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장사익 노래방

슬프디슬픈 꽃망울로 툭 터진 "하얀 노래"

바래미나 2007. 7. 10. 00:55

슬프디슬픈 꽃망울로 툭 터진 ‘하얀 노래’

 

 

 

[시대의 소리꾼 장사익] ① 욕심도 사랑도 죽음도 엮어


마흔세 살 카센타 더부살이 삶에 불어온 찔레꽃향기

 

 

한겨레 이길우 기자
» [화보] 장사익의 웃음.


왜 찔레꽃 향기가 너무 슬프다고 했을까?

 

그는 찔레꽃 향기가 너무 슬퍼서 목놓아, 그것도 모자라 밤새워 울었다고 노래했다. 아니 노래를 불렀다기보다 울부짖었다.

 

이 시대 최고의 소리꾼으로 불리는 장사익(59). 가슴이 떨렸다. 보름전 인터뷰 약속을 하고, 막상 그를 만난다고 생각하니 진한 흥분이 온 몸을 감쌌다.

 

지난 26일 그와의 인터뷰는 그의 노래가 너무 좋아서, 마치 광(狂)팬의 마음가짐으로 진행됐다. 자하문 너머 보이는 북한산 자락에 자라잡은 그의 자택 2층.

 

한쪽 벽면을 통유리로 만들어 북한산 기슭이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그의 응접실이자 작업실에서 그가 끓여주는 중국 보이차를 마시는 호사를 누렸다.

 

전날 예술의 전당에서 펼친 ‘노래판’의 피곤이 가시지 않은 얼굴. 그러나 깊은 주름과 적당히 자란 희끗희끗한 턱수염이 잘 어울린다.

 


» 장사익이 서툴게 잘라온 사과와 외출했다가 뒤늦게 귀가한 부인이 내놓은 딸기.

» 찻잔 테이블을 겸한 응접실 나무 탁자.

» 장사익이 손님 접대를 위해 다기에 손수 끓인 중국 보이차를 내놓았다.

» 2층 응접실 겸 작업실의 한쪽은 벽면 전체가 통유리로 북한산이 시원하게 내려다 보인다.

 

‘이건 아니다’ 생각에 새납 딱 3년 배워 인생 바꾸기로

 

데뷔작이자, 대표작으로 꼽히는 <찔레꽃>의 가사에 대한 궁금함으로 실타래를 풀었다.

 

“왜 찔레꽃 향기가 슬프다고 했죠?”

 

(사실 이 노래를 늘 즐겨 들으며 궁금했다. 찔레꽃 향기에 대해 별다른 선입견은 없지만, 꽃 향기에 진한 슬픔을 이입시키는 것은 예사롭지 않았다.)

 

“아마 1992년 말께었죠. 내가 43살 때였을 것입니다. 그때 변변한 직업도 없이 친척이 하는 강남의 카센타에서 수리하러 온 차를 주차시키며 살아가던 때였죠. 바닥이었습니다. 생의 바닥이라고 느껴졌어요. ‘이건 아니다’라고 울분을 토하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새납(태평소)를 배우기로 했어요. 더늦기 전에 하고 싶은 것을 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그는 40대 초반 자신 인생의 역전을 꿈꿨단다. 그럼 인생 역전과 찔레꽃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그는 자신이 작사 작곡한 <찔레꽃>에서 찔레꽃을 ‘별처럼 슬프고, 달처럼 서럽다’고 표현했다.

 

“봄이면 배 고파 들판에서 따먹던 그 꽃에 내 모습이…”

 

찔레꽃이 그의 입을 통해 피어나기 시작한다.

 

“그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어요. 그때는 잠실 고층 5단지에 살았어요. 5월 어느날 아파트 단지를 나오는데 어디선가 진한 꽃 향기가 느껴졌어요. 불어오는 따뜻한 바람에 실려온 꽃 향기였어요. 주변을 보니까 붉은 장미만 눈에 띄었어요. 분명 장미냄새는 아니었어요. 장미덩쿨를 살피고 있는데 흰 꽃잎의 찔레꽃이 수줍게 피어 있는 것이 보였어요. 순간 어릴 때 기억이 났어요. 봄이면 들판에 핀 찔레꽃을 따 먹곤 했어요. 찔레꽃은 회충을 죽인다고 어른들이 말하곤 했어요. 장미덩쿨 뒷쪽에 나지막히 옹기종기 피어 있는 찔레꽃이 너무 아름답게 느껴졌어요. 그리고 그 찔레꽃이 내 모습처럼 보였어요. 당당히 나서지 못하고, 폼잡지 못하고, 쭈삣쭈삣 눈치나 보고 있는, 그런 모습과 나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슬퍼졌어요. 그냥 슬펐어요.”

 

장사익은 그 감정으로 <찔레꽃> 노래를 만들어냈다.

 

“막 울었어요. 그리고 막 토해냈어요. 슬픔을 쏟아내니 개운해졌어요. 슬픔이 씻겨나가고 마침내 기쁨으로 승화되는 느낌이었어요.”

 

피아노의 조용한 반주 속에 나지막하게 시작되는 그의 <찔레꽃>을 다시 한번 음미해 본다.

 

 

“하얀 꽃 찔레꽃/ 순박한 꽃 찔레꽃/ 별처럼 슬픈 찔레꽃/ 달처럼 서러운 찔레꽃/
(나지막하게 읊조리듯 시작한 이 노래는 점차 톤이 올라간다)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목놓아 울었지/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밤새워 울었지/
(이제 중창단과 함께 반복한다)

 

· · · 후 렴 · · ·

 

아! 노래하며 울었지/ 아! 춤추며 울었지/ 아! 당신은 찔레꽃”

 

비록 가사에서는 ‘당신은 찔레꽃’이라고 했으나 사실은 그 자신이었다. 그리고 중년의 남자가 꽃향기에 취해 울었다. 어느날 바람에 실려 온 꽃향기를 취해 만든 <찔레꽃>.

 

이 노래는 장사익 본인뿐 아니라 이 노래를 듣는 많은 이들의 감정샘과 눈물 샘을 오늘도 진하게 자극한다.

 

» 응접실 한쪽에 있는 징.

» 목포의 눈물 악보.

» 창밖을 바라보며 장사익이 노래를 연습하는 곳. 우리 가요 악보책과 기타가 놓여 있다. 악보책엔 ‘목포의 눈물’이 펴져 있다.

 

술집 벽지에 휘갈겨 쓴 시, 쓰레기통에서 찾아서 거침없이

 

이번엔 그의 자유롭고 거침없는 노래풍을 그대로 보여주는 <국밥집에서>의 가사를 물었다.

 

노래 중간에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니 희망이 족할까”라는 익숙한 ‘희망가’가 삽입된 이 노래의 후반부에는 장사익이 비장한 톤으로 외친다.

 

“그렇다/ 저 노인은 가는 길을 안다/끝내 흙으로 돌아가는 길을 안다”

 

노인의 죽음을 초월한, 인생을 달관한 경지를 한 줄로 표현한 이 노래를 들으면 속세의 부질없는 욕심이 부끄럽기만 하다.

 

“이 노래의 가사는 누가 만든 것이죠?”

 

“최산이라는 친구가 있어요. 그 최산이 강남의 어떤 술집벽에 휘갈려 놓은 시죠. 항상 이 시가 좋다고 생각하며, 언제나 저 시로 노래를 만들어야지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마음먹고 그 술집을 갔는데 벽지를 새로 한다고 모두 쓰레기통에 버린거예요. 그래서 쓰레기통을 뒤져서 그 시를 찾아 냈어요. 그리고 노래를 엮었죠.”

 

엮는다. 그는 노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엮는다’고 표현했다. 그러고 보니 그는 삶을, 노래를, 인생을, 고뇌를, 욕심을, 죽음을, 사랑을 줄줄이 엮는다. 그리고 그가 엮은 노랫 가락은 그의 입을 통해, 누에고치가 비단실을 풀어내듯 줄줄이 내 뿜는다.

 

그의 흥얼거림과 온 몸을 감싸는 끈끈함은 듣는 이의 감각을 마비시킨다. 과연 어디서 그의 노래가 품고 있는 마력과 괴력이 생겨난 것일까? 

 

» 소리꾼 장사익에게 풍경소리는 어떻게 들릴까.

» 깊게 패인 입가의 주름, 희끗희끗한 턱수염, 손을 쓸어넘긴듯한 머리칼... 북한산 자락의 집에서 만난 소리꾼 장사익의 너털 웃음은 여전했다.

 

 

 

새끼줄 꼬듯 그냥 불러 제끼는 ‘혼의 가객’

 

 

 

[시대의 소리꾼 장사익]② 아버지 장구가락 ‘유전자’

 

 

 

한겨레 이길우 기자
» 장사익. [화보]
 
그는 말하자면 중원에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검객과 같았다. 그의 노래가 무명의, 문파와 족보가 없는, 그러나 기막히게 칼을 잘쓰는 이를 닮은 까닭이다. 느린 듯하면서 상대의 공격을 잘 막아냈고, 막아내는 자의 빈틈을 찾아 송곳같이 파고들었다.
 

그가 휘두르는 검은 도(刀)도 아니고, 검(劍)도 아니고, 창(槍)도 아니었다. 처음보는 무서운 무기였다. 그가 그 무기를 휘두르면 추풍 낙엽처럼 쓰러졌다. 남들보다 5도 정도 높은 고음으로 시원스럽게 질러대는 탁성(濁聲)은 듣는 이들을 고압전류에 감전시키곤 한다.

 

시원스레 지르는 탁성…국악도 아닌 것이 가요도 아닌 것이

 

“그의 노래를 듣노라면 머리 뒷쪽이 아련히 시려오고, 가슴이 시원하게 뚫리는 느낌”이라거나 “즐겁거나 슬플 때나 그의 노래를 크게 틀어놓고 목청이 터져라 따라 부르면 최고의 카타르시스가 온다”는 평이 자연스럽게 뒤따른다.

 

그의 노래는 가요도, 국악도 아니다. 반주가 필요 없을 것 같은 새로운 장르다. 이런 깊은 내공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 정원을 꾸미고 있는 도자기 인형. 이길우 기자
» 2층 응접실에서 바라본 정원 모습. 갖가지 표정으로 노래하는 장승의 모습이 이채롭다.

 

“로커도 범접하기 어렵고 재즈 보컬도 무력하게”

 

대중음악평론가 강헌씨는 “그의 목소리에는 우리가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세속으로부터 초연한 봉건시대 가객의 혼이 깃들어 있다. 하나하나의 음과 낱말을 포착하는 기백은 어떤 탁월한 록 보컬리스트도 범접하기 어려운 경지이고, 여음과 여음 사이를 절묘하게 떠다니는 표현력은 어떤 절세의 재즈 보컬도 무력하게 한다”고 장사익을 평했다.

 

장사익은 “나의 어린 시절은 구수한 돼지냄새가 아련하다”고 말했다.

 

“10여년전 돌아가신 아버님(장세웅)께서는 시골 충남 광천에서 돼지를 길러 사고 파셨어요. 그래서 아버지 몸에서는 항상 구수한 돼지냄새가 났지요. 동네에서 잔반을 모아 돼지밥을 만들어 돼지를 키우셨어요. 3남4녀의 장남인 나는 당연히 아버지를 많아 따라 다녔어요. 아버지는 동네에서 유명하신 장구잡이였어요. 아버지가 돼지를 몰며 장구가락을 치셨고, 그 가락이 몸에 스몄나 봐요. 어릴땐 돼지를 타고 놀았으니, 돼지와 나와의 인연은 깊은 셈이죠.”

 

초등 때 웅변으로 목청 트고 고교 땐 ‘더 빡빡스’ 보컬

 

» 장사익이 쓴 병풍. 천국은 자신의 집을 부르는 말이다. ‘천국은/겨울햇살이 저만큼 음지까지 오고/따사한 맘이 가득한/좋은 소리가 항상 살아있는 내집/이곳이 정말 天國이야’라고 썼다.

아버지의 장구가락 유전자를 타고난 장사익은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웅변을 했다. 뒷산에 가서 마음껏 소리를 질렀다. 목청은 그때 트였다. 그의 자연 속에서 소리 지르기는 서울 선린상고 입학을 위해 상경할 때까지 계속됐다.

 

“폭포수도 있었어요. 그때 만들어놓은 목청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어요.” 장사익은 성인이 되면서도 술·담배를 하지 않았고, 그 덕에 아직도 폭발적인 목청이 유지되는 밑거름이 됐다.

 

“그럼 어릴 때부터 노래를 잘했나요, 언제 노래 공부를 했지요?”

 

“어릴 때 특별히 노래를 잘한 것 같지는 않아요. 고교시절 부터 노래에 빠졌어요. 주판을 갖고 박자를 맞추며 친구들과 ‘더 빡빡스’라는 이름의 보컬을 만들며 놀았어요. 군대에서도 문화선전대에 배속돼 노래를 불렀어요.제대후 취직을 했어요. 낮에는 평범한 직장생활을 하면서 밤에 낙원동에 있는 가요학원을 다녔어요. 노래만 잘하면 먹고 살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죠”

 

낮엔 직장 밤엔 낙원동 가요학원…3년동안 가요 섭렵

 

그는 그때 3년간 시중에 나와 있는 모든 가요를 섭렵했다고 했다. 한 주에 한 곡씩 집중적으로 연습을 하고, 주말에는 노래를 녹음해 테스트를 보았다. 그 테스트를 통과하면 다른 노래를 불렀다. 이때 체계적인 발성연습과 기술적인 부분을 연마했다.

 

그가 40대 중반에 데뷔해 부른 리바이벌곡, 예를 들어 <봄비> <목포의 눈물> <님은 먼곳에> <동백아가씨>등의 노래는 그때 장사익의 체내에 깊숙히 내재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엮어내는 노래의 기원은 어디일까?

 

“우리 엄마들이 애를 가슴에 안고 자장가를 불러주잖아요. 엄마들이 음표를 알아요? 그냥 부르는거지요. �조리면서 자신의 신세한탄도 하고, 집나간 남편도 욕하고, 시어머니도 욕하고. 그렇게 자장가가 만들어지는 것이죠. 감성적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처음 듣는 노래는 어디선가 불러본 노래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우리 공통의 감정 때문일 겁니다. 마치 새끼줄을 꼬듯이, 어떤 음악적 형식이나 격식없이 불러 제끼는 것이죠.”

 

“국악이 아닌가요?”

 

“제 노래는 국악이 바탕한 음악이지 올곧은 국악은 아니죠. 하하하”

 

» 보이차를 따르고 있는 장사익.

 

해직 뒤 독서실 전파상 가구점 노점상 등 전전

 

그가 갑자기 유리창을 통해 먼 곳을 바라본다.

 

잠시 말을 멈춘 장사익은 찻물을 다시 끓인다. 어려웠던 청년시절 탓인가 보다.

 

74년 1차 오일파동 때 다니던 회사에서 해직당한 장사익은 그뒤, 독서실·전파상·가구점·노점상·카센타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생계를 위해 음악과 떠난다. 그러나 음악에 대한 진한 향수는 그를 국악판에 끌어들인다.

 

그를 구원해준것은 바로 태평소였다. 소리꾼 기억 저 멀리 아련히 들리는 어릴 적 동네 할아버지가 시시때때로 부르던 태평소의 구성진 곡조가 그를 압박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나깨나 그 태평소 곡조가 머리를 빙빙 돌았어요. 미칠 것 같았어요. 그럴 때면 눈을 꼭 감곤 했어요”

 

 

소리꾼 장사익이 겪은 힘들었던 청년시절은 국악과 만나면서 실마리를 찾는다.

 

 

 

 

 

‘희망 한 단’ 사들고 읊조리듯 그렇게…

 

 

 

[시대의 소리꾼 장사익]③ 털털히 뒤집는 ‘역발상’

 

 

 

한겨레
» 장사익의 털덧신. 하도 오래 신어 뒷 축이 달아 있다. [화보]
 
장사익은 자유롭다.
 

턱수염도 부시시 기르고, 다림질이 필요없는 바지에 편한 털덧신을 신고 다닌다. 대중교통을 주로 이용하는데, 알아보는 이도 거의 없다고 한다. 그래서 편하게 산다. 지갑엔 보통 2만~3만원이 있다. 신용카드도 쓸 일이 많지 않다. 이런 장사익의 자유로움과 편함은 상식을 뒤집는 ‘역발상’으로 그의 음악에 그대로 묻어난다.

 

 

 

상여소리 엮어 만든 노래 끝부분에
흥겨운 곡조로 반전

 

그가 태어나서 자란 고향땅 충남 광천에서 불리는 상여소리(만가)를 엮어 만든 <하늘 가는길>의 백미는 마지막 부문이다.

 

“간다 간다/내가 돌아간다/ 왔던길 내가 다시 돌아간다/어-허아 어허야/ (중략) /명사십리 해당화야 꽃잎진다 설워마라/명년 봄이 돌아오면 너는 다시 피련마는/한번 간 우리인생 낙엽처럼 가이없네” 라며 가는 이를 애닯아하던 장사익은 막판에 흥겨운 곡조를 연출한다.

 

“하늘로 간다네/버스타고 갈까 바람타고 갈까 구름타고 갈까/하늘로 가는 길/ 정말 신나네요”

 

그 어떤 소리꾼이, 아니 시인이, 하늘가는 길이 신난다고 표현할 수 있을까? 그는 ‘하늘로 가는길’을 ‘정말 신나’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소리꾼이다.

 

“무대에서 내려오면 자연인, 인기는 구름 같은 것”

 

장사익이 ‘소리판’을 벌린다고 하면 한달전에 전 좌석이 매진되곤 한다. 천여명의 고정팬들은 그가 이땅 어디서 판을 벌리든 찾아간다.

 

심지어 그가 외국에 초청받아 갔을때, 그 외국이 남아프리카공화국인데도 따라다닌 수십명의 ‘광팬’이 있기도 하다.

 

그래서 그가 생각하는 ‘인기’를 물어 보았다.

 

“인기요? 인기는 무대 위에서나 있는 것이죠. 무대 밑에 내려오면 누구나 같아요. 무대 위에서 할 일이 있으면 그 일을 하고, 무대 아래에 내려오면 자연인이 되는 것이지요. 인기라는 것이 하늘에 떠있는 구름과 같아요. 옆에서 ‘너 인기 좋다’라고 말하면 물론 기분이야 좋죠. 그러나 인기는 있다가 없어지는 것. 집착하면 다쳐요.”

 

» 냉장고에 붙어있는, 지난해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소리판 포스터. 실내 곳곳에 붙여 놓았다.
그는 지난해 처음 노래하는 맛을 느꼈다고 했다. 그의 첫 앨범인 <하늘 가는길>이 나온지 10년이 지났는데, 이제야 노래하는 맛을 느꼈다니?

 

“지난해 세종문화회관에서 노래하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 이게 노래하는 것이구나. 아마도 난생 처음 노래하는 맛을 느낀 것 같아요.”

 

 

 

태평소로 대회 휩쓸고
국악피아니스트 임동창 만나 본격 ‘소리’

 

그는 3년전부터 국악기는 손을 놓았다. 나이 탓인지 소리도 하고 악기도 부는 것이 힘에 부쳤다고 한다. 그가 바닥의 인생에서 탈피하고자 ‘딱 3년만 해보자’고 잡았던 태평소는 사실 오늘의 그를 만드는 계기가 됐다. 태평소는 민간음악에서 당차고 센 소리로 서민들의 시름을 달래주고, 흥을 돋구던 악기다. 태평소에 탁월한 실력을 보인 그는 전주대사습 공주농악(93년)과 금산 농악(94년)에서 장원을 차지했다. 이어 <한국방송> 국악대제전 뜬쇠사물놀이(95년)에서 대통령상을 차지하며 국악계에 새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면서 장사익은 ‘소리꾼’으로 본격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각종 공연이 끝난 뒤 갖는 뒤풀이에서 장사익은 국악과 가요을 넘나들며 엄청난 ‘내공’이 함유된 노래를 불러젖혔다. 이 즈음 국악피아니스트며 작곡가인 임동창씨도 만났다. 임씨의 권유로 장사익은 노래를 본격적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시쳇말로 ‘대박’ 이 터졌다.

 

시민단체 집회에 별 대가 없이 출연한 ‘재야 소리꾼’

 

장사익은 시민단체가 여는 각종 집회와 모임에서 어렵지 않게 얼굴을 만날 수 있는, 유명 가객이다. ‘재야 소리꾼’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장사익은 별 대가없이 집회에서 노래하는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저는 민주화 시기에 별로 한 게 없어요. 민중가요 한 곡도 몰라요.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노래로 그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은 거죠.”

 

창 밖의 하늘은 꾸물꾸물하다. 기상대 예보로는 눈이 내린다고 했는데…. 북한산을 배경으로 시원스럽게 내라는 함박눈을 보면서, 거장의 노래를 듣고 싶었다. 문득 정원(10평 남짓)에 울려 퍼지던 피아노 연주가 궁금해졌다.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 장사익이 자신의 정원에 있는 나무과 풀잎들, 정원 옆의 큰 바위, 그리고 자신의 집에 놀어오는 산짐승들에게 들여주기 위해 정원에 설치한 라디오. 방수를 위해 백화점 포장지로 씌운 이 라디오에는 자동 타이머가 장착돼 있어 오전 6시부터 밤 10시까지 에프엠 라디오 방송이 자동적으로 자연을 향해 방송된다.

 

집 뜰 나무와 풀, 산짐승 들으라고 자동 타이머 라디오

 

» 장사익이 뜰에 나갈때 신는 검정 고무신. 한쪽은 250. 다른 한쪽은 255. 짝짝이다.
“라디오에 자동 타이머를 설치해 아침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에프엠 방송을 틀어 놓아요. 뜰에 있는 나무와 풀, 곤충, 그리고 놀러오는 산고양이 같은 짐승에게 음악을 들려주는 것이죠. 좋아들 해요. 가까이 온 산짐승들은 소리치면 가지만, 음악소리 듣고는 가지 않아요.”

 

어릴적, 고향 광천의 들판이 그리워서 일게다.

 

그러고 보니 정원 한 옆에 방수종이로 싼 카세트라디오가 있다. 비에 젖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검정 고무신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자세히 보니 한짝은 250사이즈이고, 다른 한짝은 255사이즈이다. 짝짝이가 대수랴.



 

“70~80이 되도록 무대에 설 그런 꿈꿔요”

 

마무리하는 질문을 던졌다.

 

“희망이 뭔가요?”

 

그러자 그의 표정이 더욱 온화해지며 대답한다.

 

“늘 꿈을 꿉니다. 나이 70~80이 되도록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힘이 없어 무대에 설 수 없을 때까지 말입니다. 그때의 무대는 더욱 멋있을 것입니다 . 읊조리듯, 씨부렁거리듯, 그렇게 노래를 부르다가 가고 싶어요. 늘 꿈꿔요. 그런 행복함을…”

 

그의 5집 <사람이 그리워서> 타이틀곡인 ‘희망 한단’에서 그는 이렇게 노래한다.

 

“채소파는 아줌마에게 이렇게 물어본다/ 희망 한단에 얼마예요”

 

순박한 아줌마는 이런 엉뚱한 질문에 대해 이렇게 ‘현답’한다.

 

“채소나 한단 사가세요”

 

장사익의 행복은 채소 한단에도 만족해진다. 마침내 하늘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 소리꾼 장사익에게 풍경소리는 어떻게 들릴까.

 

글·사진 <한겨레> 이길우 기자 nihao@hani.co.kr

 

 

 

 

장사익의 ‘찔레꽃’

장사익의 ‘봄비’


장사익의 ‘국밥집에서’

장사익의 ‘하늘 가는 길’


장사익의 ‘희망 한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