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들이?

남인도 기행

바래미나 2007. 7. 10. 03:40
 2006년 12월 남인도 기행

즈음은 마치 유행병처럼 많은 한국 사람들이 인도를 여행한다. 또한 예전에는 성수기와 비수기의 구분의 뚜렷해서 견디기 어려운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봄여름에는 관광객이 별로 없었지만 지금은 이런 구분이 거의 없어져서 한 여름에도 인도행 항공권을 구하기가 만만치 않게 되었다. 하물며 성수기에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항공권은 물론 델리나 뭄바이와 같은 도시는 가을과 겨울에는 호텔방 잡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이러한 상황에 화답(?)이라도 하듯 인도의 발전상은 가히 눈부시다. 도로는 하루가 다르게 깔끔히 포장되고 있으며 두 세배로 넓어지고 옛 도시의 구시가지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초현대식 고층 건물들이 하나 둘 들어서고 있다. 예전의 정겹고 고풍스러운 인도의 정취가 급격히 자취를 감추고 있는 것이다.

이번 남인도로의 여행은 그래도 나은 편이었다. 물론 남인도를 대표하는 대도시들-뱅갈로르나 첸나이와 같은-에는 현대와 중세가 어우러진 독특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지만 우리가 방문한 대부분의 지역들은 비교적 한가롭고 평화로운 전형적인 남인도의 분위기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차장을 가득 메운 관광버스들로 북적거리는 북인도의 관광지와는 달리 남인도의 대부분 지역의 유적지에는 우리가 타고 온 버스 외의 다른 외국인 관광버스는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한산했다. 전체적인 분위기도 북인도와는 사뭇 달랐다. 사람들의 생김새도 다르고 마을의 분위기도 다르며 글씨와 말이 다르고 사원의 생김새와 분위기가 북인도와는 뚜렷이 달랐다. 밀가루를 주식으로 하는 북인도와 달리 남인도는 쌀을 주식으로 하고 있었다. 말이 인도이지 같은 나라 사람들끼리도 말이 서로 통하지 않아 영어로 대화하는 인도인들의 모습은 볼 때마다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였다. 특이한 것은 이렇듯 서로 다른 나라처럼 제각기 언어가 다르고 글이 다른데도 힌두교라는 공통점이 어느 곳이나 꼭 같이 장구한 세월을 유지되어 왔다는 점이다.


이번 여정은 고생한 것만큼 얻은 것도 많았다. 사진도 많이 찍었고 현지인들의 소박하고 착한 마음들도 많이 경험했다. 북인도에 비해 아직 관광에 대한 인프라가 별로 없어 호텔시설이나 식사가 상대적으로 좋지 못했지만 한편으로는 오히려 그런 점 때문에 인도의 정취를 그나마 더 많이 접할 수 있어 좋았다..................................

 

뭄바이(Mumbai)의 공항에 항공기가 도착한 건 자정이 훨씬 지나서였다. 원래 도착시각이 밤 11시 반이었으니 한 시간이 연착된 셈이다. 항공기는 인천공항을 출발해 홍콩과 델리를 거쳐서 총 17시간 만에 도착한 것이다. 문제는 언제나 델리 공항이었다. 공항 시설에 비해 취항하는 항공사가 워낙 많다보니 공항이 미쳐 소화를 다 못하는 것이다. 더구나 겨울철이 되면 밤에는 거의 매일 짙은 안개가 끼기 때문에 이착륙이 불가능해져서 항공기들이 공중에 삼사십 이상을 떠도는 것이 다반사다.

입국수속은 비교적 신속히 이루어졌지만 수하물이 나오려면 아직도 더 기다려야 했다. 몇 번 벨트에서 우리가 탄 항공편의 수하물이 나오는지 명확히 표시가 되어있지 않아 이곳저곳에 수소문 한 끝에 한참을 기다리자 하나 둘 벨트를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시장바닥처럼 어수선하고 복잡한 공항에서 그래도 우리 짐을 빠짐 없이 찾았다는 안도감이 그나마 행복감을 주었다. 일행은 버스를 타고 뭄바이 시내로 향했다.

원래는 호텔에 도착해서 잠시 눈을 붙인 후 역으로 나가 아우랑가바드(Aurangabad)로 향하는 기차를 타기로 되어 있었지만 비행기가 많이 연착한데다가 짐도 너무 늦게 나와서 우리가 호텔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현지시각으로 새벽 세시가 되었다. 문제는 우리 기차를 타기 위해서는 네 시 반에 호텔을 나서야 하는 점이었다. 새우잠은커녕 간신히 샤워만 하고 옷을 갈아입는 시간도 빠듯할 정도였다.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호텔을 나서서 역으로 향했다. 잠 한숨 제대로 자지 못하고 밤을 지새운 피로감이 일행의 온몸을 엄습했다. 바깥은 아직 깜깜했다.
 

기차역은 무척 혼잡했다. 새벽의 어슴푸레한 가로등 사이로 쉴 새 없이 사람들과 택시와 오토릭샤들과 자전거들이 먼지와 소음을 일으키며 일행 곁을 스쳐 지나갔다. 수많은 수상한 눈길들이 낯선 이방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어둠속에서 호기심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일행 중 한 사람이 내게 다가와 나지막이 말을 건넸다. “ 저 사람들 우리 쳐다보는 눈이 아프리카의 맹수들이 사냥감을 바라보는 것 같애요.”
 

아무튼 6시 반이 되자 열차는 소리도 없이 출발했다. 침대차로 준비가 되어있어서 대여섯 시간 눈을 붙일 요량이었지만 일행은 인도에서 경험하는 첫 기차여행이라 다소 들뜬 탓인지 별로 잠을 자고 싶진 않은 모양이었다. 정차하는 역마다 내려서는 역의 풍경과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느라 분주했다. 인도인들은 카메라에 대한 거부감이 별로 없이 비교적 친근하다. 그런데다 눈이 크고 얼굴의 윤곽이 뚜렷해서 인물사진을 찍는 데는 그만이다. 또한 기차역의 풍경은 우리의 육, 칠십년대의 분위기와 같이 정겹고 소박하다. 이러니 사진촬영에 욕심이 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일행은 각자 기차간을 오가며 승객들의 사진을 찍거나 바깥풍경을 감상하고, 정차하는 역의 사진을 찍으면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기차여행을 즐기고 있었다.

어느덧 기차는 서서히 고원을 향해 올라가기 시작했다. 드디어 데칸(Deccan) 고원이 시작된 것이다. 시간을 보니 그럭저럭 여섯 시간을 달려왔다. 기차도 한 시간이 지연되었다. 인도에서는 기차가 한 두 시간 연착되는 것은 연착이 아니라 정시도착에 해당한다. ‘인도를 여행하려면 언제나 마음도 느긋하게 가져야 한다. 시간도 인도에서는 늦게 가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어느 영국 여행자의 말이 생각이 난다.

기차가 목적지인 만마드(Manmad)역에 정차했다. 정차하는 시간은 단 3분. 여행가방을 모두 내려야 하기 때문에 미리 출입구에 짐을 내놓고 있다가 기차가 서자마자 부산하게 짐을 내렸다. 한 낮에 도착했고 작은 기차역이라 비교적 한산했기 때문에 하차는 일사분란하게 이루어졌다. 이윽고 기차는 서서히 떠나가고, 일행을 점검하던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일행 중 한 사람이 안 보이는 것이었다. 이미 기차는 출발한 터라 발을 동동 구르며 어쩔 줄을 몰랐다. 인도에서, 더구나 기차여행 중 사람을 찾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오후에는 아잔타까지 가야하는 빠듯한 일정이 있기 때문에 일분일초가 아까운 상황이었다.


일정은 고사하고 잃어버린 사람을 찾는 게 우선 문제였다. 우선 역장을 찾아가서 사정을 이야기하고 다음 역에 연락했다. 천만 다행히도 다음 역인 부사발(Busaval)은 이곳 만마드에서 기차로 30분 거리로, 자동차로는 한 시간이면 도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인도사람들과는 생김새가 다른데다 우리가 타고 있던 칸에는 인도인 관리인이 있었기 때문에 쉽게 알아보고 일행이 모두 전 역에서 하차했다는 것을 알려주고 부사발에서 내리도록 도와주었다. 두 시간 후 현지가이드는 부사발까지 자동차를 타고 가서 손님을 데리고 무사히 돌아왔다. 너무도 고맙고 다행한 일이었다. 본인이 너무 미안해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바람에 일행이 더 미안할 정도였다. 아무튼 손님을 찾은 것은 다행이었지만 이제는 일정을 어떻게 소화해야하는가가 문제였다. 생각 끝에 아잔타(Ajanta)를 다음날 보기로 하고 오늘은 엘로라(Ellora)를 구경하기로 정했다. 엘로라가 보다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었다.


일행이 엘로라에 도착해서 맨 먼저 방문한 곳은 엘로라의 석굴사원 중 최고의 작품인 16번 카일라쉬 석굴이었다. 이 석굴은 엘로라를 대표하는 것으로 “석굴사원의 어머니”라 종종 불린다는 가이드의 설명이다. 8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크기는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보다 두 배 가까이 크다. 규모도 규모지만 이 사원의 압권은 높이 40미터의 바위산을 위에서부터 깎고 다듬어서 조성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기둥이나 돌 조각 하나도 깎아서 붙인 것 없이 하나의 거대한 바위산을 조각해서 조성했다는 사실만으로 세계적인 불가사이로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카일라쉬는 우주의 중심을 상징하는 것으로 시바 신이 머무르고 있다는 히말라야의 성산을 일컫는데, 불교에서는 수미산으로 부른다.

엘로라에는 모두 34개의 석굴이 있는데, 6세기 경 불교사원군이 등장한 것을 시작으로 힌두교사원군, 그리고 자이나교사원군이 5백년이 넘는 세월을 두고 같은 장소에 차례로 조성되어 나아갔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종교간의 갈등과 훼손 없이 그대로 보존되어 왔다는 사실 자체가 불가사의 일지 모른다. 물론 언급한 세 종교는 해탈이나 윤회와 같은 브라만 사상에 공통적인 뿌리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엘로라의 석양을 뒤로 하고 서둘러 아우랑가바드의 호텔에 체크인하여 식사를 했다. 만 이틀만의 저녁식사와 편한 잠자리였다.


아우랑가바드는 무굴제국의 6대 황제였던 아우랑제브(Aurangjeb)가 데칸고원에 진출하고 생의 마지막을 보낸 것을 기념하기 위해 원래의 파테나가르(Fatenagar)을 아우랑가바드로 바꾼 것이다. 아우랑제브가 죽은 후 아우랑가바드 역시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지만 그 이름은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곳도 유구한 역사만큼이나 돌아볼 곳이 많지만, 대부분의 여행자들에게는 아잔타나 엘로라를 구경하기 위한 거점으로 이용될 뿐이다. 마침 이곳은 목화 수확철이라 드넓은 목화밭이 눈처럼 하얗게 펼쳐져있고 곳곳에는 산더미처럼 쌓아 놓은 공장들을 볼 수 있었다. 인도에서 생산되는 목화의 70%가 이곳 아우랑가바드 부근의 고원 평야에서 생산된다고 한다.


다음 날은 새벽에 아잔타로 향했다. 아잔타까지는 네 시간 가량을 차로 이동해야 하고, 1시에 떠나는 열차를 타기위해서는 이렇게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문제만 없었더라면, 어제 아잔타 일정을 끝내고 오늘 넉넉한 시간으로 엘로라를 구경했더라면 좀더 시골마을과 여인네들이 솜을 따고 있는 목화밭에서 촬영시간을 가질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뇌리를 맴돌았지만 곧 잊어버리기로 했다. 생각한다고 상황이 변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아쉬운 대로 시골의 마을에 정차해서 잠시 촬영시간을 가졌다.

아잔타의 석굴군은 불교의 역사에서는 빼 놓을 수 없는 중요한 유적으로, 모두 28개의 석굴이 있는데, BC2세기~1세기에 조성된 전기 석굴군과 5~7세기에 조성된 후기 석굴군으로 나뉜다. 전기에 조성된 석굴들은 남방불교의, 그리고 후기에 조성된 석굴들은 북방불교의 색채를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이 석굴들은 8세기이후 불교가 점차 쇠퇴하면서 버려지게 되어 무려 천년 이상을 밀림 속에 자취를 감추고 있다가 1819년 호랑이 사냥을 나섰던 영국군 병사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어 세상에 모습을 다시 드러내게 된 것이다. 많은 석굴들의 내부가 아름다운 프레스코 벽화로 장식되어 있었지만 현재는 안타깝게도 많이 훼손되어 극히 일부 회화밖에는 볼 수가 없는 점이 너무 안타까웠다.
 

아잔타의 방문을 끝내고 다음 행선지인 남인도의 뱅갈로르(Balngalore)로 가기 위한 기차를 타기 위해  잘가왈(Jalgawal)역으로 향했다. 사실 아잔타나 엘로라는 중요한 유적지임에도 교통이 너무 나쁘다는데 문제가 있다. 기차시각도 계절별로, 또는 수시로 바뀌는 바람에 그때그때 부사발이나 만마드, 또는 잘가왈 중 선택해서 알맞은 역을 골라서 이용해야 한다. 잘가왈은 매우 작은 역이라 기차가 서는 시간이 아주 짧아서 짐을 모두 싣는데 애를 먹을 것 같아 기차를 세우는 역무원에게 미리 팁을 주고 정시보다 3분정도만 더 정차하도록 부탁했다. 기차 출발시각 1시간 전에 역에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는데, 30분 쯤 지나자 기차가 연착될 것이라는 안내방송이 나오기 시작했다. 1시간  쯤 연착 될거라는 방송이었는데, 결국은 두 시간이 연착되어 기차가 도착했다. 천신만고 끝에 기차에 올라 짐들을 정리하고 나니 피로가 밀려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지금부터 장장 24시간 가까이 남인도를 향해 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도 에어컨이 설치된 객실이라는 점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말이 24시간이지 만만치 않은 기차여행이었다. 그렇다고 기차가 느린 것도 아니다. 속도도 굉장히 빠른 기차인데도 24시간을 간다면 얼마나 먼 거리일까. 하지만 지도를 펴놓고 행선지를 찾아보면 그저 짤막한 거리에 불과하다. 근두운을 타고 단숨에 일만팔천리를 날아간 손오공이 그곳에다 오줌으로 표시를 하고 돌아와보니 삼장법사의 손바닥 안에 있었다는 서유기의 구절이 생각난다. 그만큼 인도라는 나라가 크다는 이야기가 된다. 남한의 33배에 해당하는 인도의 크기는 이렇게 기차를 타고 여행할 때 비로서 그 크기가 느껴진다.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4시간을 걸려 달려가는 그곳은 지도상에서는 그저 짤막한 단거리 목적지에 불과했다. 점심과 저녁, 그리고 다음날 아침과 점심은 지금 생각하면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기차에서 제공되는 식사는 날아갈 듯한 쌀밥과 카레, 그리고 삶은 달걀이 고작이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목적지 뱅갈로르(Bangalore)에 도착한 것은 다음날 오후 두시 경이 되어서였다. 고원에 위치한 도시라서 그런지 한낮인데도 그늘 속은 쾌적했다. 까르나따까(Karnataka)주의 주도인 뱅갈로르는 요즘 인도에서 가장 주목 받고 있는 도시의 하나로, 남인도 최대의 도시중 하나이다. 기후도 쾌적하거니와 거리도 다른 대도시와 달리 무척 깨끗하고 잘 정비되어 있었다. 뱅갈로르는 인도의 실리콘밸리라 불릴 만큼 인도 IT산업의 중심지이다. 이곳에서 만난 한 한국인 사업가는 이곳이 인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물가도 싸고 사람들도 좋다고 한다. 특이한 볼거리는 별로 없지만 인도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시청사가 있고 티푸술탄의 궁전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일행은 티푸술탄의 궁전을 잠시 둘러보고 외곽의 달동네로 향했다. 공동 우물 하나에 허름한 수 백 가구가 밀집되어 옹기종기 살고 있는 이곳의 달동네는 일행이 도착하자 집집마다 애 어른 할 것 없이 모두 몰려나와 촬영하는 모습을 신기한 듯 구경하고 자기들을 찍어달라고 서로 밀치고 난리였다. 영양상태가 고르지 못한 탓인지 아이들의 얼굴은 곰팡이와 부스럼이 많았지만 그래도 해맑은 웃음과 초롱초롱한 눈망울은 어느 부자동네의 아이들과 다름없었다. 부모 잘못만나 어렵사리 살고 있다는 점만이 다를 뿐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정신적으로는 더 순순한 법이다. 일행은 사진을 찍으며 아이들과 노인들에게 사탕과 과자, 볼펜과 담배를 나누어주었다. 가져간 것이 그리 넉넉지 않아 많이씩은 줄 수 없었지만 잠시 일행은 생각지 않게 이 동네에 갑자기 등장한 산타클로스가 되었다. 손을 흔들며 떠나가는 일행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눈빛 속에는 섭섭함과 부러움이 녹아있었다.


다음날. 뱅갈로르에서 벨루르(Belur)로 가는 길은 호젓한 시골길이었다. 갑자기 일단의 벌거벗은 행렬이 나타나서 깜짝 놀라 바라보니 다름 아닌 자이나교도 들이었다. 이들은 우리가 가는 벨루르로 성지순례를 가는 중이었는데, 남자들이 앞서고 여자들은 뒤에 서서 따라가는 행렬이었다. 남자들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알몸으로 길을 가고 있었다. 젊은 남자들 뒤로 한 노인이 알몸으로 힘겹게 무리를 따라가고 있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사실 자이나교는 불교와 거의 동시대에 태동되었다. 무소유나 불살생 등 기본적인 교리는 불교와 비슷하지만 몇 가지 요소는 불교에 비해 극단적인 노선을 취한다. 벌거벗은 것은 무소유의 극단을 보여주는 것이고 손에 부드러운 빗자루를 들고 있는 것은 자리에 앉기 전에 자기 자리에 있을지도 모르는 생물들을 살생하지 않기 위해 부드럽게 쓸기 위해 가지고 다니는 것이다. 이들은 대개 사진촬영을 극히 꺼리는데, 오늘은 왠지 사진 촬영에 무척이나 호의적이라서 너무 놀랐다.


대추야자 농장과 해바라기밭을 지나며 마을에 잠시 정차한 일행은 속칭 몽키 바나나로 시장기를 달랜 후, 1시간여를 달리자 멀리 고도 벨루르의 고뿌람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벨루르는 11~12세기에 데칸고원을 지배했던 호이살라(Hoysala)왕조의 수도가 있었던 곳으로 현재는 첸나께샤와(Chennakeshava)라 불리는 사원이 남아있는 곳이다. 이 사원은 호이살라 왕조의 건축기법과 화려한 조각들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사원인데, 1117년에 건립된 규모가 제법 큰 사원으로, 정면에는 그리 크지 않은 고뿌람이 자리 잡고 있다. 사원의 중심에는 시바신을 모신 신전이 있는데, 모두 검은색의 돌로 만들어져 있으며 천장과 벽, 그리고 기둥은 정교한 조각으로 가득했다. 카주라호에 있는 사원의 조각에 비해서는 에로틱한 조각이 거의 없지만 조각의 정교함에 있어서는 카주라호의 것보다 한 수 위였다. 조각술에 감탄하고 사원을 나선 후 점심을 먹고 이곳에서 16km 떨어진 할레비드(Halebid)로 향했다. 이곳 역시 벨루르와 함께 호이살라 왕국의 수도로 사용되었던 지역인데, 이곳에 있는 호이살레쉬와라(Hoysaleshvara) 사원의 조각은 아까 본 첸나께샤와 사원의 조각보다도 한 수 위로,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천년 전에 이토록 섬세하고 아름다운 건축물들을 조성해 놓을 수 있는 인도의 왕조에 대해 깊은 경외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인도를 여행하다 보면 유럽의 그것과는 또 다른 문화적 충격을 받게 된다. 반만년 역사를 지니고 있는 문명의 발상지로서의 자격과 요건이 충분히 갖추어져 있는데 반해. 같은 시대의 우리나라와 비교해 보면 우리나라는 한마디로 가진 것에 비해 역사가 너무도 과장된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일행이 두 곳의 방문을 마치고 마이소르에 도착한 것은 한 밤중이 다 되어서였다. 도중에 농촌에서 벼를 추수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몇 건 촬영했다. 도심으로 들어오자 내일 아침 보게 될 아름다운 마이소르 궁전이 조명을 밝히고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것이 차창으로 스쳐갔다.


마이소르의 아침은 오랜만에 맑은 햇살이 비쳐주었다. 일행은 우선 데바라자 시장(Devaraja)으로 향했다. 데바라자 시장은 인도 전역을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재래시장으로 꼽힌다. 규모는 별로 크지 않지만 과일과 야채, 꽃, 향신료가게들이 어우러진 유서 깊은 오랜 시장이다. 두 번째로 방문한 마이소르의 궁전은 영국 건축가인 헨리 어윈이 설계한 마하라자의 궁전으로, 크리슈나 라자 와디야르(Krishna Raja Wadiyar)왕의 후손이 현재도 머무르며 호화로운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궁전의 내부는 화강암과 스테인드글라스, 그리고 회화 등으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는데 촬영을 못하게 해서 무척 아쉬웠다. 오후에는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자간모한(Jaganmohan)궁전을 방문하여 왕실에서 수집한 고가의 컬렉션과 회화를 감상한 후, 도심의 산정인 차문디(Chamundi) 힐에 올라갔다. 이곳에는 수호여신인 차문디를 모신 힌두사원 차문데스와라(Chamudesvara)사원이 위치하고 있고, 언덕의 중간쯤에는 시바신이 타고 다닌다는 소(난디라고 한다)를 커다란 바위를 깍아 만들어 조성해 놓은 곳이 있다. 참고로 마이소르라는 이름은 악신의 이름 마이사수라(Mysasura)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저녁식사 후에는 마이소르궁전의 야간 모습을 촬영했다. 시원하고 쾌적한 바람이 폐부를 깊숙이 파고들었다. 내일은 마침내 인도 남부의 케랄라주 항구도시 코친으로 향하는 날이다.


코친의 아침은 중국식어망의 낚시질로 시작되는 것 같았다. 일렬로 늘어서 중국식 어망은 생각보다 훨씬 크고 거대했다. 책에는 요즘은 이 어망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막상 와보니 웬걸, 아침 일찍부터 이 거대한 어망을 이용한 고기잡이가 한창이었다. 방법은 간단해서 거대한 어망을 도르래를 이용해 바다에 넣어 놓고 10분 정도 지나면 그물을 통째로 올려서 걸린 고기를 잡는 것이다. 장치가 워낙 크다보니 그물을 놓을 때는 간단하지만 올릴 때는 장정 대 여섯 명이 온 힘을 다해 밧줄을 끌어 당겨야 하는데, 한 번 건질 때마다 잡히는 건 고작 손바닥보다도 작은 물고기 서너 마리 뿐이었다. 제법 큰 고기는 작은 배라도 가지고 좀 깊은 곳으로 나갔다 온 어부들 몫이었다. 이런 어망은 경제성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관광객들에게는 눈요깃감도 되어 이곳에는 많은 관광객으로 북적거린다. 이곳에는 또한 성 프란시스의 성당이 있는 성스러운 곳이다. 포르투갈의 전설적인 항해사 바스코다가마가 이 성당의 앞뜰에 12년간 묻혔다가 리스본으로 옮겨졌다고 해서 유명해진 성당으로, 원래는 성 안토니오 성당으로 불리웠던 것을 포르투갈의 프란시스수도회에서 운영을 맡은 뒤 성프란시스 성당으로 개명되었다. 성당의 방문을 마치고 유태인 마을을 찾았으나 마침 시나고그(유대교 회당)가 문이 닫혀 있어 곧바로 수로 유람을 하기로 했다.

수로에는 전통적인 하우스보트가 있고 유람선으로 수로를 여행하는 방법이 있다. 하우스보트는 요금이 비싸고 대개 1박2일을 기본으로 운행하므로 일반 여행자에겐 맞지 않는다. 이곳의 수로를 이용해서 꼴람(Kolam)까지 가려면 8시간을 배를 타야한다. 우리는 두 시간 만 타고 나머지는 버스로 이동하기로 했다.


이튿날 아침, 꼴람을 출발한 일행은 타밀라두(Tamiladu)주의 깐야꾸마리(Kanyakumari)로 이동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야자수 농장을 점차 뒤로 하고 나타난 깐야꾸마리는 인도의 최남단에 위치한 땅끝 마을로서 동쪽에는 뱅갈만, 서쪽은 아라비아해, 그리고 남쪽으로는 인도양을 바라보는 곳으로 인도인에게는 성지나 다름없는 지역이다. 원래가 바람이 많은 지역이지만 오늘은 유난히 바람이 심해서 배를 타고 들어가는 비베카난다 메모리얼의 관람은 취소하고 대신 바닷가의 어촌을 방문했다. 타밀라두와 케랄라지역에는 기독교인들의 비율이 높은 지역이지만 기본적으로 모든 인도인들의 마음속에는 이미 정형화 된 힌두사상이 언제나 우선시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곳이었다. 힌두교도 뿐 아니라 종교를 초월하여 수많은 인도인이 아라비아해로 붉게 넘어가는 낙조를 감상하며 두손을 모아 소원을 비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한쪽에서는 아름다운 성당의 루미나리가 성스럽게 성당의 안팎을 장식하고 크리스마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인도의 기독교인 비율은 불과 2%밖에 안 되지만, 숫자로 계산하면 2천만이 넘는 많은 수가 기독교를 믿고 있다. 이 숫자는 우리나라 전 기독교인을 합친 숫자보다도 많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대부분 남부인도에서 기독교가 강한데, 특히 이곳 깐야꾸마리와 코친, 마두라이 지역은 무려 50%이상이 기독교를 믿는다고 한다.


깐야꾸마리에서 마두라이로 가는 길에서는 많은 풍력발전기들을 볼 수 있었다. 엄청난 수의 거대한 풍력발전기는 오늘날,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인도의 힘을 새삼 느끼게 한다.

마두라이에 도착한 일행은 오후에 티루말라이 나약(Thirumalai Nayak) 궁전으로 향했다. 1636년 나약왕조를 이끌었던 티루말라이나약에 의해 건설되었지만 그의 손자인 초까나따 나약에 의해 새로운 궁전이 지어짐으로써 그 기세에 밀려 현재는 원래 규모의 1/4만 남아있다. 인도와 사라센 양식이 혼합된 전형적인 건축물로 아름다운 천장과 회랑 기둥들이 무척이나 인상적인 궁전으로서, 스리미낙쉬(Sri Meenakshi)사원과 함께 마두라이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다음으로 방문한 스리미낙쉬 사원은 순다레스와라와 그의 부인인 미낙쉬를 모시는 전형적인 남인도 양식의 거대한 힌두사원으로 넓이가 부려 6헥타에 이른다. 동서남북에는 출입문을 대신하는 커다란 고뿌람이 하나씩 놓여있으며, 그중에서도 남쪽의 고뿌람이 49미터의 높이를 자랑하며 우뚝 서있다. 각 고뿌람에는 3만 여개의 신과 악마가 다채로운 색조로 조각되어있다. 사원의 내부도 화려하고 수많은 조각들과 신전과 사당과 회랑, 그리고 회화들로 가득했다. 인도 최대의 사원에 걸 맞는 수준과 크기를 자랑하는 전형적인 사원으로 이제까지 보아 온 사원 중 가장 아름답고 큰 사원이었다.


다음날은 다시 탄자부르(Thanjavur)로 향했다. 탄자부르는 한때 촐라왕조의 수도로 번성했던 지역이다. 이곳에는 브리하디스와라 촐라(Brihadisvara Chola)라 불리는 거대한 사원이 있다. 1987년에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이 사원은 남인도 전역과 그 이웃 섬들까지 세력을 뻗쳤던 Chola 제국의 창시자 라자라자(Rajaraja) 대왕 통치시대인 1003~1010년 탄자부르(Thanjavur)가 건립했다.

함피 이남의 사원들이 낮은 담장으로 사역을 구분하고 있는데 비해, 이 사원은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져 있고 정면과 측면의 비는 대체로 1:2의 비례를 가지고 있다. 입구에 거대한 남문을 두고 중문, 난디(시바가 타고 다니는 암소). 2간으로 된 대전실(大前室). 그리고 본전과 탑이 합께 있는 스리비마나(Sri Vimana), 만다파(Mandapa)가 일직선으로 배치되고 중문부터 본전 뒤편으로 회랑을 돌리고 있다. 이 사원에서 인상적인 것은 본전의 상단에 놓여진 무게 20톤의 돔인데, 이렇게 거대한 돔이 어떻게 저 높은 곳에 얹혀질 수 있는지가 불가사의해 보였다.

사원을 뒤로 하고 뜨리찌(Trichi)의 스리 랑가나타스와미(Sri Rangasnathaswamy)사원으로 향했다. 비슈누를 모신, 10세기부터 존재했던 거대한 사원군으로 여섯 개의 고뿌람을 통과해야 비로서 본전이 나온다. 하지만 본전은 힌두교인 외에는 출입금지라고 한다. 대신 전망대에서 사원을 조망해 볼 수 있으니 티켓을 사라고 한다. 거의 반강제로 티켓을 사서 올라가니 전망대라 하기에 민망한 작은 건물의 옥상이 나온다. 이곳에서 볼 수 있는 것이래야 고작 고뿌람과 사원 지붕 정도다. 더 많은 것을 보려면 돈을 더 내란다. 이 사원은 어제 본 마두라의의 스리미낙쉬 사원에 비해 정교함이나 예술, 문화적 가치는 덜해보였지만 규모로서는 가히 엄청나다라는 말이 어울릴 것이다. 사원 서쪽의 고뿌람 부근에는 정교한 조각이 몇 개 있어 촬영 후 일정을 끝내기로 했다.

이래저래 시간도 다 지나 어느덧 저녁시간이 되어 호텔에서 식사를 한 후 탄자부르 역에서 첸나이행 열차를 기다렸다. 오늘 기차는 세 번째 타는 것이라 이제는 어느 정도 이력이 붙어서인지 일행 모두가 잘 적응하고 있는 듯 보였다. 기차시간도 짧아 6시간 정도 지난 새벽 4시 반이면 첸나이에 도착할 터였다. 희한한 것은 우리는 기차를 타고 가는데, 우리 버스의 운전기사는 잠 한숨 자지 않고 그 버스를 첸나이의 역까지 몰아서 우리를 기다리기로 되어있다는 점이었다. 이게 말이나 되는지, 인도라서 가능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너무나도 무리인 것 같아 몇 번을 운전기사와 현지가이드에게 물어보았지만 다들 그렇게 한다는데 아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사의 건강과 승객들의 안전을 생각해서라도 이것은 시정되어야 할 문제인 듯싶다.


새벽에 첸나이에 도착한 일행은 우선 호텔에서 아침을 먹은 후 마말라뿌람(Mamallapuram)으로 향했다. 도중에 첸나이의 어촌을 잠시 둘러보았다. 이른 아침시간인데도 벌써 많은 배들이 바다로부터 조업을 마치고 들어오고 있었다. 대부분 카누보다 조금 더 클까 말까한 작은 어선들이었는데, 뜻밖에도 꽃게를 비롯해 갈치, 가자미 등 다양한 고기를 싣고 돌아오고 있었다. 길가에는 엉성하게 대나무 줄기로 만들어진 어촌이 있어서 물어보니 2년 전 쓰나미가 닥치는 바람에 해변에 있던 먼저 있던 어촌이 모두 떠내려가고 지금은 정부에서 지어 준 초라한 마을에서 어렵게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마을 분위기는 전체적으로는 제법 활기가 있어 보였지만 쓰나미 때 가장을 잃은 가족들은 구걸을 하면서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마말라뿌람은 첸나이에서 두 시간 거리에 있는 유적도시이다. 이곳을 대표하는 볼거리는 높이 15m 폭 27m에 달하는 바위에 서사시 마하바라타의 주인공인 아르주나(Arjuna)가 고행하는 장면이 부조된 것으로 이곳에 새겨진 조각은 20여명의 석공이 10여년을 조각한 것이라고 한다. 그 옆에는 크리슈나의 버터볼이라는 커다란 둥근 바위가 언덕 중간에 놓여있는데, 마치 설악산의 흔들바위를 옮겨 놓은 것처럼 손으로도 쉽게 흔들거린다.

이곳에서 약 5분을 이동하면 파이브 라타스(Five Rathas)라 불리는 19세기에 건립된 석조사원이 나온다. 암석을 깎아 만든 전차모양의 사원들로, 바다에서 겨우 300미터밖에 떨어져있지 않아 영국인이 발굴하기 전까지는 모래 속에 묻혀있었다. 5개의 라타는 서사시 마하바라타의 전사들인 반다브 일가와 그들 공동의 아내인 드로파디의 이름을 딴 것이라고 한다. 모두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서로 다른 다섯 개의 양식을 띄고 있는 석조사원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아르주나 라타인데 엘로라의 카일라쉬 사원처럼 초기 드라비다 양식으로 지어졌다.


마지막으로 해변사원으로 향했다. 나라심하 바르만(Narashimha Varman) 2세에 의해 7세기에 건립된 남인도 최초의 석조사원으로 고대의 석굴사원에서 중세의 석조사원으로 넘어가는 시대를 반영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사원이다. 사원의 조각이나 보존상태가 좋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해변에 세워졌기 때문에 오랜 비바람에 의한 풍화작용으로 훼손되었다는 것과 오래 전 해일이나 지진에 의해 바다 속에 침수되었던 것을 인디라 간디 수상 때 그 중 하나를 건져 올려서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해 놓은 것이라는 것이다. 두 가지 다 설득력이 있으나 현지 가이드는 후자의 설이 사실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열흘이 넘는 일정의 피로가 몰려왔다. 일행은 카메라를 접고 첸나이로 돌아와 첸나이의 명소의 하나인 산 토메 성당을 방문한 후 호텔에 돌아와 쉬었다. 모처럼 맞는 휴식시간. 그리고 저녁은 오랜만의 한식으로, 고기볶음에 소주를 곁들이니 고향의 맛이 그대로 전해지는 것 같았다.


여행을 하면서, 또는 여행을 안내하면서 언제나 느끼는 것은 여행을 하기 전에 각자가 여행에 대한 나름대로의 공부를 되도록 많이 해야 한다는 점이다. 많은 여행자들이 이 점을 소홀히 함으로서 여행의 참맛을 반감시키는 경우가 많다. 인도든 중국이든 유럽이든 중동이든, 어느 지역을 여행하더라도 기본적으로 그들의 문화에 대한 세심한 관찰력과 이해심과 그러한 것들이 어디에 어떻게 왜 조성되어 있는지에 대한 관심이 필요한데, 이 역시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소홀히 하는 점이다. 유럽의 역사와 문화가 성당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듯이, 인도의 전통과 문화는 사원을 중심으로 조성되고 이어져 왔다. 인도에 가서 사원만 보고 왔다, 또는 유럽에서는 성당만 보고 왔다 하고 불평하는 여행자들을 보면 한편으로는 비싼 여행경비를 지불하고 이곳에는 뭐하러 왔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또 한 가지, 여행에는, 특히 오지여행처럼 정형화 되지 않고 어려운 지역을 여행하다보면 식사와 잠자리에 대한 불편함은 의례 가끔씩 발생하기 마련인데도 식사와 잠자리에 대한 불평을 끊임없이 늘어놓으며 주위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드는 초보적인 사고의 여행자들은 여행을 같이 할 자격이 없다고 본다.


여행을 하면 할수록 견문이 넓어지고 인생에 대한 지혜가 쌓이면서 현명한 사람이 되어간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원래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람만이 여행을 통해서 더욱 지혜롭게 되는 것이지, 바보는 여행을 해도 여전히 바보다. 오히려 여기저기 가 보았다는 허영심만 쌓이게 되어 더욱 더 고집스러운 바보가 되어가는 것이다.  2006. 1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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