우슈비츠에 잡혀 있었던 적도 있었다. 그는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저항 운동을 했다고 했는데 나는 다소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교황은 왜 우리가 알고 있는 다른 사람들처럼 독가스로 인해서 죽지 않았을까? 물론 아우슈비츠에 갖혀 있던 사람들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들만 그런 고생을 한 것은 아니다. 아우슈비츠에서 죽은 사람과 비슷한 숫자의 사람이 드레스덴, 함부르크, 히로시마, 나가사키에서 죽었다. 특히 드레스덴은 군대 시설이나 부대가 없는 곳이었다. 그런데 연합군은 3천 톤이나 되는 폭탄을 퍼부어 35만의 시민을 몰살시켰고, 이 사실은 여러 방송국에서 후에 취재하여 일본의 남경 학살과 비슷한 사건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사실은 까맣게 잊고 오로지 독일만을 규탄했다. 물론 나 역시 전범인 독일과 일본의 파시즘과 나치즘을 극도로 혐오하지만, 연합국이라고 해서 별로 다를 것이 없다는 말을 하고 싶을 따름이다. 전쟁을 계획하고 시행하는 사람들은 모두 거기서 거기라는 말을 하고 싶을 뿐이라는 점을 미리 전해둔다. 당시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감된 사람들은 25퍼센트는 정치범이었고, 75퍼센트는 일반 잡범이었다. 더구나 수용소의 사람들에게 잔악한 행동을 한 것은 카포스 같은 자들이었는데, 그들은 죄수 중에서 뽑힌 반장, 조장 같은 개념이었고, 대부분 독일인이 아니었다. 또한 수용소마다 간단한 살인을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들이 죽은 가장 큰 이유는 발진티푸스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보자. 국제조사위원회의 조사에 의하면 당시에 다하우 수용소 인원 중에서 사망한 사람은 2만 5천 613 명이었는데, 이중에 2만 명 정도는 전쟁의 마지막 7개월 동안에 연합국의 폭격에 의해 죽은 사람들이다. 물론 그 당시에는 이미 연합군의 승리가 확실해졌기 때문에 그러한 폭격은 필요가 없을 시기였다. 승자에 의해 조작된 아우슈비츠 수용소 기록 우리는 또 2차 대전 중, 독일군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지클론 B 가스로 수백만의 유대인을 학살했다고 알고 있다. 이는 나치가 계획적으로 인종을 말살하기 위함이라고 우리는 역시 알고 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자. 400평방미터의 아우슈비츠 독가스 실에 한 번에 3천 명씩 넣어, 하루에 2만 4천 명을 죽였으며, 벨제크에서는 25평방미터, 천장이 1.9미터 되는 방에 한 번에 7~8백 명을 집어넣었다고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25평방미터라면 일반적으로 약간 큰 침실 정도의 크기이다. 이러한 연합국의 말에 의하면 1평방미터에 30명을 넣었다는 이야기인데, 캐비넷이나 공중전화 부스 안에 30명을 넣었다는 말이 된다. 만약 승리자들의 말이 사실이라고 치자. 그렇다면 그들은 독가스에 의해서 죽었던 것이 아니라, 압사 당했거나 산소 부족으로 죽었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게다가 지클론 가스는 발화성이 강하고 접착성이 강하다. 이것은 일반 상식이다. 또한 한 번 살포하면 21시간이 지나고 들어가야 안전하다. 이것은 21시간이 지나야 시체를 처리할 수 있다는 말이다. 만일 그들의 주장대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하루에 2만 4천을 죽이고, 독일군이 시체들의 입을 벌려 금이빨과 입 속에 감춘 다이아몬드를 뽑았다면, 하루에 2만 4천 명의 이빨을 검사했다는 말이 된다. 사람이 죽으면 뻣뻣해져서 입을 벌리는 일이 매우 어렵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런데 공식 발표에 의하면 8명의 독일인이 불도 없는 시멘트 방에서 원시적인 연장을 갖고 그 이빨들을 검사했다는 말이 된다. 역사책에 기록된 자료들을 토대로 다시 한 번 자세히 들여다보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한 번에 3천 명씩이 아니라, 설사 한 번에 2만 4천 명을 모두 다 넣었다고 치더라도 말이 되지 않는다. 하루에 2만 4천 명의 수용자들을 지클론 가스로 죽이고, 21시간이 지난 다음에 8명이 들어가서 3시간 동안 2만 4천 명의 이빨을 검사해서 금이빨을 모두 뽑아내고, 곧바로 또 2만 4천명을 넣어서 죽이고 21시간 후에 들어가서 3시간 동안 2만 4천명의 금이빨을 8명이 뽑아냈다는 결론이 나온다. 게다가 아우슈비츠 역사가들은 화장로 속에 시체를 넣기 전에 그 시체들의 항문과 여자들의 질 속에 숨겨둔 다이아몬드나 보물이 있는지 조사했다고 한다. 이는 교과서와 역사책에 나오는 공식적인 기록이고, 이런 책들을 보면서 우리는 (승리자들의 계획대로) 나치의 잔혹함에 또 다시 치를 떨 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또 짚어 넘어가자. 그들은 독가스로 살해한 후에 이러한 검사를 했다고 하는데, 지클론 B 독가스로 살해당한 사람의 시체는 인분이 흘러나오고 피가 범벅이 된다. 그런 상황 속에서 6백만 개의 항문과 4백만 개의 질 속을 샅샅이 더듬어서 다이아몬드를 찾아냈다는 말이다. 우리가 배우는 역사에 의하면 8명이 세 시간동안에 2만 4천의 입 속, 2만 4천 개의 항문과 1만 5천~2만 개의 질 속을 뒤져서 보석을 찾아냈다는 말이 된다. 또한 폴리아코프 교수 같은 사람은 독일인이 그 시체로 비료를 만들고, 비누를 만들었다고 한다. 독가스 학살과 시체로 만든 비누, 시체에 손을 넣어 찾아낸 귀금속 이야기 뿐만 아니라, 살해된 유태인의 숫자 역시 조작이다. 리쿠에 신부는 1천 5백만의 유대인이 학살당했다고 하고, 라루스 사전에는 2천만 명의 유대인이 독일군에게 학살 당했다고 하는데, 2천만 명이면 당시 전 세계의 유대인 숫자보다도 많은 숫자였다. 내 생각에는 독일의 잔혹함을 과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같은 거짓말들이 너무 심하게 과장된 나머지 이런 헛점을 보이게 되지 않았나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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