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성씨 유래

강姜씨

바래미나 2007. 7. 27. 02:06

강(姜)씨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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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32개의 본관과 958,163명이 있다.(1985년)

진주강씨(晋州姜氏)

 

[유래]

시조 강이식(姜以式)은 고구려 도원수를 지내며 많은 전공을 세운 인물이다. 597년(고구려 영양왕 8년)에 수문제가 침략할 야욕으로 무례한 국서를 보내오자 왕은 군신을 모아 놓고 이에 회답할 것을 논의 할 때 그는 이와 같은 무례한 글은 붓으로 답할것이 아니라 칼로 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왕이 이에 수긍하고 싸울것을 명하자 군사 정병 5만을 이끌고 임유관(臨楡關)에서 수나라 군사 30만을 단번에 격퇴하고, 603년에 수양제가 군사 100만으로 다시 침략할 때 중신회의에서 요동성 일부를 떼어주고 강화할것을 논의 했으나 이에 반대하고 싸울것을 주장하여 을지문덕과 함께 요동성 살수(청천강) 등의 싸움에서 수군을 대파하는 등 공을 많이 세웠다. 그의 후손인 강진이 진양(진주)후에 봉해지며 본관을 진주로 하였다.
-문헌상의 본관은 진주, 금천, 안동, 백천 등 9본이 있으나 모두가 대종인 진주강씨의 지파로서 현재 진주 단일본으로 내세우고 있다. 따라서 진주강씨의 시조 강이식은 모든 강씨의 도시조가 된다.
-강이식 묘소는 만주 봉길선 원수림역 앞에 있으며, 음력 4월 10일에 경남 진주시 상봉서동 봉산사에서 제사를 지낸다.

[가문의번영]

조선시대에만 상신(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5명, 대제학 1명, 원수 및 장군 25명, 명신과 공신 51명, 문과급제자 227명, 청백리 7명을 배출해 가문이 번성하였다.

-박사공파(博士公派)

중시조 국자박사(國子博士) 강계용(姜啓庸)은 1274년(고려 원종 15년) 통신사서상관으로 일본을 다녀왔다. 손자 강사첨(姜師瞻)의 5세손 중 첫째 아들 강회백(姜淮伯)의 후손을 통정공파(通亭公派), 둘째 아들 강회중(姜淮仲)의 후손을 통계공파(通溪公派)로 구분하는데, 이들의 후손에서 가장 많은 인물이 나왔다. 통정공파의 통정 강회백은 고려 말에 대사헌을 지내고 조선 개국 후 동북면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에 올랐으며, 성리학에도 밝았다. 그의 아들 강석덕(姜碩德)은 세종의 둘째 부인 영빈강씨의 아버지로서 개성유수, 지돈령부지사(知敦寧府事) 등을 지냈으며, 시와 글씨에 능했다. 강석덕의 아들 강희안(姜希顔), 강희맹(姜希孟) 형제는 통정공파의 대표적 인물로 꼽는데, 강희안은 세종 23년 문과에 급제하고, 집현전 직제학이 되어 정인지, 성삼문 등과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다. 뒤에 단종복위에 연루되었으나 "참으로 현사(賢士)이니 죽이지 말고 중용하라"는 성삼문의 변호로 화를 면하고 뒤에 호조참의를 지냈다. 그는 시서화삼절(詩書畵三絶)이라 불려질 정도로 이 방면에 있어 당대의 독보적인 존재였다. 연산군 때 우의정을 지낸 강구손(姜龜孫)은 그의 아들이고, 세조 때 영의정을 지낸 강맹경(姜孟卿)은 강희안의 4촌 형이다. 강희안의 동생 강희맹 또한 당대의 문장가이자 서화가로 세조의 총애를 받아 세자빈객(世子賓客)이 되고 병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거쳐 좌찬성에 올랐다. 통계공파에서는 선조 때 우의정을 지낸 강사상(姜士尙)과 역시 선조 때 평난공신(平難功臣)에 오르고 이조, 병조판서를 거쳐 중추원판사를 지낸 진흥군(眞興君) 강신(姜紳)과 왕자사부(王子師傅)를 거쳐 임진왜란 때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오르고, 진창군(晋昌君)에 봉해진 강인(姜絪) 형제가 빼어났다. 정묘호란의 주역으로 불리는 강홍립(姜弘立)도 강신의 아들이다. 특히 강인의 후손은 고종 때에 와서 강준흠(姜浚欽), 강시영(姜時永), 강문형(姜文馨), 강난형(姜蘭馨), 강우형(姜友馨), 강국형(國馨) 등 판서급 인물을 배출해서 명가로 꼽힌다. 이 밖에 인조 때 화포술(火砲術)을 전한 강홍중(姜弘重)이 있다.

-소감공파(少監公派)

중시조 강위용(姜渭庸)은 사도소감(司徒少監)을 지냈다. -시중공파(侍中公派) 강원용(姜遠庸)은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다.

-은열공파(殷烈公派)

중시조 강민첨(姜民瞻)은 인헌공파의 파조 강감찬과 더불어 자주대첩의 전공으로 고려사에 크게 무훈을 세운 명장이다. 이 파에서는 특히 강백년(姜栢年), 강현, 강세황(姜世晃)의 3대와 강노(姜老)가 유명하다. 강백년은 조선 현종 때 관찰사, 예조판서, 좌찬성에 이르렀으며,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는데, 문명(文名)이 높았다. 그의 아들 강현은 예조, 형조판서를 거쳐 좌찬성,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강현의 아들 강세황은 한성판윤과 각조 참판을 거쳤으며, 시서화(詩書畵)로 더 유명하였다. 강노는 강세황의 증손자로, 철종 때 대사간, 병조판서를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다.

[계파]

대표적 파는 박사공 삼형제파, 은열공파, 인헌공파인데, 각 파는 도시조 강이식으로부터 각 중시조까지의 계보가 확실하지 않아 족보를 같이 만들지 못하고 있다. 이 중 박사공 삼형제파는 다시 박사공파, 소감공파, 시중공파로 구분되고, 최근에는 족보도 같이 만들고 있다. 3형제파가 진주강씨의 3대산맥으로 그 후손이 번성하여 1백만명을 헤아린다.

-박사공파(博士公派) : 강계용을 파조로 하며, 손자 강사첨(姜師瞻)이 어사를 지냈다 하여 어사공파(御史公派)라고 부르기도 한다.
-소감공파(少監公派) : 강위용을 파조로 한다.
-시중공파(侍中公派) : 강원용을 파조로 하며, 손자 원로(元老)가 관서대장군(關西大將軍)을 지냈다 하여 관서대장군공파로 부르기도 한다.
-은열공파(殷烈公派) : 강민첨(시호는 은열공) 장군을 파조로 한다.
-인헌공파(仁憲公派) : 강감찬(시호는 인헌공) 장군을 파조로 하며, 강감찬의 출생지가 금천(서울 금천구)이므로 금천강씨로도 부른다.

[집성촌]

강씨는 진주를 중심한 경남, 부산 지방에 가장 많이 살며, 그 다음이 전남, 경북, 전북 지방에서 많이 살고 있다. 진주시 비봉산 아래에 있는 봉곡부락에는 강씨의 번영의 설화를 담은 봉(鳳)바위가 있다. 고려때 영상서(領尙書)를 지낸 정절공(正節公) 강구만(姜九萬)의 집 뒤 대봉산 중턱에 거대한 바위가 있었다. 크고 작은 바위가 기묘하게도 봉의 형상을 하고 있어 봉바위라 불렀는데, 어느날 강남도사(江南道士)가 이곳을 지나다 봉바위를 보고 "강씨의 대성함이 이 바위에 있다"고 점쳤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대봉산 산중턱에 시조의 위업을 기리고 영정을 모시기 위해 건립한 봉산사(鳳山祠)가 있다.

[가문의고향]

경남 진주

[기타]

[ 연락처 ] 진주강씨중앙종회 : (02)779-0695
[ 인 구 ] 1985년 인구조사 때 941,087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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