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지고 별 반짝이면 더욱 그리운 나의 마음 세상 사람이 뭐라 해도 그대 없이 난 못살겠네 사모하는 나의 마음 그대에게 보여 주고 애태우는 나의 심정 그대에게 밝혀 주리 우아야 우우우우 우아야 우우우우
출렁 거리던 바닷물 소리 멀리 멀리 사라지고 잠 못 이루어 지새운 밤 동녘 하늘이 밝아 오네 사모하는 나의 마음 그대에게 보여 주고 애태우는 나의 심정 그대에게 밝혀 주리 우아야 우우우우 우아야 우우우우
[추억의 LP여행] 서유석
교육자 집안의 돌연변이, 서유석. 공동묘지에서 밤을 새운 남자다운 용기가 공부보다 중요하고 자랑스러웠던 것이 어린 시절의 자화상. 서울중학 2학년 때 전교480명중 꼴찌였던 그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핸드볼 청소년 국가대표선수로 선발된 것은 '누가 뭐래도 1등을 한번 해보자'는 타고난 승부욕 때문.
1964년 체육특기자로 성균관대에 입학, 하루 4시간의 고된 훈련과 적응하기 힘들었던 교육자 가정속에서 녹초가 된 몸과 마음은 늘 무언가를 갈구했다. 어린 시절 생활화한 어머니의 피아노 반주와 형제들의 멋들어진 화음이 싫지 않았던 서유석. 작곡을 전공한 작은 누님의 바이올린을 슬쩍해 통기타 한대를 마련했다.
매일 운동시간 외에는 기타에 매달려 외로움을 달래던 대학 3학년 어느 날, 우연히 명동의 미도파 살롱에서 가수 김상희의 사회로 매주 열리던 노래자랑대회에 참가한다. 화려한 김의춘 섹소폰밴드의 반주에 맞춰 'Beautiful brown eyes'를 멋들어지게 부른 결과는 4주 연속 우승.
이때부터 서유석은 '고아'로 유명해진 학교후배 오세은의 형으로부터 본격적인 클래식 기타 주법 배우기에 정신을 빼앗긴다. 자신감이 생긴 그는 학교 여학생회관에서 '작은 음악회'를 열 정도의 실력을 갖추었다.
순전히 공짜 술을 마시며 놀기 위해 명동의 켄트 살롱에서 친구들과 판 틀고 카운터보고 여종업원 보디가드 역할을 했던 아르바이트. 배운 게 도둑질(?)이라 1968년 대학졸업후 1개월간의 실업 핸드볼 선수생활을 그만두고 학교앞 카사노바 카페의 지배인으로 사회생활의 첫 단추를 꿴다.
후에 인기 남성듀엣 '에보니스'의 윤형민이 개런티 문제로 펑크를 내자 서유석은 지배인 겸 속칭 '땜빵가수'로 무대에 선다. 이때 부른 레퍼토리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Love me tender'. 노래하는 지배인., 그는 제법 인기를 끈다.
서유석의 가수데뷔는 이 업소에 술 마시러온 원로 코미디언 구봉서의 주선으로 이루어졌다.
직업 통기타 가수로 나선 당시, 음악동료는 김민기, 양희은, 한대수, 조영남, 트윈폴리오, 최영희 등 모두 내로라하는 통기타 가수들.
데뷔음반은 신세기 레코드의 <6인의 힛트 앨범> 시리즈. 영화 로미오와 쥴리엣의 주제곡 'A time for us'를 '사랑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번안해 당대 최고의 여가수 패티김, 양미란과 함께 어우러진 컴필레이션 음반이다.
이어 1971년 1월5일 첫 독집인 <지난 여름의 왈쓰-신세기레코드.가12309>를 발표.
총11곡의 수록곡 중 최대 히트곡은 2면 머릿곡인 '철날 때도 됐지'(2집부터는 '파란 많은 세상'으로 제목이 바뀌었다)다.
'학교 앞에 책방은 하나 양장점은 열., 책방은 하나 대포집은 열'이라는 노랫말로 1970년대 초기의 대학가 풍경을 실랄하게 비꼰 곡이다. 내친 김에 같은해 5월, 2집 <아름다운사람/비야비야- 유니버샬KLS15>를 발표하는 왕성한 활동을 보였다.
파워 넘치지만 때론 수줍은 듯한 서유석의 기타 연주. 그리고 구성진 저음의 차분한 목소리는 단연 최고의 인기몰이를 한다.
또한 대표곡 '비야 비야'는 빗소리, 천둥소리를 효과음으로 넣는 참신한 음악적 시도. 그러나 전도양양하던 서유석도 피할 수 없는 혹독한 시련에 부닥치게 되는데..
2집에 수록된 10곡중 이스라엘 민요를 번안한 1면 머릿곡 '비야 비야'의 개사가 문제였다.
앨범에 인쇄된 가사 밑에 '어느 분이 이 가사를 만들어 YMCA에서 보급한 것을 본인이 곡 흐름에 무리없는 한도 내에서 수정하여 음반에 담은 것'이라고 설명까지 했건만 '서유석 개사'라고 명기한 것을 트집잡은 원작자로 인해 금지곡으로 등록된다. 2면 머릿곡인 '세상은 요지경'은 'Games people play'를 각설이타령조로 개사한 번안곡.
하지만 '영어공부 십년에 생각나는 건 노래가사., 엿새동안 죄를 짓고요 하루만 기도하면요 천당간다네'등 시니컬한 가사내용은 방송부적격이란 이유로 싸잡아 금지도장이 찍힌다.
이중 헤르만 헷세 작시인 '아름다운 사람'과 '대답은 없어라' 등 2곡은 창작곡으로 '아름다운 사람'은 당시 대학가의 최대 히트곡. 서유석의 신바람나는 하모니카와 작렬하는 기타 연주, 그리고 백허밍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 명곡이다.
이 곡에 얽힌 웃지못할 사연. '장난감을 받고서 그것을 바라보며 얼싸안고 기어히 부셔버리는.'으로 잘 나가던 노래를 '돌보지 않는 나의 사람아'부분에서는 '음반이 튄다'는 엉뚱한 이유로 '돌보지'만을 반복하여 부르는 짖궂은 남학생들이 많았다.
일부 마니아들은 그 부분을 일부러 흠집을 내 바늘이 튀게 만들어 자랑스레 들려주었을 정도. 앨범 자켓은 뚝섬을 배경으로 합성한 사진이고 뒷면에 실린 코스모스 살롱, 이화여대 강당공연의 사진으로 그에 관한 소중한 영상자료이자 볼거리.
1972년 1월1일 돌연 출연업소인 코스모스 살롱에서 잠적. 인기절정의 서유석은 뜻한 바 있어 화려한 밤무대를 벗어나 전국 각 대학 캠퍼스와 공회당에서 '고운 노래 부르기' 캠페인과 포크송 보급운동에 헌신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소위 '서유석의 3대 명반'은 이 잠적기간에 탄생한다.
'70년대 포크의 기수' '노래하는 음유시인'. 이런 표현들은 가수 서유석을 칭하는 미사여구들이다. 흔히 서유석을 김민기 한대수와 묶어 '포크 3인방'이라 부른다.
서유석의 노랫말은 또 곧잘 미국 '모던 포크의 대표주자'라고 하는 밥 딜런의 음악에 비유된다. 밥 딜런과 존 바에즈가 월남전 반대 등 반전 메시지를 품고 있다면, 서유석은 독재군사정권의 암울한 정치상황이 빚어낸 정치ㆍ사회 현실을 풍자하는 메시지로 무장했다.
대상이 다르긴 해도 불의를 참지 못하고 고민한 동시대의 많은 젊은이들이 그들의 음악을 즐겨 부르고 강력한 영향을 받았다는 점에서는 어느 정도 닮은 꼴이다.
서유석의 3대 명반으로는 3집 1972년9월23일 출시>, 4집<서유석 걸작집-유니버샬KLS42. 1972년11월5일 출시> 그리고 5집<선녀-유니버샬 KLS57. 1973년 출시>을 꼽는다.
1973년 4월 TBC의 심야 라디오 프로인 '밤을 잊은 그대에게' DJ를 맡기 전까지 발표했던 71~73년의 3대 명반을 포함한 6장의 초기 음반은 그가 음악마니아들에게 '70년대 포크의 기수'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한 이유다.
3집은 국내 첫 라이센스 계약으로 최고의 음질을 자랑하는 성음사의 수출용 음반으로 나왔다.
타이틀과 모든 곡 제목이 영문으로 표기된 봉투형의 특이한 앨범이다. 총12곡의 수록곡중 대표곡은 양병집이 채보해 개사한 <타박네>와 구전가요 <진주낭군>. 한국적 가락의 향기가 진동하는 앨범이다.
4집은 앨범 자체가 금지된 불손한 서유석의 최대 명반. 이 판에 수록된 11곡은 어느 곡하나 빠뜨릴 수 없는 명곡들이다. 특히 <담배> <강> <먼후일> <친구야>는 섬뜩할 정도로 강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김민기의 데뷔앨범처럼 지하에서 불티나게 불법 복사돼 소장하는 것 자체가 자랑이었던 음반이다.
5집은 한국 록의 '살아있는 전설' 신중현과의 성스런 작업의 결실이 낳은 음반이다.
'신중현과는 음악적 갈등으로 고통속에서 제작한 음반이였다'고 그는 고백한다. 두 사람사이에서 '가장 큰 간극은 사랑에 대한 서로의 출발이 다름'에서 왔지만 결국 '종교적 사랑'으로 신중현과 음악적 합일점을 찾고 한국 최초의 포크록 음반을 창조해 냈다.
합일의 결과가 바로 <선녀>다. 마치 선녀가 내려오는 듯한 신비한 분위기의 사운드가 환상적인 명곡이다. 신중현이 직접 노래한, 마치 환각제에 중독된 듯한 상태에서 싸이키델릭하게 연주한 미발표곡 '엽전들'의 <선녀>를 듣노라면 전율을 느낄 정도다.
장현의 노래로 유명한 <나는 너를>의 오리지널 가수가 실은 서유석이라는 사실도 흥미롭다. 이 음반에서 노래한 서유석 버전 <나는 너를>은 장현을 능가한다.
'반사회적인 통기타쟁이'로 눈에 가시처럼 여기던 당국으로서는 그의 방송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은 당연한 일. 그 때는 국군의 월남파병논쟁으로 온 나라가 뜨거운 정치적 공방으로 후끈 달아올라 있던 시기였다.
'밤을 잊은 그대에게' 프로에서 느닷없이 UPI 종군기자가 쓴 '추악한 미국인' 종군기가 여과 없이 마이크를 탔다. DJ 서유석이 사고를 친 것이다. 서유석은 이후 3년간 아무런 활동도 하지 못하게 된다.
실내장식업을 겸한 양복점 '타나타'로 첫 사업을 시작해 재미를 보지만 2년이 못 가 적자를 냈고, 대전에서 '아리'라는 호프집을 내 냉혹한 경제ㆍ사회 현실을 몸으로 익히기도 했다.
이따금 대학축제에 불려가 노래로 억눌린 울분을 달래보기도 했지만 막막한 앞날에 대한 걱정은 무력감과 좌절감이 뒤섞인 가위눌림으로 변했다. 이때의 처절한 심정을 담은 노래가 당시로서는 드물게 6개월만에 100만장의 발매기록을 세운 8집 <가는세월-서라벌SLK1022>이다.
이 때문에 일반 대중들은 <가는세월>을 서유석의 대표곡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80년대 젊은이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던 <그림자>로 연달아 대박을 터뜨렸다.
집안에선 늘 말썽꾸러기, 사회에선 요주의 문제아로 취급당했던 서유석. 그러나 뚜렷한 자기 주관과 시대를 앞서가는 강한 개성은 60-70년대 보수적인 현실에선 그렇게 취급당할 수 밖에 없었다.
미국입국 비자문제, 그리고 미 대사 부인의 초청 거절건으로 반미인사로 낙인찍혔던 두차례의 자존심 싸움. 그래서 그는 지독한 애국자인지도 모른다. 사업차 방문한 미얀마의 수도 양곤에서 교민들을 한마음으로 묶은 즉석 콘서트는 물론 늘 소외계층과 잘못된 사회현실을 꼬집는 것도 혹 애국심이 너무 강해서가 아닐까?
'노래에 메시지가 없다면 그건 노래가 아니다. 장르는 중요하지 않다. 젓가락만 치고 부르는 작부가락으로 취입을 하는 가수도 나올 것이다.' 요즈음 크게 변화된 그의 음악관이다. '60세가 될 때 완성하고 싶다'던 폭넓은 '사랑'을 주제로 한 노래에 대한 그의 꿈. 이제 몇 년 남지 않았다.
앞만 보고 달려온 서유석. 그가 평생 꿈꿔온 장르를 초월한 지순한 '사랑'노래는 과연 어떤 가락과 노랫말일까? 그의 60세가 더욱 기다려지는 이유이다.